“밥값이 노동자 시급을 넘으면 안 되죠”

호호국수 송미영 씨는 2011년 SBS ‘생활의 달인’ 출연 섭외를 받았으나 스스로 거절했다. 만일 그 때 미영 씨가 ‘생활의 달인’에 나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은 거절한 걸 후회하고 있지는 않을까? 2년이 지난 지금 미영 씨를 다시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한 이유였다.

송미영(44) 씨. 창원시 성산구 내동 동우상가 ‘호호국수’ 주인. 2년 4개월 전인 2011년 5월 <경남도민일보> 1면에 ‘더 주고 또 주는 국숫집 주인’으로 소개됐고, 이어 6월 13일까지 11회에 걸쳐 그의 인생 스토리가 연재되면서 많은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양 팔이 없고 눈도 보이지 않는 중증장애인 아버지를 모시고 어린 시절부터 온갖 역경을 견뎌온 그의 이야기에 독자들은 함께 가슴아파했고, 동료 노동자에 대한 회사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다 어렵게 얻은 정규직 용접공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을 땐 함께 분노했다.

가곡 하는 국숫집 아줌마

열아홉 살 때 안타깝게 헤어졌던 스승과 만남도 연재 과정에서 이뤄졌다. 자신을 수양딸로 삼으려했던 가곡 명인 조순자 가곡전수관장(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예능보유자)과 23년만의 해후는 그야말로 눈물바다였다. 독자들은 함께 울며 스승과 제자의 만남을 축하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이제 송미영의 삶을 찾으라’는 응원도 이어졌다. 이들 글에는 각각 1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고, 호호국수에서는 ‘점심 번개’ ‘저녁 번개’가 줄을 잇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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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일호 기자

그 여운은 2년이 넘어서도 계속되고 있다. 요즘도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엔 호호국수의 위치나 전화번호를 묻는 전화가 종종 걸려온다. 얼마 전에는 SBS에서 전화가 왔다. 송미영 씨를 라디오에 출연시키고 싶다는 거였다.

8월 23일 오전 11시 미영 씨가 출연한 SBS ‘당신은 라디오스타’를 인터넷 생방송으로 들었다. 그날의 출연자는 미영 씨와 함께 ‘김 굽는 아줌마’로 알려진 박향희(45) 씨였다. 송미영과 박향희. 역경을 극복하고 일어섰다는 점에선 공통점이 있지만, 지금의 모습은 많은 차이가 있다. 박향희 씨는 청주 육거리시장에서 5만 원을 종잣돈으로 김 구이를 시작, 2006년 SBS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유명해졌고, 지금은 연간 15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김 구이 전문 프랜차이즈업체의 대표다.

하지만 미영 씨는 2011년 <경남도민일보> 보도 직후 같은 프로그램인 ‘생활의 달인’ 출연 섭외를 받았으나 스스로 거절했다. 당시 미영 씨의 거절 이유는 이랬다.

“아니, 제가 생활의 달인도 아닌데, 거기에 왜 나가요? 그리고 신문에 나온 뒤로 갑자기 늘어난 손님을 대접하기도 일손이 모자라는데, 텔레비전까지 나가면 그걸 어떻게 감당해요? 끓지도 않았는데 넘치면 안 되지요.”

거기에 한 마디 더 보탠 미영 씨의 말. “일요일까지 촬영해야 한다는데, 일요일은 기자님과 만나기로 한 날이잖아요. 기자님과 약속해놓고 다른 사람을 부를 순 없죠.”

만일 그 때 미영 씨가 ‘생활의 달인’에 나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은 거절한 걸 후회하고 있지는 않을까? 사실 나도 당시 미영 씨가 출연하지 않은 게 내심 아쉬웠었다. 나와 인터뷰 약속은 다른 날로 조정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2년이 지난 지금 미영 씨를 다시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한 이유였다.

