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도록 멀리 가고 싶었나 보다. 어쩌면 도망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강원도 고성 GOP(일반전초부대) 총기난사 사고가 터졌을 때 떠오른 이름이 있었다. 윤종빈 감독. 군대라는 폭력적 질서 안에서 한없이 저열해지는 우리들 모습을 다룬 지난 2005년 데뷔작 <용서받지 못한 자>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아쉬움은 있었으나 다음 작품인 <비스티 보이즈>와 <범죄와의 전쟁>에서도 지금 이곳을 사는 사람들을 그는 외면하지 않았다. 최근 개봉한 신작 <군도 : 민란의 시대>가 조선시대 의적떼(群盜)를 다루었다고 '멀리' 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군도>는 구체적 현실과 연관성을 스스로 끊임없이 차단하고 부정하는 영화다.

윤종빈은 "윤종빈의 '군도'가 아닌 그냥 '군도'로 봐 달라"고 말했다.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했던 전작들과 다른 길로 새보고 싶었고, 이성이 아닌 일단 심장이 뛰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단다. 오직 쾌감과 재미, 전복의 카타르시스만을 추구했다며 설령 이런저런 서부영화나 무협영화, 특히 역사의 전복을 꾀한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가 겹친다는 소리가 나와도 "그러거나 말거나" 하겠다는 말도 했다.

감독의 '위악'은 빈말이 아니다. '민란'이라는 묵중한 역사의 긴장은 잠시 잠깐 스쳐갈 뿐이다. 말만 조선이고 이 땅이지, 아메리카대륙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만화에나 나올 법한 영웅들의 화려한 액션, 황량한 대지, 영화 <석양의 건맨> 풍의 배경음악에다 코믹하고 장황한 내레이션, 황당한 기관총 신까지 더해졌다. 물론 이 모든 건 의도적이다. '웃고 즐기자'고 작정하지 않는 한, 치기로 무장하지 않는 한 '민란의 시대'를 통쾌한 승리의 역사로 기록할 방법은 없다. 늘 잠시뿐, 민중들의 승리가 끝까지 지속된 역사가 있었던가?

윤종빈 감독 데뷔작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윤종빈은 이 영화에서 군대에서 자살하는 신병(왼쪽) 역으로 직접 출연했다. 오른쪽은 말년 병장 태정 역을 맡은 하정우. /캡처

어느덧 윤종빈이 서 있는 자리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군대 생활에 잘(?) 적응해가던 태정(하정우)과 승영(서장원)의 자리다. "어른이 돼라"는 군대, 아니 세상의 가르침에 마침내 성실히 응답하는 중이다. 위악은 감독 자신의 타협과 굴복, 무능과 나태를 감출 수 있는 훌륭한 도구다. "뭐 어때? 멋대로 한번 해보고 싶었어"라는데 심각하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 더 이상 영화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옛날 옛적 강호를 주름잡은 영웅들의 활약상에 환호하며 그냥 재미지게 한판 놀아 젖히면 그만인 것이다.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악귀 같은 나쁜 놈 조윤(강동원)만 최대한 멋지게, 극적으로 처단하면 된다. 많은 피가 뿌려지지만 쾌감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 투자자, 제작사, 배급사, 영화관, 관객 모두가 원하는 피이다. 피의 향연을 중단하는 방법은 오직 더 많은 피를 흘리는 것뿐이다.

<군도>는 민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누가 곁에서 무너지고 망가지든 말든 죽어나가든 말든 싸우기보단 적응하고 분노하기보단 잊어버리고 심각하기보단 즐기는 각자도생의 '쿨하고 멋진' 삶이 예찬 받는 세상. <군도>는 그런 현실과 맞서려는 고뇌나 분투가 아니라 또 다른 굴종의 기록이자 패퇴의 흔적이다.

망할 놈의 세상, 확 뒤엎고 싶으신가? 그럼 콜라와 팝콘을 들고 <군도>를 보면서 엿 같은 세상 열심히 욕하시라. 영화 속 민란의 승자는 도치(하정우)와 백성들이지만 현실에서 승자는 '대박' 난 자본과 위악뿐임을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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