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9) 함양

신라부터 조선까지 줄을 잇는 선비·학자

함양 관련 역사 인물 가운데 가장 앞에는 신라 말기 '슈퍼스타' 고운 최치원이 놓인다. 최치원은 진성여왕 시절 함양(당시 천령天嶺)군 태수로 있으며 수해를 막기 위해 고을 한가운데로 흐르던 뇌계(지금 위천) 물길을 바깥으로 돌리는 제방을 쌓고 거기에 갖은 나무를 심었다. 원래는 대관림(大館林)이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며 가운데가 사라지고 상림(上林)과 하림(下林)으로 나뉘었다가 지금은 상림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숲인 함양 상림은 1962년 일찌감치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는데, 여기 인물공원에는 최치원 흉상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다섯 사람 흉상이 둘씩 마주보고 있다. 덕곡 조승숙·점필재 김종직·일로 당양관·뇌계 유호인·일두 정여창·옥계 노진·개암 강익·연암 박지원·진암 이병헌·의재 문태서가 그들이다. 다들 양반 출신 선비로 절반은 '지역구' 인물이라 하겠고 나머지는 역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도 알만한 '전국구' 인물인데, 이렇게 많은 경우가 다른 시·군에서는 드물다 하겠다.

김종직(1431~1492)은 사림 영남학파 종조로 일컬어지고 유호인(1445~1494)은 조선 초기 3대 문장가로 꼽힌다. 김종직 제자 정여창(1450~1504)은 조선 유학을 대표하는 오현(五賢)의 앞자리를 차지하며 박지원(1737~1805)은 <열하일기> 하나만으로도 당대와 지금에 걸쳐 두루 문명(文名)이 높다. 마지막으로 의병장 문태서(1880~1913)는 1905년 을사늑약에 일어나 덕유산을 중심으로 영남·호남·충청 일대에서 활동하다 1911년 일제에 붙잡혔다.

상림 역사인물공원 연암 박지원 흉상.

이들 가운데 김종직은 함양군수를 지냈고 정여창과 박지원은 함양 바로 옆 안의현감을 지냈다.(일제 강점기 1914년 안의군이 없어지면서 서상·서하·안의면은 함양군으로, 마리·북상·위천면은 거창으로 붙여졌다.) 김종직은 교육에 크게 힘써서 정여창·김굉필을 비롯한 많은 제자가 생기고 모였으며 이로써 '좌안동 우함양'(으뜸 선비 고을이 경상좌도서는 안동이고 우도서는 함양이라는 뜻)이 비롯됐다 하겠다.

함양 선비 문화 관련 역사유물들

학자·선비들과 관련된 함양 문화유산에서 가장 많이 꼽히기는 학사루다. 최치원이 오르내리던 누각이라 그이에게 신라 헌강왕이 내린 벼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에서 이름을 땄다. 함양군수 시절 김종직은 여기 걸린 당시 경상도관찰사 유자광의 시를 떼어내 불태워버린 적이 있다. 이는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올린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둘러싸고 생겨난 무오사화(1498년)의 씨앗이 됐고 이 때문에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으며 정여창은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 갔다가 거기서 죽었다.

김종직은 유자광이 남이 장군을 모함한 간신배였는데다 종에게서 태어났기에 자기보다 관직이 높은데도 학사루에 시문을 걸 자격이 없다고 본 셈이다. 당대에는 이런 행동이 학행을 일치시키는 전범이었겠으나 지금도 그렇게 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크고 의젓한 자태는 옛날 그대로이고 건너편 함양초교 500년 남짓 묵은 학사루 느티나무 또한 매우 크고 기상이 씩씩하다.

정여창은 안의현감으로 있으면서 앞서 1412년 세워진 선화루(宣化樓)를 고쳐 짓고 이름을 광풍루(光風樓)로 바꿨다. 조선 유학자라 하면 고루하게 여겨지기 쉽지만, 그이가 고쳐 지은 '햇살이 따뜻하고 풍경이 시원하다'는 광풍이 '풍속 교화를 베푼다'는 '선화'보다 덜 권위주의적이고 더 부드러워 훨씬 멋스럽다. 비단내(錦川)를 끼고 들어앉았는데, 지금은 제방과 도로와 건물 따위로 많이 가로막혔지만 정여창이나 박지원이 수령일 때는 그렇지 않았겠다.

1792~1796년 안의현감을 지낸 박지원은 곡식 빻는 노고를 줄이는 물레방아, 쭉정이 따위를 날려 없애는 풍구 등을 만들고 굶주린 이들을 먹였으며 제방을 쌓아 해마다 드는 물난리도 막았다. 옛적 동헌 자리인 안의초교에는 1986년 새긴 '연암박지원선생사적비'가 있다.