하루 세 시간 자면서 가게 두 군데 운영

미영 씨 집안은 호호국수 외 가게를 하나 더 운영하고 있었다. 창원시 의창구 봉곡동에서 남편 김도연(45) 씨가 하고 있는 프랜차이즈 치킨 전문점이다. 물론 여기에도 미영 씨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호호국수는 준비된 재료가 다 팔리면 문을 닫는 ‘한정판매’로 영업시간을 줄였다. ‘저녁 장사’인 치킨 가게에 합류하기 위해서다. 대개 오후 6시나 늦어도 7시 30분에는 국수와 국밥 재료가 떨어진다. 그러면 부랴부랴 봉곡동 치킨 가게로 옮겨 주방에 투입된다. 그 때부터 남편도 종업원과 함께 배달에 나선다. 

그렇게 다음날 새벽 1시 30분~2시까지 일하고 집에 가서 씻고 누우면 새벽 3~4시. 세 시간쯤 자고 다시 8시 30분쯤 호호국수로 출근한다. 그나마 아침 장보기는 동생 애영 씨가 봐온다. 기자의 체력으로 볼 땐 실로 초인적이다. 이렇게 혹사시키고도 몸에 탈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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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일호 기자

“아마 국장님이 절 따라 다니면 죽을 겁니다.(웃음) 사실 얼마 전에 몸살로 심하게 아팠어요. 지금도 감기가 떨어지지 않았고요. 그런데 이렇게 하니까 먹고 살지요. 이렇게라도 안 하면 어떻게 먹고 살 건데? 내가 한 달이라도 안 벌면 우리 아버지도 그렇고 딸린 식구들이 모두 손가락 빨고 있어야 하는데요?”

남편 도연 씨는 2011년 만났을 때 진해 STX조선의 하청업체에서 ‘돈내기(도급제)’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STX그룹에 위기가 닥치면서 일감이 줄기 시작했다. 한 달 중 일하는 날보다 쉬는 일이 더 많았다. 결국 지난해 11월 치킨 프랜차이즈를 시작한 것이다.

“도연 씨가 우리 집안 가장인데, 가장이 무직자로 놀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다시 빚을 냈죠. 프랜차이즈 가맹비와 점포 권리금, 전세금 다 합쳐서 1억 원 정도 들었어요. 그걸 뽑으려면 죽자 사자 벌어야죠. 사실 프랜차이즈는 쉽게 시작할 수 있는 반면 마진율이 낮아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죠. 그렇게 해서 우리 신랑이 기반을 잡고 일어서면 나도 국밥에만 매진할 수 있겠죠. 국밥집을 크게 키울 수도 있고….”

그러고 보니 호호국수도 주종이 국수에서 국밥으로 바뀌었다. 요즘은 국밥이 훨씬 많이 팔린단다. 연탄불에 24시간 끓여내는 사골국물이 입소문을 타고 꽤 알려졌다. 가격은 국밥 5000원, 국수 3500원 그대로다. 여전히 곱빼기나 공기밥은 추가요금을 받지 않는다.

“밥값이 노동자의 시급을 넘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 시국이 워낙 어렵고, 제가 노동자 생활을 해봤잖아요. 우리 집 손님 중에 공단 노동자들이 많은데…. 그래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니까. 내가 조금만 고생해서 연탄불 갈아가며 사골 고아서 하면 되니까요. 이 가격을 지키는 것은 우리 가곡(歌曲)을 지키는 것과 똑 같아요. 돈 버는 건 나중에 크게 할 때 해야죠.”

가곡전수관 운영위원이 되다

-2년 전 단골 중에 고등학생 남학생 둘이 와서 세 곱빼기 한 그릇 시켜 나눠먹던 애들 있었잖아요. 요즘도 오나요?

“아! 걔들 공고생인데 지금은 아마 취업 나갔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가장 가슴 아픈 건 여기(창원공단) 꿈을 안고 실습생이나 계약직으로 왔다가 끝내 정규직이 못되고 떠나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와서 마지막으로 국밥 먹으면서 ‘이모! 이제 인천으로 떠나요’ 할 때 가장 마음이 아파요.”

-아, 그런 사람들이 많나요?

“정규직이 되려면 ‘빽’도 있어야 하고…. 일 잘하는 건 관계없이 ‘빽’이 있어야 하더라고요. 그런 현실이 너무 슬프더라고요.”

-빽이 있어야 하나요?

