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오백리] (5) 함양군 지곡면 남효교~유림면 성애교

함양군 안의면을 지난 남강 물길은 금호교가 있는 수동면 상백리를 넘어가면서 좌우로 지곡면과 수동면을 가르는 경계가 된다. 남효교는 그래서 지곡면 남효리와 수동면 내백리를 잇는 다리다. 창평교 또한 왼쪽의 지곡면 창평리와 오른쪽 수동면 우명리를 잇는다. 대고대다리는 지곡면 도천리와 수동면 원평리를 이어주고, 사근교까지 내려간 남강 물길은 함양읍과 수동면 소재지를 가로질러 흐른다.

수동면 원평리 원평사거리에 이르면 12호선 88올림픽고속도로가 물길을 넘어간다. 사근교를 지난 물길은 35호선 통영대전고속도로 남강천1교를 지나 수동면 화산리와 유림면 대궁리 성애마을을 잇는 성애교에 닿기 전 백운산에서 흘러내려온 위천과 합류한다.

스크린샷 2014-08-08 오전 6.22.50.png
해마다 처서 지나 다리 짓고 망종때는 허물고

"두둑다리 놔가지고 다녔지예. 처서 지나면 실한 나무와 솔가지, 흙으로 지었다가 봄 되면 다시 뜯어내고, 여름에는 맨발로 펑덩펑덩 건너다니다가 처서 지나면 다시 다리 짓고…."

함양군 지곡면과 수동면을 이어주는 남효리 다리에 얽힌 이야기다. 남효리는 지형적으로 강을 건너지 않고는 안의면이나 거창으로 드나들 뾰족한 수가 없는 마을이다. 노인들이 이야기하는 '두둑다리'는 섶다리로 짐작된다. 지금 전주 삼천, 영월 등에서 재현하기도 하는 섶다리는 사실 강을 사이에 둔 마을이라면 대부분 지어 이용하던 것이다.

때마침 복날이라 복달임을 끝낸 마을 노인들이 정자에 앉아 있었다. 수박 한 쪽씩을 나눠먹으며 지금 있는 남효교가 들어서기 전에는 어떻게 강을 건넜냐고 묻자 모두들 한 마디씩 거든다.

20140807010167.jpg
▲ 함양군 수동면, 지금은 사용치 않는 옛 사근교에서 북쪽으로 돌아서면 대고대다리에서 흘러오는 남강 물길이 내려다보인다.

"지금도 기억나는 긴데 우리 어렸을 때니 해방 전인가보이. 두둑다리가 아이라 외나무다리 두 개를 걸쳐놓았던 기라요. 한 개는 가는 사람, 한 개는 오는 사람…. 근데 하루는 초상이 나서 생이(상여)가 강을 건너 나가는데 이기 낭패인기라. 상두꾼들이 앞뒤 양쪽에서 잡잖은가벼. 난중에는 생이를 지고 양쪽 사람이 외나무 하나씩 걸어 나갔다아이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우찌 건너가나 구갱혔다아이요."

남효리에 시멘트 다리가 처음으로 생긴 것은 1970년대였다 한다.

"그때는 나라에서 지어준 기 아이고 마을 사람들이 돈 모아서 다리를 놓은 기라요. 참말, 그때 온 동네 재산 다 팔았던 거제. 이 일대에서 신식 다리는 우리 마을이 세사 처음이었던 기라."

그만큼 절실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지은 다리는 1987년 태풍 셀마에 쓸려가 버렸다.

"저거이 나라에서 다 지어준 거라요. 새 다리 생겨 좋아서 동네 사람들이 한동안 일없이 다리 밟으러 댕깄다아이요."

주민들의 숙원이었던 지금의 남효교가 마을 입구에 놓인 것은 1999년이었다. 강을 건널 다리가 없어 겪어야 했던 모진 일들은 옛 이야기가 되었다.

천지간의 일두-정여창과 남계서원

남효교에서 내려온 물길은 지곡면 앞 창평교에 닿는다. 여기서 지곡면소재지인 창평리를 지나면 일두(一 ) 정여창(1450~1504)의 고향인 개평리가 나온다. 정여창은 자신을 일컬어 천지간의 일두라 했다. '한 마리 좀벌레'를 뜻한다.

