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9) 옛 진해와 새 진해

진해 이름의 주인은 삼진 지역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진북·진전면을 일러 '삼진(三鎭)' 지역이라고들 한다. 진동은 진해 동쪽을 뜻하고 진북은 진해 북쪽을 이른다. 진전(鎭田)은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 때 창원부 진서(鎭西)면과 진주군 양전(良田)면이 합해지면서 생긴 지명인데, 여기서 진서는 당연히 진해 서쪽이 되겠다. 그런데 지금 진해(창원시 진해구)는 이들 삼진 지역에서 볼 때 마산만 바다 건너 동쪽에 있다. 진동·진북·진서라 이를 근거가 없는 것이다. 지역 사정을 잘 모르는 이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어 그렇네!" 하면서 어리둥절해하지만 좀 아는 사람은 "지금 진해가 원래부터 진해였던 것이 아니잖아"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 지금 진해가 처음부터 진해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진해였던 원래 진해는 바로 삼진 지역 일대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삼진 지역 사람들은 알지만 같은 창원시라 해도 옛 창원이나 마산 또는 진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가 모르고 있다. 삼진 지역을 진해라 일러온 역사는 꽤 오래됐다. 고려 시대인 1018년(현종 9) 진주 속현 우산(牛山)현으로 처음 이름을 올린 이래 1390년 독립된 행정구역이 됐으며 조선 태종 시절(1413년) 진해라는 이름을 얻었다. 진해현은 1896년 진해군으로 바뀐 끝에 1908년 창원부에 합병되면서 사라졌다. 진동·진북·진서면은 당시 진해군 동·북·서면이었다.

진해현 관아·진해향교가 진동에 있는 까닭

이를 일러주는 유적이 바로 1832년 세워진 진해현 관아다. 동헌과 형방소·마방·사령청이 지금 진동면사무소를 둘러싸고 있다. 화류헌(化流軒)이라는 고유명사는 잃어버린 채 동헌(東軒)이라는 일반명사가 적힌 현판을 달고 있는데 옛적 고을 수령이 시정을 살핀 자리다. 맞은편 경로당으로 쓰이는 건물은 형방소(刑房所)였다는데 요즘으로 치면 유치장이며 뒤로 이어지는 허름한 나무 건물은 요즘 주차장이라 할 수 있는 마방이다. 사령청(使令廳)은 일곱 칸 크기 동헌보다 두 칸이 작고 진동면사무소 왼편에 있는데, 옛날 허드렛일을 하던 심부름꾼(사령)들이 모여 있던 장소다. 신분이 낮은 이가 머무는 공간이라 그런지 동헌에는 있는 우물마루와 겹서까래가 사령청에는 있지 않다. 다만 사령청 뒤 250살은 먹었음직한 팽나무는 아주 그럴듯해서 동헌 앞 오동나무를 오히려 압도하고 있다.

마산향교로 명칭이 바뀐 진해향교 내삼문과 대성전.

동헌 드나드는 문 앞에는 선정비들이 무리지어 있고, 건너편 삼진중학교에는 객사(우산관牛山館) 자리가 주춧돌로만 남아 있다. 객사는 임금 궐패를 모시고 또 임금을 대신해 오는 벼슬아치들이 묵는 자리였던지라 동헌보다 훨씬 커서 정면이 열한 칸이었다. 그런데 1983년 5월 2일 불에 홀랑 타버렸고 아직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진해향교도 있다. 진해현 관아에서 북동쪽, 직선거리로 1km 남짓 떨어져 있다. 조선 시대 들어 우산현이 진해현으로 이름을 바꾼 이듬해(1414년) 들어섰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탔다가 영조 때 새로 만들었으나 일제강점기 다시 철거됐다. 이처럼 일본 관련으로 두 차례나 사라졌던 진해향교는 1990년 복원돼 1995년 마산향교로 이름을 바꿨다. 마산향교는 오래된 나무가 많아서인지 그윽한 느낌이 가득하다. 마산향교는 또 명색만 남은 다른 대부분 향교들과는 달리 지금도 선비대학을 여는 등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홍살문과 외삼문과 명륜당(강학공간)과 대성전(제사공간)이 앞뒤로 길게 늘어서 있는데, 일제강점기 철거당할 때 공자 등 여러 선현들 위패를 묻은 자리를 알리는 빗돌이 들머리에 서 있는 점도 색다르다.

팔의사 창의탑과 기미년 삼진의거

이렇듯 1900년대 초반만 해도 이웃 마산 지역은 창원부(당시 중심지는 지금 소답동 일대)의 변두리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으나 지금 삼진 지역인 옛 진해는 행정상 독립돼 있었을 뿐 아니라 갖춘 역량도 작지 않았다. 이는 1919년 삼일운동 당시 3월 28일과 4월 3일 두 차례 일어난 삼진의거로 나타나기도 했다. 합천 삼가의거와 함안 군북의거에 이어 경남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큰 시위였는데 이때 순국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1963년 10월 팔의사 창의탑을 고현마을 들머리에 세웠다. 그러나 2013년 옛 탑은 철거돼 없어지고 그 자리에 새 탑이 들어섰다. 이로써 지역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정성을 모았다는 상징성과 역사성도 한꺼번에 사라졌다.

