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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와 나무, 그리고 엇갈리는 기억

[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8) 의령군

김훤주 기자 pole@idomin.com 2014년 08월 13일 수요일

사라져가는 백산~성산 낙동강 갯길

의령 남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른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남강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낙동강은 지정면 성산 마을에서 합쳐진다. 남류하는 낙동강과 동류하는 남강이 만나므로 그 물살은 남동으로 흘러 건너편에 이르기 마련이다.

이 두 물이 만나는 자리에 나루가 들어섰던 까닭이다. 기강(岐江)나루다. 기강나루에서 배를 타면 두 물이 합해지는 물살은 건너편 창녕군 남지읍 용산마을 어름에 가 닿는다. 옛적 의령 사람들이 남지장(2·7일)을 보러 가거나 할 때 썼던 뱃길이다.

맞은편 남지에는 낙동강 개비리길이 남아 있어 요즘도 뜻있는 사람들이 때때로 즐겨 찾는다. '개'는 '물가'를 뜻하는 토종말이고 '비리'는 '벼랑'을 이르는 경상도 지역말이다. 의령에도 낙동강을 따라 난 갯길이 있었다. 지정면 백산마을에서 성산마을 기강나루까지 5km 남짓 이어졌다. 백산 마을에서는 같은 의령인 신반이나 지정으로 가려면 산을 넘어야 해서 험했지만 남지 쪽으로는 이 갯길로 쉽게 갈 수 있었다.

지금도 자취가 남아서, 옛길을 가득 메우는 수풀이 사그라드는 겨울이면 제 모습을 상당히 드러내 보여준다. 굳이 걸으려면 충분히 걸을 수 있을 정도다. 걷는 내내 왼편으로 낙동강 유장한 흐름을 볼 수 있고 나무로 뒤덮여 그윽한 느낌이 드는데다 오르내리는 굴곡까지 알맞은 괜찮은 길이다. 지금 같은 여름에는 걷기는커녕 들머리를 찾기조차 쉽지 않다.

백산마을 앞을 지난 다음 제방 위로 올라 조금 걷다 보면 제방이 끊어지면서 허물어져가는 흙길이 나오는데 여기가 바로 그 갯길 들머리가 된다. 너덧이 나란히 걸어도 될 만큼 너른 길은 콘크리트로 만든 재실 비슷한 건물과 대숲 있는 데서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정도로 좁아진다. 갯가 비탈에는 소나무·참나무·팽나무·은행나무 따위가 장하다. 성산마을 가까워지면서 대숲을 다시 만난다. 대숲 오른편으로는 감밭이 있다. 성산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하지만 이 낙동강 갯길을 알거나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다. 사라져가는 이 갯길을 되살리면 좋지 않을까. 옛날 장터를 중심 삼아 모이고 흩어지던 세상살이도 되씹고 수풀 사이 거닐며 건강을 챙겨도 좋겠다. 수풀을 베어내고 좀 다듬기만 하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맞은편 남지 개비리길보다 더 훌륭할 것도 같고 낙동강으로 트이는 전망도 훨씬 더 좋을 것 같다.

백산산성과 성산산성

갯길은 당연히 백산산성과 성산산성도 이어준다. 동남쪽으로 열린 백산마을을 북쪽에서 내려와 좌우로 감싸는 뒷산 고갯마루에 산성터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들이 흙과 돌로 성을 쌓고 낙동강을 오르던 왜적을 막아낸 장소라고 알려진 백산산성 자리다.

기강나루가 있는 성산마을에도 산성이 있다. 백산산성과 마찬가지로 흙과 돌을 섞어 쌓은 성산산성이다. 낙동강과 남강이 한눈에 들고 멀리 창녕·함안·의령까지 두루 바라보인다. 강가 높지 않은 산성이지만 사방을 널리 제압하는 입지가 아주 탁월하다.

곽재우 관련 기록을 보면 "낙동강 왼편(임금 있는 서울에서 볼 때)과 정호(鼎湖=남강) 오른편 강기슭에 50∼60리마다 전망초를 두고 정탐하며 때로 공격하고 때로 구축해 왜적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백산·성산 두 산성도 그런 구실을 했겠다 싶다.

보덕비 들어선 기강나루 전투 현장

성산마을 기강나루 둘레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은 역사에서 매우 뚜렷한 위치를 차지한다.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같은 해 4월 22일 전국 처음 의병을 일으킨 망우당 곽재우 홍의장군이 왜적 척후선을 깨고 첫 승리를 일군 자리다. 강바닥에 나무를 박은 다음 밧줄로 엮어 낙동강을 거슬러 남강으로 들어서는 왜적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는 화살로 공격해 해치웠는데 5월 4일 세 척, 6일 열한 척 모두 열네 척을 깨뜨렸다. 기강나루 전투인데 자체만 두고 보면 조그맣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의령관문에서 본 홍의장군 곽재우 동상과 정암루, 정암철교. /김훤주 기자

기강나루 전투로부터 스무날 가량 뒤 곽재우는 의령 들머리 정암나루 일대에서 왜적을 한 번 더 크게 물리친다. 그런데 만약 기강나루 전투 승리가 없었다면 정암나루 전투는 아예 있지도 않았으리라 볼 수 있다. 기강 전투에서 이겼기에 사람들이 의병을 달리 생각하게 됐고 덕분에 의병이 크게 늘었으며 이것이 바로 정암나루 전승에 밑거름이 됐다는 얘기다.