"농부는 농사를 잘 지어 만인을 배부르게 하고, 의복 등 산업을 하는 사람은 백성을 편하게 하는데, 글 하는 선비들은 천지간에 좀벌레라 했지예. 그래서 선비는 성인들 글을 잘 정리하고 백성들에게 가르침을 줘야 한다는 게 일두 선생의 지론이었습니더."

일두 정여창 고택 옆 일두기념관에서 만난 이춘철(62·함양군문화관광해설사) 씨의 말이다. 그는 "일두 선생은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동방오현이라 일렀으며 공자 제자들과 같이 세운다는 문묘배향에 드는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20140807010163.jpg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일두 정여창 고택.

"한 집안에서 삼 정승이 나온들 문묘배향만 못하다 했는데예. 최치원 설총 정몽주가 다 문묘배향에 속합니더."

이곳에서 창평교를 건너 5리쯤 떨어진 수동면 원평리에는 일두 정여창을 추모하는 남계서원(사적 제499호)이 있다. 남계서원은 개암 강익(1523~1567)이 유림의 뜻을 모아 지은 것으로 전국 서원 중 사액서원으로 소수서원이 첫째고 두 번째에 해당한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 함양 지역내 존속한 유일한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전국에는 47개의 서원만이 훼철되지 않고 존속됐다.

"남계서원은 지난해 12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대상으로 등재 신청을 해놓은 상태라예, 별 탈 없이 선정될 것으로 다 알고 있습니더."

남강 지류 위천변에 남도부 하준수 고향 있다

수동면소재지까지 내려온 남강 물길은 성애교에 이르기 직전 주요 지류인 위천과 합류한다. 백운산에서 시작된 위천은 평정천, 연덕천, 월암천, 죽곡천, 구룡천에서 흘러온 물길들을 차례로 모아 남강 본류를 향해 흐른다. 또 백운산 아래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대각교, 백운교를 지나 18개의 다리를 차례차례 지나 수동면에 닿는다. 남강수계 하천모식도에 따르면 위천은 백운산 아래에서부터 함양군 수동면까지 28km로, 70리에 이르는 강이다.

▲ 천년교 위에서 찍은 함양 상림 옆으로 흐르는 위천 풍경.

위천 70리 물길은 서하면에서 백운산 원동재(삐삐재)를 넘어온 국도 37호선과 나란히 백전면 경백리 대평삼거리까지 이어진다. 이 길에는 도로 양 옆으로 제법 밑동 굵은 벚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서서 길고 서늘한 그늘을 만들고 있다. 위천 상류 망월정 옆 표지석에는 일본 명치대를 졸업한 백전면 출신 박병헌이 1987년 장학회를 만들고 벚나무 1만 2000그루를 심어 이 길이 조성됐다고 적혀있다. 봄이면 백운산으로 들어가는 긴 골짜기 안이 온통 벚꽃잎으로 흩날려 천지간을 분간할 수 없을 듯하다.

위천은 대평삼거리에서 월암리 월암삼거리까지 1001번 도로, 12호선 88고속도로와 나란히 이어지다가 겹치다를 두어 번 반복하며 남쪽으로 흘러 내려온다.

함양 상림 어귀에 닿기 전 병곡면 도천리. 이곳은 한국근현대사에서 아직 조명되지 못한 하준수(1921~1955)의 고향이다. 작전명 '남도부'로 더 많이 알려진 하준수는 일제말 강제징집을 거부하며 지리산으로 들어가 보광당이라는 항일무장투쟁조직을 만들었고, 한국전쟁 직전 조선인민유격대를 지휘, 1954년 잡혀 이듬해 총살형을 당했다.

"내가 열여섯에 시집 와서…. 그런 사람이 있었다쿠더만 우리가 뭘 아나. 그때야 여기 골짜기가 맨날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인민군이 들어오고 우리겉헌 사람이야 숨이 붙어있으니 사는 거였제. 상림에도 인민군이 노상 살고 함양장이 인민군 훈련장이었는데…. 비행기가 폭격을 하면 함양장터에만 내리퍼붓다더라."