해군기지에 어울리는 이름, 진해

진해는 바다(海)를 누른다(鎭)는 뜻이다. 참으로 해군에 어울리는 이름이라 하겠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1905년 세계 최강이던 러시아 발틱함대에까지 치명상을 입히고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같은 해 5월 27일 일본 함대 주력이 진해만 가덕(가덕도가 지금은 부산 땅이지만 전에는 진해 땅이었다) 수로에서 발진했다고 돼 있는데 말하자면 이때도 지금 진해를 일제가 군항으로 썼던 것이다.

하지만 본격 경영은 1906년에 시작된다. 조선을 사실상 장악한 일제는 1906년 8월 진해만 일대를 군항 예정지로 고시한 데 이어 경계 지정과 토지 수용 같은 준비 작업을 거친 다음 1909년 6월 군항 건설에 들어갔다. 일대는 원래 웅천군 소속이었으나 1908년 웅천군이 폐지됨과 동시에 지금 삼진 지역에서 이리로 '진해'가 옮겨와 창원부 진해면이 된다.

진해만은 단순히 지금 진해의 앞바다만 일컫지는 않는다. 동쪽 웅천만에서 마산만·율구만·명주만을 거쳐 서쪽 거제 옥포만·하청만까지 포괄한다. 1910년 경술국치를 강요한 일제는 거제 장목면 송진포에 있던 해군 진해방비대를 1912년 여기로 옮겨왔고 이태 뒤 11월에는 진해만 요새사령부가 마산에서 옮겨왔으며 다시 이태 뒤 4월 진해요항부(鎭海要港府)가 설치됐다.

일본 해군의 빛나는 전승지 새 진해

새 진해는 일본 해군의 빛나는 전승지였다. 1926년 진해선 철도를 개통해 내륙까지 연결한 일제는 1927년 제황산 꼭대기에 높이 34.85m 러일전쟁전승기념탑을 세웠다. 높이는 90m밖에 안 되지만 전승한 바다와 시가지가 눈에 내려다보이는 제황산이다. 해방 이후 헐어냈으며 대신 1967년 군함 마스트(돛대) 모양으로 세운 높이 28m 진해탑이 박물관(2층)과 전망대(9층) 따위를 품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진해우체국.

제황산 바로 앞에 중원로터리가 있다. 일제가 1912년부터 가운데를 둥글게 두고 여덟 갈래로 길을 낸 산물이다. 근대와 현대 문화유산이 둘레 곳곳에 박혀 있다. 1912년 준공돼 2000년까지 제 구실을 한 진해우체국 사다리꼴 목조건물도 있고 지역화가 유택렬(1924~99)이 1955년부터 운영한 '흑백다방'도 있다. 지금은 다방 영업을 접고 이름도 '문화공간 흑백'으로 바꿨는데 어려운 시절 이중섭·윤이상·조두남·유치환·김춘수·전혁림 같은 지역 문예인들에게 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했다. 일제강점기 초소로 쓰인 팔각정도 있는데 한때 요정이 들어섰다가 지금은 '새 수양회관' 간판을 단 밥집이 돼 있는데 이름만 팔각정이지 실제는 육각정이다. 건너편 중국집 元海樓(원해루)는 한국전쟁 중공군 반공포로였던 장철현 씨가 1956년 榮海樓(영해루)로 장사를 시작(지금 주인은 화교 진금재 씨)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종종 찾았다.

일제강점기 초소로 쓰이던 팔각정. 지금은 새수양회관이라는 밥집이 들어서 있다.

진해에는 이 밖에도 방사상 도로가 두 군데 더 있다. 남원로터리는 진해탑에서 볼 때 중원로터리에서 9시 방향 330m 즈음이고 북원로터리는 1시30분 방향 510m 즈음이다. 중원로터리와 남원로터리 사이에는 1920~40년대 지은 단층 목조건물-적산가옥- 거리도 있고 1912년 지은 진해요항부 해군병원장 관사도 '仙鶴(선학)곰탕' 간판을 단 채로 있다. 들어가보면 옛날 물건이 많은데 정각이 되면 여전히 '댕댕' 울리는 괘종시계라든지 축음기·전화기 같은 것들이다. 옛것들 소중함을 알고 간직해 온 주인의 안목이 담겨 있다.

중원로터리에서 본 제황산과 진해탑.