“국장님! (답답하다는 듯) 왜 그럽니까? 정직 되려면 다 ‘빽’이 있어야 하잖아요. 요즘 ‘빽’으로 안 들어가고 바로 입사하는 사람이 있나요? 5000만 원, 3000만 원 들었다는 사람도 있고 1억 들었다는 사람도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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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일호 기자
어쨌든 이렇게 팔아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니까 국밥 팔아서 과연 얼마나 벌까?

“한정판매를 하니까 준비된 재료를 다 팔면 하루에 25만~30만 원 정도죠. 수육 손님 예약이 많이 들어오는 날에는 80만 원, 100만 원을 팔 때도 가끔 있어요.”

하긴 2011년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하루 매출은 5만 원 내외였다. 그의 삶이 <경남도민일보>에 연재될 당시엔 50만~60만 원이었으니, 저녁 장사를 하지 않고도 이 정도면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다. 월 수익은 평균 200만 원, 많을 땐 300만 원 정도 된다.

“저는 항상 500을 채운다는 기준을 갖고 살아왔거든요. 남편이 200만 원 벌어오면 내가 300만 원을 채워야 하고, 남편이 300이면 나는 200. 그래서 목욕탕 청소도 했고, 낮에는 분식집, 밤에는 갈비집에서 일하기도 하고, 쉬는 날에는 스티커 작업, 신문 배달도 했던 거죠. 그런데 지금은 나가야 할 돈이 700만 원으로 늘었어요. 그래서 더 벌어야죠.”

미영 씨 부부가 부양할 가족은 대학입시를 준비 중인 딸과 중3 아들 외에도 중증 장애를 가진 아버지와 새어머니, 그리고 경북 구미에 살고 있는 시아버지가 있다. 그리고 필리핀의 한 고아원에 매월 30만 원씩 기부하고 있고, 가곡전수관에도 매월 일정액을 후원하고 있다. 액수는 밝히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가곡전수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해보니 (사)아름다운 우리가곡(이사장 한철수)의 운영위원 명단에 ‘송미영(호호국수 대표)’이란 이름이 올라 있었다. 이재욱 봉림장학재단 이사장, 손종호 두산종합건기 대표, 박영빈 경남은행장 등과 함께였다.

-2011년 6월 조순자 관장과 23년만의 상봉 이후, 다시 가야금을 시작했는데, 지금도 매주 가곡전수관에 가시나요?

“가죠. 처음엔 토요일마다 가다가 이제는 목요일마다 오후 2시나 2시 반 쯤 가서 네 시나 다섯, 여섯 시까지 공부하고 옵니다.”

-얼마 전 SBS ‘당신은 라디오스타’에 출연하신 걸 들었는데, 가야금이 아니라 가곡을 하시더군요. 아주 잘 하시던데요?

“잘 하던가요? 못하는데…, 저보다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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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일호 기자
-가야금은 안 하고 가곡만 하시나요?

“가야금은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원래부터 가곡을 하고 싶었어요. 선생님이 23년 전 그때도 ‘모란은’ 한 자락만 가르쳐주셨거든요. 그게 우리나라 가곡이었죠. 열아홉 살 때 그걸 다 배우지 못하고 헤어졌는데, 평생을 그 때 배우지 못한 아쉬움을 지금까지 묻어두고 살아 왔죠. 하고 싶었는데 이번에 선생님이 노래를 하라고 하셨을 때 반가웠죠. (너덜너덜해진 책을 보여주며) 여기 악보에 있는 것 다 떼었어요.”

-이제 목요풍류 무대에도 오르나요?

“아직 무대에는 안 올라요. 아직 배울 게 많은데, 소리가 금방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이 열여섯 가락은 1년 정도 걸렸어요. 가곡이 한 바탕, 두 바탕이라고 하는데, 열여섯 곡이 한 테두리가 되는 거죠. 늦은 것도 있고, 빠른 것도 있고, 굉장히 빨라지다가 한 바퀴를 도는 거죠. 아직은 부족하죠. 그런데 사실 무대 서는 게 겁이 나요. 한 번 서고 나면 자꾸 서고 싶을까봐. 그렇잖아도 손님들이 노래 불러달라면 듣기 싫어해도 세 곡 네 곡 자꾸 부르는데….(웃음)”

-가곡을 조금만 들려줄 수 있나요?

