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71) 통영별로 37회차

절기가 말복을 향해 가는 이즈음, 연일 벌겋게 달아오르는 수은주의 높이만큼이나 온 나라가 폭염으로 들끓습니다. 오늘은 지난 여정을 마무리한 산청 생초면소재지에서 오부면을 지나 산청으로 이르는 길을 걷습니다.

◇생초를 나서다 = 생초면 소재지를 벗어난 옛길은 강변을 따라 난 옛 국도 3호선이 덮어쓰고 있습니다. 경호강 물길이 굽이지는 벌바구를 지나는 즈음에는 고령토를 채취하느라 산이 하얗게 속살을 드러내고 있고, 강변 바위 벼랑을 따라 난 길로 골재를 실어 나르는 대형 트럭이 질주하고 있습니다. 벌방우(봉암蜂巖)라고도 하는 벌바구 아래에는 예전에 나루가 있었고, 물이 굽이치는 여울이라 물살이 빠릅니다. 산자락 아래로 난 길이 끝나는 즈음의 사래골은 살여울에서 비롯했는데, 예전에는 어살(어전漁箭)을 두어 고기를 잡기도 하였기에 붙은 이름입니다. 예서 생림교를 지나면 예전에는 밤나무가 숲을 이루어 밤정이라는 들에 듭니다. 그냥 보기엔 그저 밋밋할 뿐이지만, 이곳은 먼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산 곳입니다. 예전에는 고인돌도 적잖았습니다만, 고운모래로 구성된 강변 둔치에 중장비를 이용한 우엉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구덩이를 파서 그 상석을 묻어 버려 지금은 자취도 살필 수 없습니다. 이곳 경작지 밭둑에 돌을 던져 둔 더미를 헤치면 빗살무늬토기나 민패토기 등의 질그릇 조각이 눈에 띄기도 합니다.

스크린샷 2014-08-04 오전 12.22.16.png

◇오부면을 지나다 = 신연리 관동마을을 지나 오부면에 들려면 구석다리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이름은 관동마을 동남쪽 산모롱이에 있던 다리에서 비롯됐습니다. 고개를 내려서면 바로 장성백이골이 나오고 아래에 오부면소재지와 반대편으로 이르는 길이 교차하는 사거리가 나옵니다.

옛길은 수동에서부터 줄곧 3번 국도가 덮어쓰고 있어 곧게 새로 확장된 그 길을 따랐어야 하는데, 옛 3번 국도를 그대로 따르는 바람에 남서쪽으로 오부면 소재지를 향해 길을 잡고 말았습니다. 언제든 갈림길이 나오면 지도를 보고 확인해야 하거늘 교통량이 적은 그 길이 옛길이겠거니 착각한 것입니다. 덕분에 오부면소재지가 있는 양촌마을에서 깡통맥주로 갈증을 달래며 잠깐 발품을 쉬긴 했지만, 이런 일은 여지없이 대가를 치르게 마련입니다.

예정에 없던 호사를 누렸으니 다시 제대로 길을 찾아야 합니다. 장재동 못 미쳐 옹기점이 있던 점촌(店村)에서 동쪽으로 난 산길로 들어갔다가 길이 끊어져 있어 다시 나와 겨우 길을 잡습니다. 그곳에는 산중에 보기 드물게 기와를 굽는 곳이 있습니다. 아마 가까운 한옥 마을에 기와를 공급하기 위한 공장인가 봅니다. 거기서 동쪽으로 난 산길을 찾아 겨우 내려오니 옛길을 덮어쓰고 새로 확장한 3번 국도와 만납니다. 다행히 길은 찾았지만 구주막 사거리에서 약 2km를 그냥 지나친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구주막(舊酒幕) 지명이 특이하여 <한국지명총람>을 뒤져보니 역시나 조선시대 관행(官行) 길로서 주막이 있어 붙은 이름이라 나옵니다. 달리 면막(眠幕)이라고도 했다니 숙박도 겸한 조선 후기 주막의 기능을 잘 나타내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1980년대에 제작된 1:5000 지형도를 보니 실제 구주막은 사거리에서 남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길가에 있고, 당시에는 세 채의 집이 있었습니다만, 그런 옛길의 자취는 새로 3번 국도를 내면서 지워져 버렸습니다.

