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외면하고 통닭 다 먹던 철부지…팽목항에 놓인 과자·통닭과 오버랩

친구들이랑 어릴 적 먹던 추억의 과자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이야 이런 과자들 대부분은 불량식품으로 치부되거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지만, 이 과자들이나 간식거리에는 추억이 깃들어 있습니다. 예컨대 지금의 포테이토칩 등에 견줄 만한 고구마 빼떼기는 놀다가 허기에 지친 우리에겐 훌륭한 참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통영 등에 가면 구할 수도 있고 죽으로 만들어 팔기도 합니다. 그리고 동네 친구 중에는 부모님이 조그만 가내공업을 하고 계셨는데, 여기서는 건빵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건빵 한 알을 침으로 살살 녹여 먹다가 그 침마저 말라 목메면 봉지 속에 들어있던 별사탕 한 알은 특효약이었습니다. 그리고 술지게미는 어떻습니까? 어릴 적 시장통에서는 막걸리 등을 빚은 후에 술을 짜내고 난 남은 술 찌꺼기들을 조그맣게 네모나게 자른 돌가루 포대의 깨끗한 뒷면에 담아서 팔곤 했습니다. 지금의 발효 요구르트쯤에 해당하겠지요? 그러나 이것을 먹은 날에는 새 신을 신고 새파란 하늘 위로 팔짝 뛰어오르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취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가수 김추자와 엉뚱하게 엮여 있던 라면땅의 재미난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중학교 때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저에게 어머니는 시장통에서 통닭 반 마리를 사주셨습니다. 한 마리를 살만한 형편이 되지 않아서였겠습니다만, 저는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혼자 다 먹어버렸습니다. 제 곁에서 이를 지켜보고 계셨던 어머니께서도 아마 분명히 드시고 싶으셨을 겁니다. 그러나 자식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당신의 포만감이 되셨을까요? 철없던 저는 지금에야 그 풍경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이 생각만 하면 가수 김창완이 부른 '엄마와 고등어'가 함께 떠오르기도 합니다. 단지 반찬으로서의 또는 음식으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그것에 배어 있는 엄마의 사랑을 함께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일상의 경험들은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침잠해 있기도 하고, 망각의 강 저 너머로 사라지기도 하지만 시공간을 달리한 특정한 장면을 만나면 오롯이 살아나기도 합니다.

일상, 즉 우리의 하루하루 살림살이는 잔잔한 바다의 수면과 같이 큰 변화가 없습니다. 사건이나 사태가 매일 같이 일어난다면 일상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일상은 심심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러한 일상의 평온함을 깨뜨리는 것에 대한 강한 보수성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일상의 살림살이는 '지금', '여기'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지금과 여기는 짧은 찰나의 시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과 여기에까지 이르도록 한 과거의 경험과 추억이 배어 있는 것이고, 앞으로 남은 시간의 첫 출발지인 미래를 담고 있기도 한 매우 역동적인 일상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서두에 어린 시절의 과자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사라져버려 구하기도 어려운 물리적인 대상으로서의 과자가 아니라 사라져도 끈질기게 남아 있는 마음의 기억으로서의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은 기억의 꾸러미나 다발들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어떤 것은 잊혔거나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들도 있겠지만, 극도의 슬픔이나 기쁨 등은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일상에 각인되어버린 일종의 절정경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위로하고 추스르며 슬픈 기억을 제도화하려는 것입니다. 일상은 사회적 진공상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잊고 일상으로만 돌아가면 '오래된 미래'를 모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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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안산과 팽목항에는 아이들이 좋아했던 초코파이와 피자, 요구르트, 새우깡, 그리고 통닭 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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