“뭘 해볼까요?”

-(순간 당황했다. 아는 게 있어야 해달라고 하지.) 그냥 가장 대중적인 걸로….

“가곡은 대중적인 게 없잖아요. 그게 슬픈 현실이죠. 듣는 사람이 없으니까. 대중적이기 보다 그냥 얼을 지켜가는 거죠. 우리 문화 자체가 느린 것보다 워낙 빠른 데에 귀가 열려 있으니까. 실제로는 잔잔하면서 내공의 힘으로, 힘들더라도 느린 걸 좋아합니다. 듣기로는 빠른 게 좋겠죠. 조수미가 부르는 그런 오페라는 알려져 있기 때문에 어려워도 그걸 들어주는 귀가 있지만, 우리 가곡은 오페라의 형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들어주기조차도 않는다는 것, 그게 가슴 아프죠. 이 창법을 하게 되면 판소리나 가요나 일반 대중가요까지도 소화를 다 해낼 수가 있거든요.”

그러면서 한 자락을 뽑았다.

“아~~~~~~~~ 아~~~~아~~~~아아~~~암~~~으~~~~~~음~~~~~~으으~~~.”

이 대목에서 유네스코에서도 인류구전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한 가곡이 과연 뭔지, 가곡전수관 홈페이지에 있는 설명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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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일호 기자
“가곡은 조선시대 선비들이나 경제적으로 부유한 중인들 사이에서 연행되어 왔으며 조선시대의 또 다른 성악곡인 시조, 가사와 자주 비교된다.

가곡은 시조시를 노랫말로 거문고, 가야금, 피리, 대금, 해금, 장고 등의 관현악 반주에 얹어 5장 형식으로 부르며, 만년장환지곡(萬年長歡之曲)이라고도 칭한다. 가곡, 가사, 시조를 묶어 ‘정가(正歌)’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가곡은 특히 시조시(時調時)를 노랫말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시조와는 무엇보다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세기 말부터 가곡은 ‘노래’라 하였고, 그 이외의 성악곡은 ‘소리’라 하여 구별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조선후기 성악곡 중에 판소리, 서도소리, 홋소리, 짓소리 등에서는 ‘소리’라는 용어가 쓰였고 가곡에는 ‘노래’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것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가곡을 위해 6kg 몸을 살찌웠다

-조순자 관장이 “이제는 그 누구를 위한 삶이 아니라, 송미영 자신을 위해 살아라”고 했잖아요. 가곡을 하는 게 행복한가요?

“이게 내 길이라고 생각하죠. 행복합니다. 일주일에 세 시간(가곡전수관 가서 공부하는 시간)은 오롯이 나에게 투자하는 거죠. 여기(식당)서도 매일 노래를 하는데, 식당은 2년 전과 똑같이 보여도 이 안에 있는 송미영은 많이 달라졌죠. 쉬는 시간마다 노래를 불러요.”

-손님 없을 때 식당에서 노래를 부른다고요?

“매일 가곡전수관에 갈 수는 없으니까. 이웃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요. 이 시간 되면 저 아줌마 노래 부른다고. 처음엔 째지는 소리였는데 이제는 다 잘한다고 해요.(웃음) 노래를 더 잘 하고 싶어서 허리에 살도 5~6kg 더 찌웠죠.”

-일부러 살을 찌웠다고요?

“울림통이 있어야 하니까. 살이 빠지면 힘 있는 소리가 안 나와요.”

-어떻게 하면 갑자기 그렇게 살을 찌울 수 있나요?

“간단합니다. 라면 세 그릇씩 먹고 자면 됩니다.(웃음)”

-대개 여자들은 날씬해지려고 살 빼려하는데.

“제가 제 소리를 들었을 때 배에서 나오는 파장이 있어요. 서서 부를 때와 앉아서 부를 때가 달라요. 앉으면 소리가 안 나와요. 이 힘을 기르기 위해선 허리가 가냘프면 안 되더라고요. 내 소리가 마음에 안 들었죠. 살을 찌우고 나니 내 소리가 마음에 들더라고요.(웃음)”

-그러면 가곡만 계속 할 건가요“

“가곡을 하면 판소리도 되고 시조창도 되죠. 가곡을 다 떼고 나면 가사, 시조 다 이수 받게 되는데,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너는 판소리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선생님이 그 말씀 말고는 안 하시던가요?