◇힛티(백야현)를 넘다 = 산길을 나와 3번 국도와 만난 즈음은 오부면 양촌리와 산청읍 차탄리의 지경고개입니다. 지금은 달리 고개 이름이 전하지 않으나 지형도에는 그 동쪽으로 약 1km에 백치고개라 적어 두었습니다. 이 고개는 힛티-재 또는 백재라고도 하는 백야현(白也峴)입니다. 고개 아래에는 이름이 같은 원집이 있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역원에 "백야현원은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고 나옵니다. 당시 교통로를 지금 3번 국도가 덮어썼으니 백야현도 바로 국도가 지나는 이즈음을 이르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산청지도>에도 그곳에 '백야치(白也峙) 11리'라 적었고, <대동여지도>에도 백야현이라 표기하였으니 지금 지도에 표기된 백치고개는 이곳으로 옮겨 적어야 맞습니다.

고갯마루에서 옛길은 3번 국도를 버리고 남남서로 방향을 잡아 차탄리로 향합니다. 옛길이 구릉과 충적지 사이 곡벽을 따라 그림처럼 남아 있습니다. 자연에 어우러져 물길을 따라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우리 옛길을 그대로 느끼며 아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마을에 들어섰습니다. 봄 농사를 시작하는 참이었는데, 지금은 벼들이 한여름 폭염을 견뎌내며 들녘 가득 무럭무럭 자라고 있겠지요. 차탄리를 지나 경호강을 따라 내려온 옛 3번 국도와 만나는 즈음에는 산청농공단지가 있고 그 앞으로 산청읍이 한눈에 듭니다.

백야현을 내려서면 볼 수 있는 산청군 생초면 차탄리, 그곳에 이르는 그림 같은 옛길.

◇빗돌로 옛길을 헤아리다 = 농공단지 앞에는 4기의 기념비가 있는데 3기는 돌이고, 가장 오래된 것은 쇠로 만들었습니다. 조선 말엽과 대한제국 시기 세워진 것인데, 민겸호불망비(1881년), 정복원거사비(1900년), 김희원영세불망비(1902년)는 원래 자리를 지키고 있어 길을 헤아리는 잣대 구실을 제대로 합니다. 이 가운데 조병길청덕선정비는 가까운 강가에 있었는데 이리로 옮겨왔습니다. 주인공인 현감 조병길(趙秉吉)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니, 창녕현감을 지내던 1894년(고종 31)에도 주민들에게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일을 철저히 없애고, 여러 은혜를 베풀어 표리(表裏:옷의 겉감과 안감) 한 벌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가까운 경호강 서쪽 금서면 매촌리에도 그를 기리는 불망비가 있고, 청도에도 선정비가 있을 정도로 각지에서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빗돌 한쪽에 광서(光緖) 19년(1893) 계사 2월이라 새겨 둔 것으로 보아 1892년에 산청에 부임해 베푼 선정을 기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선조 때 지리(池里)로 옮기기 전까지 산청향교가 있었던 구생기 마을을 지나면, 산청휴게소에서도 1897년 부임한 산청군수 서상빈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이듬해에 세운 빗돌을 만납니다. 예서 산청교를 건너 산청읍 들머리에서 옛길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고을 중심지로 들어갑니다.

◇산청에 들다 = 옛 산청의 중심지는 산청초교 일원으로 관아와 객사가 있던 자리입니다. 옛 지도와 지지를 보면, 산음현에는 따로 읍성을 쌓지 않았는데 바다에서 먼 내륙이기 때문입니다. 전패(殿牌)를 모신 객사가 현 산청초교에 있었고 서쪽에는 환아정(換鵝亭)이라는 정자가 있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음현 누정에는 "환아정은 객관 서쪽에 있으며 강을 굽어본다. 현감 심린이 건축하였고, 화산 권반이 왕우군의 일을 따서 이름하였다"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왕우군의 일이란, 왕희지가 중국 산음 땅에 사는 어느 도사의 청으로 <도덕경>을 써 주고 거위를 받은 '환아'의 고사를 취해 중국 산음(山陰)과 이곳 산청의 옛 이름이 같아 환아정이라 했다는 이야깁니다. 지금도 산청초교 남동쪽 모서리에 척화비(斥和碑)가 남아 있어 옛적 고을의 중심지였음을 일러줍니다. <산청지도>에는 환아정 남서쪽에 읍창(邑倉)과 읍치(邑治)를 표시하였고 고을의 진산인 남산 사이 마을을 현내리라 적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