당시 민심을 되짚어보면 이런 사정을 바로 알 수 있다. <선조실록> 1592년 6월 28일 치를 보면 "왜국은 부역이 없다는 말을 듣고 마음으로 이미 그들을 좋아하고 있는데 … 백성들이 모두 머리를 깎고 의복도 바꿔 입고 왜적을 따라 곳곳에서 도적질합니다."

보덕각

곽재우조차 처음 의병을 모을 때 어려움을 겪었다. 집안 재산을 모두 풀었으나 시작은 50명 수준이었고 그마저 집안 하인 같은 종복이 많았다. 곽재우가 기강나루 전투를 치르지 못했거나 이기지 않았다면 이미 허물어진 영남 민심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중요함을 지금 사람들은 쉬 잊고 지내지만 옛 사람들은 제대로 매겼다.

성산마을 들머리에 곽재우를 기리는 보덕각(報德閣)이 있는 까닭이다. 전승 규모로 보면 기강나루 전투보다 정암나루 전투가 엄청나게 큰데도 보덕비각은 거기 있지 않고 여기 있다. 비각 안에는 '유명조선국홍의장군충익공곽선생보덕불망비(有明朝鮮國紅衣將軍忠翼公郭先生報德不忘碑)'라고 적힌 빗돌이 있다. 영조 15년(1739) 왕명으로 세웠으며 비문은 당시 영의정 채재공이 손수 썼다고 한다.

보덕각 옆에는 임진왜란 당시 초계 마진 전투에서 숨을 거둔 의병장 손인갑과 뒤따라 원수를 갚으려고 싸우다 분사한 약해 부자를 기리는 쌍절각(雙節閣)도 있다. 광해군 원년 1609년 아버지와 아들을 충신과 효자로 삼아 봉수면 신현마을에 세웠다가 1943년 지금 자리로 옮겨졌다. 이런 임진왜란 관련 문화유산과 백산~성산 낙동강 갯길을 잘 관련지어내면 '충의의 고장' 의령군은 그 위상을 스스로 한 단계 높일 수 있지 않을까.

보덕비

보면 볼수록 좋은 정암나루 일대

기강나루에서 남강 쪽으로 거슬러 오르면 의령천 물줄기가 남강으로 쓸려들어가는 자리가 나타난다. 의령읍 정암 마을, 곽재우 장군 두 번째 전승지인 정암(鼎巖) 나루 일대다. 건너편 함안보다는 의령으로 치우친 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가 바로 정암, 솥바위다. 여기 둘레에는 새로 들여세운 의령관문(국도 79호선)과 홍의장군 곽재우 동상이 있고 일제강점기 1935년 만들어진 트러스 모양 정암철교도 있다. 또 솥바위와 남강 풍경이 통째로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는 정암루가 있다. 곽재우 전승을 기리려고 만든 누각 취원루가 불탄 자리에다 정암철교 준공되던 해 지역 유림이 앉혔다.

솥바위 둘레는 의령 사람들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장소다. 바깥에서 오는 이들도 많이 찾는다. 역사와 풍광이 모두 빼어난 때문이다. 정암철교는 아름다움과 건축사적 가치, 중부 경남 교통요충을 이었다는 역사적 구실까지 더해져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정암루에 올라 꽃을 활짝 피운 배롱나무 사이로 남강 물결과 건너편 들판을 보다가 아래 강가로 내려가니 바로 앞 솥바위에 백로가 한 마리 조는 듯 앉아 있다.

솥바위 가까운 물가로 바람쐬러 나온 사람들.

정암나루 전투는 고장 지리를 잘 아는 곽재우 장군 유격전의 승리였다. 1592년 5월 24일이라 하는데 그 어름 며칠 전투가 치러졌지 싶다. 왜군 척후는 쉽게 건널 수 있는 지점에 나무 팻말을 꽂았고 이를 알아챈 곽재우는 팻말은 늪지대로 옮기고 복병을 뒀다. 아울러 장졸 몇몇에게는 자기랑 똑같은 붉은 옷을 입혀 곳곳에서 곽재우가 출몰하는 듯이 보이도록 교란작전을 펼쳤다.

