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7) 옛 마산

마산은 역사가 오랜 고장이다. 가야 시대에는 포상팔국(浦上八國) 가운데 하나인 골포국(骨浦國)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신라 지배 아래 들어간 뒤로는 굴자군(屈自郡, 지금 창원)에 딸린 골포현이 됐다(676년, 문무왕 16). 757년(경덕왕 16)에 굴자군이 의안군으로 이름이 바뀔 때 골포현도 합포현(合浦縣)으로 바뀌었다.

합포는 고려 시대 들어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의 일본 정벌을 위한 기지 구실을 했다. 1274년 10월 3일 원나라 도원수 홀돈과 고려 도독사 김방경이 4만 군사를 전함 900척에 태우고 합포만에서 대마도로 출정했던 것이다. 이 1차 정벌은 실패하고 말았는데 원나라는 1280년 합포에 정동행성(征東行省)까지 설치하고 이듬해 2차 정벌에 나섰으나 이 또한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때 지역민이 그 준비와 지원에 힘썼다는 이유로 1282년 의안군은 의창현(義昌縣)으로, 합포현은 회원현(會原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회원현 성지

합포가 일본 정벌을 위한 기지가 됐던 까닭은 무엇일까? 합포는 바다 안쪽 깊숙이 들어앉아 포구가 매우 긴 데 더해, 앞에 놓인 거제도가 해류와 바람을 막아주기까지 하기 때문에 항구로서 조건이 아주 좋았다. 게다가 병영이 일찍부터 설치돼 있었고 대마도에 이르는 직선거리가 짧을 뿐 아니라 여기를 흐르는 쿠로시오 해류 또한 거제도를 거쳐 대마도까지 곧바로 이어진다. 군량(軍糧) 확보에도 합포는 제격이었다. 고려 성종 때 남도(南道) 수군(水軍)에 둔 열두 군데 조창(漕倉=고려·조선 시대 조세로 거둔 쌀 따위를 배로 실어 나를 때까지 쌓아두려고 만든 공립 곳간) 가운데 하나인 석두창(石頭倉)이 회원=합포에 있었던 것이다.

조선 시대 들어서는 태종이 1408년 회원현을 의창현에 합쳐 창원도호부(昌原府)로 승격시켰다. 이로써 창원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난 반면, 행정 지명으로서 합포·회원은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합포 옛 땅에는 고려시대부터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경상우병영)이 있어 왔으며 조선 태종도 1413년 경상우병영을 여기 설치했다. 그러다 경상우병영이 있던 합포성이 임진왜란 때 타격을 크게 입게 되자 병영은 임진왜란 직후인 1603년(선조 36)에는 촉석루가 있는 진주로 옮겨갔다.

그러면 정동행성은 어디에 마련돼 있었을까? <선조실록> 1603년 5월 2일 기사는 마산포를 일러 "이곳은 옛날 합포(合浦)로 고려 때에 정동성(征東省)에서 전함(戰艦)을 수리하던 곳"이라 적고 있다. 여기서 마산포는 지금 마산항 일대를 이르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고적(古跡)으로 절도사구영(節度使舊營)을 꼽고 "성터가 월영대(月影臺) 북쪽에 있는데 전해 오기를 '원나라 세조(世祖)가 일본 정벌 당시 정동행성을 여기 임시로 설치하고 혼도를 보내 몽골 병사 4500명을 거느리고 머물게 했다'고들 한다"고 적었다.

'월영대 북쪽'이면 어디일까? 지도에서는 무학산 기슭 자산동 일대인 것처럼 보인다. 자산동에는 회원현성지(會原縣城址)가 있다. 무학산 남쪽 야트막한 기슭(해발 143m)이지만 마루에 서면 마산 시가지와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흙으로 쌓은 토성이 조금 남아 있고 망루가 꼭대기에 복원돼 있는데, 출토된 기와조각들로 미뤄 고려시대까지는 현성 구실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를 정동행성이 설치돼 있던 자리라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같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절도사구영과 별도로 '회원고현(會原古縣)'을 "창원도호부 서쪽 15리에 있다"고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경상우병영이 있었던 합포성은 지금 마산회원구 합성동 73-4에 80m 정도 쥐꼬리만큼 남아 있다. 원래는 고려 우왕 4년(1378) 9월부터 11월까지 배극렴 장군이 왜구를 막을 목적으로 쌓은 둘레 4291척 높이 15척 크기 석성이었다. 해자도 뒀고 조교(吊橋)도 놓았으며 동서남북으로 문도 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은 '창원도호부'조에서 이첨이라는 이의 글을 빌려 이렇게 적었다. "성안에 의만창(義滿倉)·회영고(會盈庫)를 만들어 군량을 저장했다. 전에는 멀리서 이틀 밤낮 동안 가져오느라 사람과 짐승이 모두 고달팠다. 바닷가 두어 고을 백성도 성안에다 움을 두고 왜구가 오면 처자와 들어오고, 왜구가 물러가면 나가게 했다. 이로써 마음 놓고 농사도 짓고 생업을 폐하지 않게 됐다." 조그맣게 남았지만 거기 서면 느낌이 남다르다. 커다란 바위를 잘라 각지게 쌓은 모습이 야무진데, 바위를 위에서 자세히 보면 옛적 펄일 때 말라서 갈라터진(건열乾裂) 자죽이 선명한 화석도 종종 보인다. 이처럼 일대에서 많이 나는 퇴적암이 주로 쓰였고 화강암 자질을 띠는 돌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합포성터에 남은 석성

