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렇게 결혼했어요] 결혼한 지 45년 남해 김춘길·최순자 부부

남해군 남면 '양지마을'은 이름대로 볕이 온 동네를 감싼다. 그래서 농사도 잘된다. 김춘길(70)·최순자(69) 부부는 7월 한낮에도 일손을 놓지 않는다. 공동 작업장에서 마늘 까는 작업을 함께하고 있다. 그 모습이 매우 다정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분위기가 좀 달라진다.

할머니는 '어휴~'하고 한숨부터 내뿜는다. "내가 그때 속아서 지금 이러고 있잖아."

할아버지는 '허허' 하고 멋쩍은 웃음을 흘린다. "인물 좋은 나한테 반해서 따라왔잖아."

할머니는 서울 여자다. 남해 남자를 만나 45년 전 이곳에 왔다.

노부부의 첫 만남은 1969년으로 거슬러 간다. 할아버지는 군에서 지프를 모는 운전병이었다. 군 생활 대부분 서울에서 파견으로 있었다. 때로는 지프를 몰고 다니며 젊은 여자들을 목적지까지 태워주기도 했다. 그런 인연으로 부대까지 찾아오는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내가 젊었을 때 인물이 좋았거든. '김춘길은 내 남자다'라면서 여자들끼리 싸우기도 했지. 그래도 서울에는 워낙 예쁜 여자들이 많으니까 여기저기 눈이 가데. 우리 처는 옷 만지는 학원에서 강사로 있었거든. 학원 근처 오가다 처음 봤는데, 옴팍한 눈이 참 예쁘더라고. 바로 '꼬아야겠다' 싶었지. 찾아가서 단추도 달아달라고 하고, 그러면서 알게 됐지."

남해군 남면 양지마을에 사는 김춘길(오른쪽)·최순자 부부는 결혼한 지 올해로 45년째다. /남석형 기자

그렇게 5∼6개월 연애를 했다. 그런데 아이가 들어섰다. 할아버지가 제대를 막 앞둔 즈음이었다. 할아버지는 데리러 온다는 말을 남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하루, 한 달, 몇 달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할머니) "말도 마. 그 뒤로 소식이 없다가 부산이라면서 편지 한 통 오기는 했는데, 그것도 거짓말이라. 이미 그때 나는 아이까지 낳았고, 집에 어른들은 때려죽이려 하고…. 하는 수 없어 우리 오빠하고 직접 찾아가기로 했지."

당시는 여수에서 남해로 오가는 배가 하루 두 번 있었다. 일단 여수에서 만나기로 했다. 애초 아기만 주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발길을 끝내 돌리지 못했다. 결국 그 길로 남해에 눌러앉았다.

'서울 부잣집 막내 아가씨'였던 할머니는 이전까지 손에 물 한번 묻히지 않고 자랐다. 남해라는 외진 곳에 왔으니 몇 날 며칠은 울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집안·농사일에 나섰지만 구박만 받았다.

35년 전 가족사진. 아래 왼쪽의 아들이 부부 연을 이어가게 한 녀석이다.

"남해에서는 베 잘 짜고, 밭일 잘하는 여자가 1등 며느리잖아. 시댁 어른들한테 구박 많이 받았지. 그렇다고 누구 하나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어. 그냥 내가 알아서 할 수밖에 없었지. 그나마 내가 눈썰미가 있고, 악착같은 면이 있거든. 옆에서 하는 것 따라 배웠지. 밭에서 옆 사람이 저만치 일하면 나는 그보다는 더 앞서나가려고, 그렇게 죽기 살기로 했지."

남해에 눌러앉은 후 3년 만에야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시댁 어른들이 그제야 며느리로 인정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친정식구들 얼굴도 그때야 다시 볼 수 있었다.

지금 노부부는 1남 3녀를 키워내고, 벼·마늘 농사를 짓고 있다.

할아버지는 "처음에 서울여자 왔다고 시골 동네가 떠들썩했지"라며 으쓱해 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때 안 왔어야 하는데"라고 한다. 아랑곳하지 않고 할아버지는 계속 젊은 시절 인물 자랑을 한다. 그러면 또 할머니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라면서 타박을 준다.

그래도 할머니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때는 야속했지만, 지금은 마음속 앙금은 없어. 그러니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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