이순신 전승지이기도 한 새 진해

남원로터리는 충무공과 백범이 350년 세월을 뛰어넘어 함께 어울리는 자리다. 1946년 진해를 찾은 백범이 남긴 친필 시비가 여기 있다. 이순신 장군 '진중음(陣中吟)'의 글귀 '誓海魚龍動 盟山艸木知(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가 적혀 있다. '바다에 맹세하니 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

북원로터리 이순신 장군 동상은 1952년 우리나라 처음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다른 이순신 동상이 대부분 한쪽 팔을 허리에 걸치고 있는데 반해 여기 이순신 장군은 그런 거만한 서슬이 가신 채 앞으로 두 손을 모아 장검을 짚고 있다. 광화문 이순신보다 훨씬 부드럽지만 그렇다고 풍채에서도 밀리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진해 일대는 일제만의 전승지는 아니다. 이순신 장군은 여기 일대에서 임진왜란 첫 해 합포해전(5월 7일)·안골포해전(7월 10일)과 이듬해 웅포해전(2~3월)을 치렀고 모두 이겼다.

진해에는 '10월유신기념탑도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 하나뿐일 텐데, 1973년 옛 육군대학 앞 삼거리(관문교차로)에 들어섰다가 1976년 지금 자리인 창원시아이세상장난감도서관(옛 진해도서관) 뜨락으로 옮겨왔다. 독재를 정당화했던 유신헌법을 군인·노동자·학생·시민이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중원·남원·북원로터리를 두고 많은 이들이 일제 침략의 상징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를 본떠 만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다고 일러주는 문서는 없고 다른 증거도 없다. 세계적으로 볼 때 당시에는 방사상 도로 구조가 가장 효과적인 교통망이라고 봤다는 데에서 원인을 찾아야 합당하다. 1853~70년 만들어진 프랑스 파리 신시가지도 개선문을 중심으로 열두 갈래 도로를 냈으며 1896년에는 대한제국 정부도 한양(=서울) 도시개조사업을 벌여 궁궐을 가운데 두고 방사상 구조로 바꾸려고 한 적이 있다.

▲ 1930년대 진해읍 중원로터리.

조선 시대 해방 요충지 웅천읍성과 제포진성

새 진해의 진해 이전 시기 중심은 웅천 일대(지금 웅천동)였다. 웅천읍성이 남아 있는데 이는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남산 제포진성과 그 너머 제포왜관을 함께 생각해야 제대로 재구성이 된다. 제포진성은 고려 시대 수군만호영이 있던 자리이고 조선 초기에는 경상우수영이 있었다. 그만큼 해양 방위에서 중요한 위치였던 셈인데 이는 새 진해 산마루에 우뚝 솟은 바위 천자봉과도 관련이 있다. 옛적 바다를 항해하는 처지에서는 이런 천자봉보다 더 뚜렷하고 좋은 표지는 없었다. 바다에 고기 잡으러 나간 이들은 천자봉을 지표 삼아 돌아오곤 했는데, 대마도에 거점을 둔 왜구에게도 같은 구실을 했다. 왜구는 고려 말기부터 엄청나게 들끓었는데 이들이 대마도에서 천자봉을 바라보고 곧장 오면 바로 웅천 앞바다 사도섬 일대에 닿았던 것이다.

이런 왜구 소탕을 위해 조선 세종은 이종무로 하여금 그 근거지 대마도를 정벌하게 했고 이어서 남해 일대를 정비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앞에 말한 웅천읍성을 1439년 쌓은 것이었다. 침략해대는 왜구의 근거지를 소탕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방비해봐야 헛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겠다. 그 뒤에는 웅천읍성 고개 넘어 바닷가(제포왜관)에 왜인들로 하여금 장사나 거주를 위해 머물도록 허용했는데 여기서 더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기능을 남산 고갯마루에 있는 제포진성이 했다. 하지만 1510년 삼포왜란과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적은 제포진성을 넘었고 웅천읍성까지 함락되고 만다. 지금도 성터가 남아 있는 제포진성을 오르면 왼쪽 산비탈 제포왜관 자리와 바로 지금은 많이 매립되고 만 앞바다가 함께 보인다. 남산 꼭대기에는 웅천왜성도 있다. 직각으로 쌓는 조선 석성과 달리 70도 정도로 기울어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남은 왜성 가운데 원형이 가장 제대로 남은 편에 든다.

전쟁의 바다와 평화의 바다

옛 진해와 새 진해는 앞바다가 이처럼 전쟁으로 얼룩져 있다. 가야시대 포상팔국의 난까지 갈 것도 없이 예로부터 왜구가 들끓었고 임진왜란 때 치열한 공방이 오갔으며 앞서 제포왜란도 있었다. 또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과 만주의 패권을 두고 다툰 러일전쟁의 현장이기도 했으며 지금은 대한민국 해군의 진해기지사령부 또한 같은 자리에 있다. 일제는 강점 당시 남해안 곳곳을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해 요새화하기도 했는데, 진해만을 비롯한 우리 남해안은 언제쯤 평화의 바다로 새로 날 수 있을까.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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