도천리가 친정이라는 백전면 하종희(89) 할머니의 이야기다. 하준수를 일컫는 '남도부'는 남조선의 경상남도와 부산을 탈환하라는 작전명이다. '남강 오백리' 지류인 엄천강 주변 칠선계곡에 그의 은신처가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최치원은 물길 잡아 함양 상림을 펼쳐놓았다

월암삼거리와 뇌계교를 지나온 위천 물길이 2007년 새로 지은 함양읍 대덕리 대죽교에 이르면 왼쪽으로 함양 상림(천연기념물 제154호)이다. 위천을 톺아보면서 함양 상림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함양 상림은 마을과 백성을 위협하는 위천 물길을 돌려 잡기 위해 1100년 훨씬 이전에 조성한 인공림이다. 여기에다 이 숲을 조성한 이가 신라 때 유불선 통합을 주창하던 고운(孤雲) 최치원(857~?)이라는 점에 더욱 그러하다.

1920년대 최씨 문중에서 세운 문창후 최치원 선생 신도비.

함양 상림내 '새천년 역사인물공원'은 함양군이 2001년 조성한 곳이다. 생애의 한 시기를 함양 지역에서 지내며 발자취를 남긴 위인들의 흉상과 생애, 업적을 기록해놓았다.

함양(당시 천령군) 태수로 있었던 고운 최치원과 점필재 김종직(1431~1492), 뇌계 유호인(1445~1494), 일두 정여창(1450~1504), 옥계 노진(1518~1578), 개암 강익(1523~1567), 연암 박지원(1737~1805) 등이 대표적이다. 고운 최치원 흉상은 맨 앞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고운 최치원은 함양읍 주민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우연히 이를 잠깐 엿볼 수 있었던 일이 있었다. 어디 그늘에라도 숨고픈 8월 땡볕이라 급히 발길을 돌리는데 때마침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고운 최치원 흉상 앞에서 거듭 절을 올렸다. 그리고 한참동안 정성스레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고운 최치원 흉상 앞에서 절 올리는 할머니.

상림 인근에 사는 김분이(88·죽장마을) 할머니. "문창후 선생이 소원을 다 들어준다아입니꺼. 이 어른이 도술 부리듯이 지리산, 백운산에서 나무를 가져와 상림을 맹글고 합천 해인사에 들어가 지팡이 하나 꽂아두고 신선이 됐어예. 내는 이 길로 내려올 때마다 소원을 빕니더. 바라는 기 있으모는 함양 사람들은 다 문창후 선생한테 빌어예."

문창후(文昌候)는 고려 1023년 최치원에게 내려진 시호다. 김분이 할머니 이야기만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함양읍 사람들에게 고운 최치원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고운 선생을 추모한다는 상림 안 정자, 사운정(思雲亭)에서 이날 함양산삼축제 기원제를 올리고 있었다. 전해져오는 무수한 일화와 함께 고운 최치원은 이곳 함양읍에서 성현이기도 하고 산신이기도 하였다.

함양 상림의 옛 이름은 대관림(大館林)이다. 거듭되는 침수로 숲은 상림과 하림으로 나누어졌다. 함양 상림은 최근 조사에 따르면 졸참, 갈참나무 등 활엽수를 비롯해 120여 종의 2만 그루가 넘는 식생을 이루고 있다. 사계절 내내 1100년 숲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 있다.

함양 상림에 흐르는 실개천에 발을 담근 사람들.

새천년 역사인물공원 외에도 이곳에는 이은리 석불, 함화루, 문창후 선생 신도비 (文昌候先生神道碑)와 사운정, 척화비, 3·1만세운동기념비 등 유적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함양 상림에서 하림으로 들어서는 어귀에는 왼쪽으로 함양읍 용평리 한들이 펼쳐진다. 현재 하림은 공원과 함양토속어류생태관으로 조성돼 있다. 위천은 구룡저수지에서 내려온 구룡천과 하림공원 앞에서 합류해 함양읍 백천리 옥매교, 대웅교를 차례로 지난다.

그리고 마침내 고운 최치원이 다스린 위천 70리 물길은 남강 본류에 닿는다. 여기서부터 유역면적이 훨씬 넓어진 강에는 물버들 등 수변식물들이 웃자라 푸른 습지를 이룬 듯하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