비단내를 거슬러 오르면 으뜸 탁족처 화림동 골짜기가 나온다. 여덟 못과 여덟 정자(팔담팔정)가 있었다지만 지금은 거연·군자·동호 세 정자만 남았고 2003년 불타버린 농월정은 가장 아래 있었다. 일두 정여창 노닐던 자리에 1802년 들어선 군자정은 화림동 다른 정자들과 마찬가지로 둘레 자연풍광과 잘 어울리고 바라보이는 풍경도 멋지다. 동호정과 농월정은 물도 좋지만 바로 앞 너럭바위 차일암(遮日岩)과 월연암(月淵岩)이 더욱 그럴듯하다.

정여창 고택과 무덤, 남계서원

남계서원도 빠뜨리면 안 되는 문화유산이다. 정여창을 주로 모시는데, 개암 강익(1523~1567)이 1552년 사림을 모으고 군수 지원을 받아 짓기 시작해 10년 세월을 거쳐 완공했다. 1542년 건립된 경북 영주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 오래된 서원이다. 함양 선비 문화의 기둥뿌리라 할만한데 관이 주도한 소수서원과 달리 민이 앞장서서 건립을 이끌었다는 점도 돋보인다.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 풍영루를 들어서면 남계서원·명성당·거경재 같은 현판이 걸린 강학공간이 바로보인다. 학생들 기숙사로 쓰던 동쪽 양정재(養正齋)와 서쪽 보인재(輔仁齋), 마루가 훤한 애련헌(愛蓮軒)·영매헌(詠梅軒)이 양쪽에 있다. 여기 연못이 더해지니 누마루에서는 과연 연꽃을 사랑(愛蓮)하고 매화를 시로 읊기(詠梅)에 딱 알맞겠다. 구조는 단순하고 꾸밈은 소박하며 규모가 작지 않으나 나름 짜임새를 잘 갖췄고 잘 자란 나무들과도 어울려 아늑하다. 옆에는 김일손을 모시는 청계서원이 있는데 남계서원보다 작지만 분위기는 처지지 않는다.

남계서원에서 3km 안쪽에 정여창 고택과 정여창 무덤 둘 다 있다. 정여창 고택은 뜨락에 심긴 잣나무가 아주 빼어나고 건물도 기품이 있으며 기세 또한 매우 좋다. 정여창 사후 1570년대에 새로 지었다는데 3000평으로 아주 너르지만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그런 느낌은 덜한 편이다.

정여창 무덤은 승안산 기슭 승안사터 옆 언덕배기에 있다. 삼층석탑과 석조여래상을 잠깐 보고 지나쳐 올라가면 직사각형으로 둘러싼 다듬은 돌 위에 봉분을 올린 무덤이 있다. 아내 무덤이 나란히 있지 않고 위에 있어서 색다르다. 1689년 신도비가 세워졌는데 동계 정온은 비문에서 "1504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니 … 상여를 모시고 돌아와 승안동(昇安洞) … 언덕에 안장했다"고 밝혔다.

허삼둘 가옥은 조선 말기 여권 신장의 상징?

화림동에서 흘러내린 물은 정여창·박지원이 다스리던 안의현 광풍루 앞으로 이어진다. 광풍루 옆에는 아주 독특한 옛집이 하나 있다. 농월정과 마찬가지로 안채가 불타는 난리를 2004년 겪었는데 지금은 복원이 거의 마무리됐다. 1918년 갑부 집안 여자 허삼둘이 남편과 함께 지은 기와집이라는데 이런 크기는 옛집에 흔하지만 이런 구조는 우리나라에 하나뿐이지 싶다.

허삼둘가옥 안채 가운데 부엌 들머리.

안채로 드나드는 대문이 사랑채로 이어지는 대문과 별도로 마련돼 있고 ㄱ자 모양인 안채도 독특하다. 꺾이는 모서리에 부엌을 두고 앞쪽은 물론 장독대 따위가 있는 뒤로도 문을 내어 편리함을 더했다. 또 부엌에서 내다보면 안채 대문과 안마당은 물론 사랑채쪽 인기척까지 곧바로 알아챌 수 있다. 부엌이 전체를 장악한 형상이어서 집안 실권을 안주인이 쥐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허삼둘 가옥 부엌 내부 모습. 부엌에서 내다보면 안채 대문과 안마당은 물론 사랑채쪽 인기척까지 곧바로 알아챌 수 있다.