창원도호부에 딸린 크지 않은 포구(浦口)였던 마산포(합포)가 지금처럼 도시로 자라날 수 있었던 바탕은 이런 역사 흐름 속에 이미 들어 있다. 고려시대 석두창에서 이미 그 씨앗을 볼 수 있었으며, 그 뒤 조선 태종 때인 1403년 폐지됐던 조창제도가 1760년 되살아나 마산창이 다시 설치되면서는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창원(창원+마산)·김해·함안·칠원·진해(지금 삼진 일대)·웅천(지금 진해) 전역과 의령·고성 일부의 전세와 대동미를 관장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중성·동성·오산·서성·성산·성호리 여섯 마을이 들어섰다. 지금 원마산 또는 구마산이라 이르는 일대다. 이렇게 사람과 물산이 모이는 자리에는 어김없이 시장이 들어서기 마련이다. 경남에서 가장 큰 수산시장인 마산 어시장도 이 때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임금이 일상 업무 수행에 참고하기 위해 편찬된 <만기요람>에서 마산장을 경상도에서 가장 장시(場市)로 꼽을 정도로 번성했다. 또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대동지지>(1864)에서 조창과 더불어 읍창도 둘 기록했다. 반룡산(盤龍山) 아래 바닷가의 반상창(盤上倉)과 합포 바닷가의 해창(海倉)이 그것이다.

마산의 도시 성장은 1899년 개항이 되면서 더욱 빨라졌다. 원래부터 시가지였던 구마산의 남쪽에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 영사관과 공동 조계(租界)가 들어서면서 신마산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중국 여순항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거점으로 1900년 마산항 일부를 얻어낸다. 일본은 진해현(지금 진동면)을 군항지로 삼아 기회를 엿보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마산항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러고는 같은 해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개항과 동시에 뒀던 창원감리서는 없어지고 마산이사청(理事廳)이 설치됐으며 이듬해에는 웅천현(지금 진해구)이 군항으로 지정됐다.

옛 마산 헌병분견대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건물로는 옛 마산헌병분견대가 대표적이다. 1926년 지어졌는데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에게 고문 따위를 저질렀던 장소로 해방 이후 군사독재 시절에는 보안사령부로도 쓰였다. 일본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이 지역에는 또 적산(敵産)가옥이 더러 남아 있다.

신마산 지역의 적산가옥

그런데 마산에서 가장 큰 문제는 고려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이렇듯 풍성하건만 문화유산은 지나치달 정도로 빈약하다는 데 있다. 물론 보전이 제대로 되지 못하는 것은 창원을 비롯한 다른 고장들도 마찬가지라 하겠지만 마산은 더욱 심하다. 고려·조선 등 전통시대 유물은 그렇다 쳐도,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동시대와 바로 닿아 있거나 일제강점의 산물인 근대 문화유산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를테면 일제강점기 1913년 세워져 해방 이후 1970년까지 있었던 마산형무소조차 독립운동 또는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숱한 사연을 안은 채 뜯겨나가 버린 현실은 참담한 느낌을 들게도 한다.

마산형무소 터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면 스토리텔링이 해답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산은 조선 시대 이종무 장군이 벌였던 대마도 정벌의 본부이기도 했다. 거제도를 거쳐 대마도로 나아간 경로는 일본 정벌을 목표로 삼았던 원·고려연합군의 진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둘을 엮은 위에 석두창·마산창 같은 조창과 조운까지 곁들여 역사적 상상력과 감수성을 자극할 그런 얘기를 만들어내어 얼마 남지 않은 관련 유적이지만 좀더 잘 가꿔서 걸치게 하면 어떨까 싶다.

어시장 부근의 적산가옥

아울러 1950년대 한국전쟁 피란 시절을 비롯해 1960년대 3·15의거와 1970년 마산수출자유지역 설치 이후까지를 아우르는 현대사도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일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창동예술촌과 창동·오동동 도심 재생 사업과 연관지어 많은 이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역사 테마를 이야기로 풀어내고 또 시각화하는 작업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일까?

그런데 어쩌면 그보다는 우리가 살아내는 지금 이 나날들이 나중에 언젠가는 역사가 되고 지금 지어지는 새로운 건물이나 시설들이 후대 사람에게 문화유산으로 남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하고 좀더 신경쓰고 좀더 관심을 갖는 자세가 다른 무엇보다 더욱 중요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지금 마산의 역사·문화 유산들은, 있을 때는 잘 모르지만 지워지고 나면 퍽 아쉬운 존재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는 그런 애틋함에 매력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3·15의거 발원지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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