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과 톡톡]'이선구의 팥트라슈'이선구 대표

청년은 가족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도시로 나와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해야만 했다. 논 한 마지기 농사와 소작을 하던 부모님은 겨울만 되면 끼니 걱정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석 달 동안만 일하겠다고 문을 두드렸던 빵집, 그 문은 운명의 문이었고 33년이 지난 지금도 청년은 빵을 만들고 있다.

50대 중년이 된 청년, 예전과 달라졌다면 직원이 아니라 어엿한 빵집을 두 개나 경영하는 사장이라는 점이다. 또 동네빵집이긴 하지만 그에게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과 자부심이 있다. 나아가 그는 동네빵집이 함께 살아가는 길을 고민하고 있다.

창원시 진해구 웅동2동 '이선구의 팥트라슈' 대표 이선구(51) 씨. 동네 빵집 사장인 그가 대통령 표창을 받으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대통령상 수상 = '이선구의 팥트라슈'라는 이름을 들으면 동화 속 개가 연상된다. 하지만 빵집 이름으로 걸려있다면 팥과 슈크림을 특화해 빵을 만드는 가게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또 여기에는 자신이 만든 제품에 대한 자부심도 살며시 배어 나온다.

이름만큼이나 친근한 이 빵집은 이 동네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소중한 곳으로 자리 잡았다.

이 빵집을 운영하고 있는 이선구 대표는 지난 7월 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중소기업인대회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 대표의 공적은 소상공인 경영 효율화를 통한 창조경제 모범유공이다. 스스로 동네빵집으로서 살아남고자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과감한 경영 효율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표창을 받고 있는 이선구 대표.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동네빵집이 위기에 놓인 상황을 자신만의 일로 생각하지 않았고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고자 앞장서서 동네빵집 살리기 협상대표로도 활동해왔다. 그는 이번 포상을 지금까지 결과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로 받아들였다. 이 대표는 "이제 고작 내 앞가림하는 정도다. 앞으로 동네 빵집이 함께 대응하고 스스로 변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더 노력하라는 응원으로 생각한다"고 겸손해 했다.

◇동네빵집 살리기 전력 = 웅동2동에서 빵집을 시작한 것은 2001년이다. 그에게도 높은 인지도와 자금력을 앞세운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의 공세는 큰 풍랑과 같았다. 하지만 피하지 않았다. 스스로 좋은 제품을 만들고 소비자에게 인증받는다면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 생산비용을 절감하는 것도 동시에 추진해야 할 과제였다.

보통 동네 빵집들은 대략 100종류의 빵을 만든다. 비용과 인건비는 많이 들지만 제때 팔리지 못한 제품은 신선도가 떨어져 손님 선택을 받지 못해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원인이기도 하다.

창원시 진해구 웅동 2동 '이선구의 팥트라슈' 이선구 대표가 빵을 굽고 있다. /유은상 기자

이 대표는 이 부분부터 과감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110종류의 빵을 40가지로 줄였다.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데이터를 기초로 한 결단이었다. 그는 그동안 어떤 빵이 어떤 시기에 얼마나 팔리는지를 꼼꼼히 체크해 자료로 만들었고, 이를 기반으로 빵의 종류를 줄였다. 대신 계절에 따라 잘 팔리는 종류와 그 수량을 달리해 내놓았다.

맛과 품질 개선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빵은 소화가 잘 안 되고 살이 잘 찌는 음식이라는 인식을 벗고자 100% 국산 팥과 국산 밀 등 국산 재료를 사용해 생산하고 있다. 맛의 핵심 노하우인 팥소는 특별히 더 신경을 쓴다. 12∼24시간 불린 팥을 물을 네 번 갈아주면서 끓여 만든다. 또 발효과정에서 이스트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씨앗, 열매 등으로 만든 천연 발효종을 사용한다.

빵의 종류를 줄이면서 생긴 여력으로 하루에 한 번 굽던 빵을 3∼4회 굽는 시스템으로 전환했다. 재료와 맛은 기본이고 항상 반나절이 지나지 않은 갓구운 빵을 내놓으면서 손님 반응은 달라졌다.

그는 "맛과 품질 하나는 자신 있다.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까닭에 값은 좀 비싸지만 손님들은 더 좋아한다"며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동네 빵집이니까 가능했다"고 말했다. 동네 빵집의 단점을 오히려 강점으로 활용한 것이다.