상림 인물 공원에는 흉상 말고 선정비도 여럿 있다. 전라도 고부군수 시절 만석보 물세를 가혹하게 걷는 등 학정을 저질러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터지도록 만든 조병갑을 기리는 청덕선정비(1887년)도 있다. 함양군수로 있으면서 유랑민도 어루만지고 조세도 줄여줬으며 자기 봉급까지 깎아 관청을 고쳤다 등등이 적혀 있는데 읽다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열녀학생임술증처밀양박씨지려(烈女學生林述曾妻密陽朴氏之閭)도 있다. 안의현 아전 집안 출신으로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조부모 아래 자란 박씨는 열아홉 되던 해 이웃 함양군 아전 집안 임술증의 아내가 됐다. 어려서부터 몸이 여위고 약했던 남편은 혼인한 지 반년이 못돼 세상을 떠났다. 박씨는 남편 초상을 예법대로 하고 며느리 노릇도 제대로 하다가 3년이 지나 탈상을 하는 날 약을 먹고 죽었다. 참담하기는 하지만, 어느 고을에나 몇몇은 있는 이 열녀비가 박지원을 만나면서 운명이 달라졌다.

열녀학생임술증처함양박씨지려.

박씨는 안의현감 박지원이 부리던 심부름꾼 박상효의 조카딸이었다. 박지원은 '열녀함양박씨전'이라는 한문소설에서 "지아비가 죽은 날과 같은 날 같은 때에 마침내 (이 몸이 없어져야 하겠다는) 처음의 뜻을 이룩했으니 그가 어찌 열부(烈婦)가 아니겠는가?"라고 칭송하면서도 그 가혹함을 함께 짚었다.

'개가한 여자의 자손에게는 벼슬을 주지 말라는 법이 있으나 이는 양반에게만 해당될 뿐이다. 그런데도 조선 400년 이래 과부된 여자 대부분이 절개를 지키게 됐다. 그래서 개가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절개라 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퍼졌다. 이제 남편을 따라 저승길 걷기를 바라고 물불에 몸을 던지거나 독을 탄 술을 마신다거나 끈으로 목을 졸라매면서 그를 마치 극락으로 가는 것처럼 여기게 됐다.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모질어서 어찌 너무 지나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박지원은 더불어 "혈기는 때를 따라 왕성한 법인데 어찌 과부라 해서 정욕이 없겠느냐"고 적어 개가 금지가 세상 이치에 맞지 않음을 내비치기까지 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남편이 세상을 떠났어도 목숨을 버리는 일은 맞지 않으며 개가 금지 또한 양반 말고 평민까지 따를 까닭이 없다는 생각을 뚜렷하게 내비치고 있다.

불교 문화 유산과 서암정사 미래 문화재

1520년 창건했다는 벽송사는 지리산 칠선계곡 들머리에 있다. 풍경이 멋지고 터잡은 자리의 푸근함도 상당하다. 여기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양식으로 만든 조선 초기 작품이라는 점과 법당 앞이 아니라 뒤편 언덕에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한가운데에 대웅전이나 비로자나전 같은 법당 대신 벽송선원(禪院)이 있는 것도 여느 절간과 크게 다르다.

가장 높은 자리에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원통전이 있지만 중심 전각이라 하기는 어렵다. 한국전쟁 때 불에 타는 바람에 새로 지은 건물들이다. 2층짜리 간월루(看月樓)도 마찬가지인데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기 좋다는 간월루도 되겠고 손가락 말고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쳐다보라는 간월루도 되겠다.

나무 장승 한 쌍도 퍽 유명하다. 판소리 가루지기타령에서 옹녀와 함께 함양 등구 마천에 자리잡은 변강쇠가 바로 이런 장승에다 도끼질을 해대지 않았을까. 뒤편 소나무 두 그루도 꽤 이름이 높다. 미인송은 바로 서 있고 도인송은 미인송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도인이라면 곧고 반듯해야 할 텐데 왜 저 모양일까. 오히려 미인이 세상 흐름에 휘둘리기 쉬울 텐데 어째서 곧을까.

미인송(왼쪽)과 도인송. 도인송이 미인송 쪽으로 기울었다.

바로 옆 서암정사는 현대가 만들어낸 미래 문화재라 할만하다. 낱낱이 이름을 밝힐 필요는 없지만, 바위를 갈고 쪼아 불상과 글씨와 그림을 새기고 굴법당도 만들었다. 금(金)을 먹으로 삼아 화엄경을 옮겨쓰는 금니사경(金泥寫經)을 하고 전시도 하고 있다. 100년 또는 200년 뒤 사람들은 이 건물과 물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 특징을 무엇으로 짚어낼까.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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