“음…. 선생님하고 나만 아는 게 있어요.”

-그게 뭔데요?

“그런 게 있어요. 그냥 선생님 배운 것 그대로….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노래만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얘야 아직 늦지 않았다. 사십 넘어서 공부해서 인간문화재도 될 수 있다’고 말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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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일호 기자
-누가 사십 넘어서 인간문화재가 됐나요?

“그런 분들 많죠. 우리 선생님도 그렇게 되신 거 아닙니까? 그래서 나보고 세월을 앞당겨라 시간을 당기라고 하시죠. 사람은 모르는 것 아니잖습니까? ‘나이 제한 없다. 학력 제한도 없다. 얘야. 노래로만 승부해라.’ 그런데 제가 이수도 받고 이것도 다 외우고 해야 하는데, 국밥 한다고 그럴 시간이 있습니까? 단지 감으로만 배우는 건데…. 제가 뭐 (전문적으로) 국악 하는 사람들처럼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것만 했더라면 굉장히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겠죠. 거문고 가야금 장구 다 섭렵했을 것 같아요.”

-가곡을 통해 뭔가 이루겠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나요?

“제가 아직 놓을 수 없는 짐이 많잖아요. 아직은 돈을 벌어야죠. 다만 선생님이 갖고 있는 열정, 숨결, 이걸 지키기 위해 살아왔던 역사, 그냥 그걸 내 몸속에 담고 싶다는 거죠. 전수관에 후원도 많이 하고 싶고…, 레슨비는 못 드리더라도 후원은 해야 하지 않겠어요? 내가 가곡을 해서 뭘 하겠다는 것보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으니 여한이 없어요. 이걸 위해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연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불현듯이 내게 주어진 의무감, 책임감이라 해야 하나? 그냥 내가 관람객으로서, 마지막 관람객으로 남을 수도 있다는 것…. 가곡전수관에 사람이 없잖아요. 오는 사람도, 듣는 이도 없는데 공연을 주최하시는 선생님. 선생님의 공연을…. 마지막에 내가 여유가 된다면 노래 부르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노래 듣는 사람으로서 내가 지킬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죠. 내 마음이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선생님이 이렇게 가르치고 또 제가 따라가는 것은 선생님이 갖고 있는 그 전통의 한 가락이라도 그냥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이죠. 다른 마음 아무 것도 없어요.”

-그래도 이왕 하는 거라면 뭔가 목표를 갖고 하는 게 좋을 텐데.

“얼마 전에 심하게 아프고 나서 느낀 게 ‘이런 짐을 지워줘서 감사하다’는 거였어요.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 그런데 지금은 가곡할래 국밥할래 물으면 당연히 국밥을 해야죠. 내가 이걸 안 하면 내 자식, 내 부모님 다 굶어죽어야 하는데…. 선생님도 어쩌면 그걸 아시니까 빨리 무대에 서라는 짐을 안 지우시는 것 같아요. 그래도 선생님이 이수 받으라고 하시면 시키는 대로 해야죠. 언젠가는 그런 일이 있으면 먼저 편집국장님에게 연락드려야죠. 이렇게 선생님과 저를 맺어주셨는데 평생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2011년 5월 처음 여기 인터뷰하러 왔을 때 “가게가 커지면 1층에는 식당, 2층에는 미용실, 3층에는 불쌍한 아이들 데려와서 공부시키고, 일도 함께 하고 월급도 주고…. 이제 기초공사를 했으니 나중에 그런 날이 오지 않겠어요?”라고 했잖아요. 지금도 그 꿈은 여전한가요?

“그렇죠. 그래서 국밥집도 크게 키우고 싶어요. 그런데 가곡전수관도 겉만 보니 화려해보였는데, 내부에 가보니까 진짜 후원하는 사람도 적고 들어주는 이도 적고 호호국수와 비슷한 처지더라고요. 똑같아요. 그러나 그 안에 진실성이, 진정성이 있어요.”