빵이 맛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매출이 1년 만에 30∼40% 상승했다. 그 덕에 지금은 같은 동네에, 불과 직선거리 300∼400m 거리를 두고 두 개의 빵집을 운영하고 있다.

이 대표의 노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만이 아니라 동료도 함께 살 수 있도록 하고자 팔을 걷고 나섰다.

그는 그동안 진해제과협회장, 경남제과협회장 등을 맡았으며 지금은 대한제과협회 부회장과 경남소상공인포럼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자신이 중요 직책을 맡은 동안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의 진출로 동네빵집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동료 사장들이 폐업을 하거나 프랜차이즈 빵집으로 '귀화'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는 중앙회 차원에서 대기업 진출을 막고자 중소기업중앙회, 소상공인연합회와 연대한 동네빵집 협상 대표로도 활동했다. 험난한 길이었다. 수없이 많은 협상과 집회, 기자회견을 이어가면서 결국 지금의 대기업 빵집 거리제한, 인테리어 비용 규제 등 여러 가지 작지만 소중한 결과를 이끌어냈다.

또 빵의 소비를 촉진하고자 '한 끼 식사 빵으로'라는 캠페인과 동네빵집의 기를 살리고자 '프로 제빵 왕 선발대회' 등을 제안해 행사진행을 돕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후회가 많다. 그는 동네빵집이 살아남으려면 우선 제빵인이 변해야 하고 소비자의 인식도 함께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위기가 기회일 수 있다. 맛있는 빵을 만드는 것이 먼저고 불필요한 경영요소를 과감하게 개선해 나가면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다"며 "지금 동네에 살아남은 빵집은 충분히 맛을 인증받은 곳이다. 가능하면 프랜차이즈보다 동네빵집을 애용해 달라"고 당부했다.

빵을 진열하고 있는 이선구 대표.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 성공은 행운처럼 그냥 찾아오거나 얻어지지 않았다. 지겨운 가난과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낸 결과였다. 옛일을 반추하면서 그는 몇 차례 눈물을 훔쳤다.

이선구 대표는 충남 공주에서 가난한 농부의 5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가난 탓에 고등학교 2학년 중퇴를 하고 농사일을 도와야만 했다. 농사가 없는 겨울철 동안 돈을 벌고자 19살이던 그해 형님이 있는 마산으로 내려왔다. 아르바이트 자리로 찾은 곳이 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 고려당이었다. 운명이었다.

물을 받고 반죽하고 물건 나르는 허드렛일을 새벽 2시까지 해야 했고 새벽 5시면 일어나 다시 일하는 힘겨운 일상이 반복됐지만 피하지 않았다. 당시 월급 5만 원을 받아 한 푼도 쓰지 않고 부모님에게 보내드리며 알뜰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 몇 해 지나지 않아 고향의 부모님도 마산으로 모셔왔다. 그러나 전혀 힘들지 않았다. 부모님이 기뻐하시고 일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7년 동안 확실하게 기술을 배웠고 그 뒤로는 곳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이후 그는 마산회원구 합성동 독일빵집, 성산구 중앙동 빠리포숑 등에서 일을 하다 결국 북마산에 한이제과를 개업한다. 결혼도 하고 딸까지 태어나 오랜 시간 바랐던 꿈이 실현되는 듯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고난이 다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시고 부모님 병간호하는 동안 본업을 소홀히 하면서 빵집 영업도 점점 어려워졌다. 그렇게 결국 빵집을 접어야 했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장사는 생각처럼 안 되고 참 힘들었어요. 새벽 4시부터 9시까지 빵을 만들고 낮에는 제빵학원 강사로 나가서 일하고 했어요."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빵집을 접으면서 깨달았죠. 빵은 정말 정성으로 만들어야 하고 손님은 귀신같이 맛을 알아차린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창원의 한 마트 지하에 빵집을 개업했고 이른바 대박이 났다. 2001년에는 지금의 자리로 빵집을 옮겨 13년째 꾸준히 고객을 늘려가고 있다. 또 동네빵집이 함께 살아가고자 공동브랜드를 만들어 대기업에 대응하는 방법을 꿈꾸고 있다.

"두 개의 빵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더 확장하면서 지역 빵집들과 논의해 공동브랜드로 만들고 또 기술과 경영기법 등을 공유하면서 대형 빵집에 대응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동네빵집이 휘둘리지 않고 떳떳하게 고객의 선택을 받을 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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