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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강 따라 굽이굽이 옛 삶의 흔적 흐르고

[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72) 통영별로 38회차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webmaster@idomin.com 2014년 08월 18일 월요일

산청을 나서다

오늘 걸음은 산청읍 소재지에서 옛 관아가 있던 산청군청과 객사가 있던 산청초교를 둘러보고 경호강변에 서서 옛사람들이 환아정에서 느꼈을 감회를 추상해보며 시작합니다. 3번 국도가 지나는 쌀고개를 넘지 않고 경호강가로 난 길을 따라 걷습니다.

옛 산음현의 옥(獄)이 있어 옥거리, 옥동 또는 옥산리라 불리는 곳에서 산청읍을 벗어나는 즈음의 강변 동쪽에는 꽃봉산(峯山: 235.8m)이라는 구릉이 있습니다. 지금은 정자가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오래된 산성이 있다고 나옵니다. 산음현 고적에 "고산성(古山城)이 현 남쪽 2리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가 1344척이었는데, 지금은 무너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옛길은 산성이 있는 구릉 기스락을 따라 열렸는데, 산청군하수종말처리장이 들어서면서 옛길 들머리를 막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내리교에서 도강하여 그 길을 바라보며 내리 한밭마을 앞으로 펼쳐진 활주사면의 자연제방을 따라 난 길을 걷습니다. 예전에 나루가 있었는지 바위에 □□진津이라 새겼고, 옆에 칠언절구와 이곳을 찾은 사람들 이름도 있습니다.

비리길 바위벼랑에 새겨져 있는 마애비.

처음 걸었을 때는 물가에 싸리꽃이 피어나 있었는데, 사진 보완을 위해 다시 찾았을 때는 레프팅을 즐기는 고무보트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안에서 공격사면에 열린 비리길을 바라보니 홍수 때 물이 휩쓴 경계를 따라 옛길의 자취가 아스라이 남아 있습니다. 1:5000 지형도를 살펴보니 지금도 그 길이 평소 수위보다 2~3m 높은 기스락을 따라 표시되어 있습니다.

비리길이 끝나는 즈음에 열린 대전∼통영 고속도로 북쪽 강기슭에는 바위벼랑이 곧은 비탈을 이뤘고, 대안에서 살피니 바위를 갈아 새긴 마애비가 있습니다. 보완 답사에서 보니 3기의 빗돌을 바위에 새겨두었는데, 모두 총탄 자국이 남아 치열했던 전쟁의 상흔을 전해줍니다. 가운데 높은 관찰사 정만석의 영세불망비로 신미양요가 일어난 1871년 새겼습니다. 나머지 2기는 관찰사 빗돌보다 아래쪽에 나란히 새겼는데, 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은 현감 조병길의 것이고, 왼쪽은 현감 이만시의 영세불망비입니다.

묵곡리를 지나다

묵곡리에 들면서부터는 지금까지 아슬아슬한 강가 기스락을 따르던 비리길이 활주사면을 만나 강변의 자연제방으로 평탄하게 열립니다. 으레 낙동강 같은 큰 강 지류에 발달한 활주사면은 오래 전부터 인간의 삶터였습니다. 지나온 화산리와 신연리가 그렇고, 대안의 내리 한밭마을과 이곳 묵곡리 또한 그렇습니다. 대전∼통영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청동기시대 취락과 옥을 가공하던 공방, 지석묘를 비롯해 삼국시대의 무덤이 발굴된 것이 증거입니다. 이로써 옛 사람들이 어떤 경로로 내륙까지 거주지를 확장해 갔는지 잘 알 수 있지요.

묵곡리에서 옛길은 다시 3번 국도와 만나 신안면 소재지까지 줄곧 동행합니다. <개항기 전후 경상도의 육상교통>에서는 통영별로를 묵곡리를 지난 정곡리 자신마을에서 경호강을 건너 대현을 넘어 단성면 운리의 단속사 방면으로 이르는 산길을 제시하였습니다. 지리산 둘레길과 겹치는 구간으로 아마 책 저자들은 청계리에 있는 점촌(店村)을 오조점으로 파악한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만, 그 점촌은 사기를 굽던 곳으로 확인됐습니다.

<대동지지>에 나오는 이즈음 통영별로 구간은 산청에서 오조점까지 20리, 거기서 단성까지 20리이므로 이 구간에서는 오조점의 위치를 제대로 헤아리는 것이 옛길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관건입니다.