‘생활의 달인’ 나갔더라면 가곡은 못했을 것

-2년 전 그때 SBS ‘생활의 달인’에 나갔더라면 호호국수도 청주의 김 구이 아줌마처럼 크게 성공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때 출연 거절했던 게 후회되진 않나요?

“내가 그때 생활의 달인에 나갔으면 호호국밥만 했을 거고 가곡은 아마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내가 편집국장님 만나면서 조순자 선생님과 만날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 그게 그대로 됐잖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선생님도 현재 어렵지만 저 같은 제자 키워놓으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잖습니까? 도민일보에도 그 때 되면 은혜를 갚을 수 있겠죠.”

-다시 한 번 물어볼게요. 그 때 왜 거절했나요?

“사실 이번에 라디오 함께 출연한 그 아주머니는 생활의 달인 출연을 계기로 성공한 분이죠. 명함을 받았는데 생활의 달인 출연 경력도 적혀 있데요. 저도 그 때 출연했더라면 달라졌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분은 장사한지 14년이나 됐고, 저는 이제 2년밖에 안 됐잖아요. 그리고 그때는 국밥 레시피도 완성되지 않았고, 대량으로 뽑아낼 수도 없는 상황에서 덜컥 출연할 수는 없었어요. 물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사람(박향희 씨) 성공했다 하겠지만, 나는 내 가정도 지키고 있고, 시댁도 지키고 있고, 우리 아버지도 지키고 있고, 가곡전수관도 지키고 있잖아요. 돈으로만 따질 수 없는 거죠. 그땐 도민일보만 해도 과분했어요. 도민일보와 가곡전수관, 그리고 호호국수는 같은 색깔이라고 생각해요. 사상과 이념은 모르겠지만, 공통점을 갖고 있죠. 이렇게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손을 잡았을 때 큰 나무도 무너뜨리는 힘이 될 수도 있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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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일호 기자
-그 힘을 가지고 뭘 하려는 건가요?

“큰 나무그늘 아래에 있는 김 굽는 아주머니보다 여기서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국밥집이 아주 커져서 연간 몇 억을 올릴 수도 있겠죠. 사실은요. 이번에 SBS 갔다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새로운 목적이 생겼어요. 그냥 밥 먹고 살면 되지가 아니고, 이제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확실한 목적. 선생님께도 후원을 더 많이 해야겠고, 도민일보 같은 지역 신문에도 후원을 해야겠고, 그런 목적이 생겼죠. 치킨집을 함께 해보니 몇 년 안에 뭔가 할 수 있겠다는 자신도 생겼어요. 해야 할 일이 더 생긴 거죠.”

-국밥집을 크게 하시려고요?

“그렇죠. 여긴 받아서 할 수 있는 사람한테 맡겨놓고…. 사실 제가 신용도는 좋아서 은행에서 돈을 잘 빌려주더라고요. 그래서 땅도 사뒀어요. 희한한 게, 얼마 전 새벽에 꿈을 꿨는데 귀인이 나타나 구체적으로 위치를 가르쳐주며 거기에 땅을 사라고 하데요? 그런데 잠이 깨어 그날 아침 도민일보를 봤는데, 꿈에서 본 바로 그곳에 대한 기사가 나온 거예요. 신기하잖아요. 다음날 바로 가서 계약을 했죠.”

2년 만에 만난 송미영 씨는 여전히 씩씩했고 후회도 없었다. 그는 지난 8월 한국기자협회 창립 49주년 특집 기사 인터뷰에서 이런 코멘트를 남겼다.

“큰 언론보다 조그마해도 우리 같은 작지만 꿈틀거리는 사람들의 말에 귀 담아 들어줄 수 있는 언론이 있다는 게 감사하다.”

나도 미영 씨 같은 독자가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 인터뷰를 마친 후 그동안 간다 간다 하면서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가곡전수관 ‘목요풍류’ 공연에 꼭 가봐야 겠다고 다짐했다. 전국에서 유일한 전수관이 있는 창원에 살면서 가곡에 대해 이렇게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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