곽재우가 지금껏 기림과 존경을 받는 까닭은 이런 승전에만 있지는 않다. 곽재우는 일찌감치 벼슬살이를 포기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마흔하나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재산을 몽땅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물론 당시 선비라면 근본으로 가졌을 임금에 대한 충성도 있었겠지만 사람으로서 당연한 도리를 한다는 생각, 닥쳐오는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식구와 백성을 지킨다는 생각에서 비롯됐음이 크다 하겠다. 임금이 벼슬을 내려도 줄곧 사양했다. 지나치게 사양한다고 그 죄를 물어 임금이 귀양살이를 시키기까지 했으니, 권세를 좇아 존귀함을 노리지도 않았다 하겠다.

의병처럼 멋진 의령의 나무들

곽재우와 열일곱 장령을 비롯해 여러 의병들 위패를 모신 충익사 뜨락에는 쇠못 하나 치지 않고 만든 목조 건물 충의각(忠義閣)이 극락왕생을 바라는 듯 꽃상여 모양으로 놓여 있다. 그런 가운데 좋은 나무들이 곳곳에 있다. 먼저 배롱나무들이 눈길을 끌고 다음으로 모과나무가 눈에 띄는데 500살이 넘었다고 한다. 안내판에는 "의병을 닮은 듯 수형(樹形)이 곧고 아름답다"고 적혀 있다. 줄기가 여럿이면서도 곧게 위로 뻗은 모습 그리고 울퉁불퉁 근육까지 나온 모양이 과연 그런 느낌이 들게 한다. 나이가 280살은 넘겼다는 커다란 뽕나무도 한 그루 있다. 모과나무는 곽재우 생전 모습을 봤는지도 모르겠다.

500살이 넘은 충익사 모과나무.

유곡면 세간리 곽재우 생가를 늦가을에 찾으면 그 앞이 통째로 노란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다. 곽재우 어린 시절 놀면서 기개도 기르고 공부도 했다는 600년 된 은행나무가 눈에 꽉 차게 들어온다. 해마다 음력 정월초열흘에 목신제(木神祭)를 지내 풍년과 안녕을 빌었던 당산나무인데 제수(祭需)는 은행 열매를 팔아 장만했을 정도로 큰 나무다.

은행나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세간 마을 어귀에는 현고수(懸鼓樹) 느티나무가 자리잡았다. 북을 매단 나무라는 뜻인데 곽재우가 의병 모으고 훈련할 때 그렇게 했다. 임진왜란 최초 의병이 일어난 역사적인 장소로 나이는 520살은 넘겼으리라 짐작된다.

세간리 어귀에 있는 현고수 느티나무.
유곡면 세간리 곽재우 생가 앞 은행나무.

백산 안희제와 호암 이병철, 퇴계 이황의 덕곡서원

백산 안희제(1885∼1943)와 호암 이병철(1910~1987). 태어난 때는 다르지만 둘 다 의령 출신이다. 돈벌이에 나선 것도 같고 타고난 집안 내력이 부자였음 또한 같다. 안희제는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운영하면서 독립운동에 자금을 보탰고 이병철은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운영하면서 재산을 키워 삼성그룹을 만들었다. 이병철은 부귀영화를 누리며 자기 명대로 살다 죽었고 안희제는 투옥과 고문을 거듭 당한 끝에 병을 얻어 비명에 세상을 떴다.

사람들 찾는 발길로 보면 부림면 입산마을 안희제 생가는 쓸쓸하고 정곡면 중교 마을 이병철 생가는 붐빈다. 재산은 세상 살아가는 수단·도구일 뿐인데도 그런 수단·도구를 누구를 향해 무엇을 위해 쓰고 모았느냐에 따라 인심은 이렇게 다르다. 하루하루를 고단하게 살아가야 하는 지금 대부분 사람들 현실이 거꾸로 반영돼 있는 듯하다.

경남에서 퇴계 이황(1501~1570)을 모시는 서원은 드물다. 뿌리가 경북 안동이기 때문이다. 그 드문 퇴계 이황 모시는 서원이 의령에 있다. 가례면 가례마을 가까운 의령읍 하리 덕곡서원이다. 퇴계가 스물한 살 때 허찬의 동갑내기 딸한테 장가를 들었는데 그 처가 본거지가 가례마을이었다. 퇴계는 허씨 부인을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사별한다. 퇴계는 장가든 뒤로 의령을 일곱 차례 찾았다고 알려져 있다. 서른에 새 장가를 들었어도 초취 처가와 관계는 끊어지지 않았다. 옛날 법도는 그랬다. 허씨에게서 난 두 아들 가운데 둘째 준은 가례 마을 외가(생가이기도 한)에서 외할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기까지 했다.(1548년 스물한 살로 요절)

덕곡서원은 1654년 당시 의령현감 윤순거가 세웠는데 밖에서 봐도 멋지지만 안에서는 더 좋다.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산비탈 강당에서 따뜻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강당 마루에 앉으면 시원하게 툭 트인 풍경이 보이고 시원한 기운도 끼쳐져 온다.

퇴계 처가가 있었던 가례마을에는 퇴계가 썼다는 '가례동천(嘉禮洞天)' 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바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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