경호강 변 자연제방을 따라 난 길을 걷는다.

오조점이 경호강가에 있다면 대체로 3번 국도와 비슷한 선형을 따랐겠지만, 단속사 방면으로 들게 되면 여러모로 문제가 됩니다. 이는 당시 역도를 따르지 않은 것이 되고, 조선시대에 지리산을 유산(遊山)한 탁영 김일손 등이 걸은 경로와도 맞지 않습니다. 결정적으로는 남사에서 곧장 소남나루로 내려가지 않고 일부러 단성으로 들어갔다가 나와야 할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조점(店)

<대동지지>의 통영별로 경로에 따르면 산청과 단성은 40리 거리이고, 그 중간에 오조점이 있습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역원에서 신안역이 현 북쪽 16리에 있다 했으니 오조점 위치는 역이 있던 신안리 신안마을에서 북쪽으로 4리 올라간 곳으로 헤아릴 수 있습니다. 지금의 외송리 즈음인데, 앞의 책 고적에는 현의 북쪽 25리에 송계부곡(松溪部曲)이 있었다고 전하며, 같은 책 역원에는 송계원(松溪院)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이 원집이 뒤에 술막이기도 한 점(店)으로 바뀐 듯한데, 그곳은 바깥솔기(외송) 남쪽에 있던 주막땀(주막이 있던 마을)으로 헤아려집니다.

아울러 오조점의 위치는 새고개라는 지명으로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새는 동쪽을 이르는 옛말이고, 한자로 풀 새 초(草), 새 조(鳥), 새 오(烏), 솔 송(松), 새 신(新), 쇠 금(金), 소 쇠 우(牛) 등을 취하는데 예전에 송계부곡과 송계원이 있어 지금 외송리가 된 것이고, 오조점은 새고개 아래에 있던 점이라 붙은 이름으로 여겨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유추하면 통영별로는 지금의 3번 국도와 비슷하게 경호강변을 따라 열렸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탁영 김일손이 스승 점필재 김종직의 행적을 좇아 두류산(頭流山)을 유산하고 남긴 <두류기행록>에 나오는 경로로도 살필 수 있습니다.

탁영은 사근역에서 산청-신안역-단성현-여사등촌(지금 남사리)을 거쳐 단속사에 이릅니다. 당시 교통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고, 이는 <대동지지>에 나오는 통영별로의 경로와도 일치합니다. <두류기행록>에는 사근역을 출발해 남쪽으로 내려가 정오에 산음현에 이르러 환아정에 올라 기문을 열람하고 단성에 이르렀다 했습니다. 그날 마지막은 신안역 10리 지점에서 배로 나루를 건너 단성에 들어가 투숙했다 나오고, 다음날 여정은 서쪽으로 15리를 들어가 북쪽 단속사로 향했습니다. 우리도 이 유산 경로를 따라 서둘러 걷겠습니다.

신안역(新安驛)

신안리 신안 마을이 옛 신안역 자리입니다. 이곳에는 신안역, 신안역-터, 구역, 역말, 마위전인 대사마래, 여물사래 같은 지명이 밀집되어 있어 역의 위치를 헤아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딧들 서쪽에 원집이 있었다는 원멀릿들이란 지명도 방증자료로 활용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단성현 고적에 신안역은 현 북쪽 16리에 있고, 그 동쪽에 신안원이 있다는 기록과도 부합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배로 건넌 곳은 경호강을 오가는 신안진이었을 것입니다. <승람> 산천에 '신안진이 동쪽 5리에 있다. 산음현 우탄 하류인데 진주 소남진을 지나 남강이 된다'고 나오는 그 나루랍니다. 그 즈음에는 강가에 신안루가 있었습니다. 같은 책 누정에 '신안루의 딴 이름은 강루다. 현 동쪽 5리에 있으며, 동쪽 돌벼랑에 달려 있는 듯하다. 매년 여름 장마 때 위태하면 돌이 가끔 강에 떨어진다. 옛날 강성군(진주의 옛 이름) 시절 때 태수가 밤에 객과 기생과 함께 배를 타고 물을 거슬러 돌며 술을 마시는 중에 돌이 떨어져 사람들이 모두 빠졌고, 고을 인(印)도 잃었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어느 시절이나 이렇게 정신 못 차리는 공직자 때문에 사회 기강이 흐트러집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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