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제조업 살아남기 위해서는 IT융합 절실”

최근 창원시내를 다니다 보면 ‘알바앤잡’이라는 상호를 자주 보게 된다. 아르바이트를 소개시켜주는 사이트들은 대개 서울에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알바앤잡은 뜻밖에도 지역에서 만들었고, 지역콘텐츠로 아르바이트를 중개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창원시 의창구 팔용동에 자리잡은 알바앤잡. 나이 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김정현 대표(44)가 목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차고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목에 둘러싼 블루투스 이어폰만 아니라면 ‘IT관계자’ 보다는 ‘젊은 사장님’에 가까웠다.


어린 시절부터 IT 한 길로

김 대표는 경남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부산에 태어나고 자랐다. 중학교 2학년 그는 오락실에서 처음 본 컴퓨터를 보고 단박에 매료됐다. 컴퓨터에 꽂힌 그는 망설임없이 부산전자공고 정보기술과에 진학했다. 컴퓨터를 만질 가능성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서였다.

“부산전자공고는 학교시설이 괜찮았습니다. 학교 안에 애플2 컴퓨터도 있었고, 전산실이 있었습니다. 컴퓨터를 사려니 애플컴퓨터는 당시 80년대 돈으로 45만 원 이나 해서 비쌌습니다. 컴퓨터를 더 만지고 싶어서 아침에 전산실 청소를 맡고, 청소를 끝내고 나서 컴퓨터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찔끔 컴퓨터를 만지는 것만으로는 사춘기 소년의 성에 찰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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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종금 기자

“마침 당시 부산에 컴퓨터 판매장이 많이 있었는데, 거기에 한 달에 2만 원 정도 ‘회비’를 내면 가게 안에 컴퓨터를 다룰 수 있었습니다. 유명한 곳이 범일동과 서면에 있었는데 저는 범일동 ‘아인슈타인’이라는 판매장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게 됐습니다.”

컴퓨터가 몇 달 치 봉급에 달했던 시절이었다. 컴퓨터 판매장에는 컴퓨터를 하고 싶은 나름 ‘고수’들이 자주 들락거렸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땐가 최초의 컴퓨터 바이러스인 ‘시브레인’이 나타났습니다. 판매장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백신을 만들어 보자’고 결의하고 백신을 거의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백신을 배포를 하려는데…. 서면 컴퓨터 판매장에 있던 안철수 의원이 간발의 차이로 먼저 백신을 만들고 배포했습니다.”

고3이 지나고 역시 그에게도 진로를 결정할 시간이 왔다. 당시 부산전자공고에서는 대기업에도 취직을 많이 했다. 당시까지는 그래도 ‘대학 안 나와도 기술력 뛰어나면 알아주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의 선택을 뜻밖이었다. 그가 사람들과 어울리던 컴퓨터 판매장으로 취업한 것이었다.

“당시 제가 과에서도 컴퓨터 프로그래밍 이쪽으로는 상위권에 속했습니다. 당시 저는 돈 욕심 보다는 컴퓨터 욕심이 강했습니다. 판매장에 컴퓨터 잘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많이 배우고 싶었습니다. 당시 중소기업 월급도 한 달에 20만 원 정도 하는데, 판매장은 초봉이 14만 원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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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앤잡 제공

판매장에 있다가 군대에 다녀와서 그는 자신의 지식을 모두 모아서 ‘만능업무’라는 도스용 업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프로그램은 하이텔 다운로드 주간 순위 1위가 되기도 했다. 이후 잠깐 ‘외도’를 하게 된다. 칼라스캔 하는 업체와 이불 판매점에서 일을 했다. 몇 달 간이지만 그의 인생에서 컴퓨터를 떠나온 유일한 시간이었다. 이후 다시 그는 부산 ‘영광전자’라는 전자업체에서 기계자동화를 담당하는 일을 맡게 됐다.

“당시 기계제어하는 PLC(기계라인에 명령을 내리는 산업용 컴퓨터)가 너무 비쌌습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니 굳이 PLC가 아니더라도 일반 PC로도 제어가 가능하겠다 싶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라인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기계제어를 했습니다. 공장에서 원가 절감이 많이 됐죠.”

이후 1995년 10월, 그는 한 회사의 스카웃 제의를 받고 부산을 떠나 창원에 오게 됐다.

교차로 지역화 기반 마련


그를 스카웃 한 곳은 창원 ‘맥 월드 시스템즈’이라는 곳이었다. 매킨토시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매킨토시 컴퓨터를 주로 편집 디자이너들이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디자이너 전문 학원도 같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생활정보지들의 관리 프로그램·광고접수 프로그램, 편집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됐다. 1997년 그는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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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앤잡

“제가 만든 프로그램은 광고 접수부터 신문 편집을 자동화 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제작과정이 엄청나게 빨라졌습니다. 예전까지는 접수를 하고 그걸 신문에 편집하고 신문을 발행하는 데 까지 시간이 많이 걸려서 생활정보지가 이틀에 한 번 꼴로 발행됐습니다. 이젠 매일 발행할 수 있도록 된 겁니다. 이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인 조판프로그램은 대구 매일신문에 납품을 했습니다.”

그 무렵, 그는 새로운 혁명의 분위기를 읽었다.

“1996년 쯤에 서울 코엑스에서 소프트웨어 박람회를 하는데, 월드 와이드 웹(www) 부스가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사용하던 프로그램들은 모두 미국에 본사가 있었습니다. 그들로부터 어떠한 질의도 할 수 없고, 지원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인터넷으로 이메일을 날려야 하는데, 그걸 그제야 알게 된 겁니다. 그리고 바로 ‘홈페이지를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저희가 납품하는 생활정보지 경영진들에게 홈페이지 얘기도 하고 책도 사 드렸지만 ‘아직 시기상조다’라는 답변을 받게 됐습니다.”

이후 1997년에 벼룩시장이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1999년에는 그가 있던 ‘유리정보’라는 업체에서 교차로에 생활정보지 홈페이지 제작시스템을 만들어서 납품을 했다. ‘유리정보’는 2000년 교차로에 인수가 돼 (주)아이크로스로 사명을 바꾸게 된다. (주)아이크로스는 전국에 있는 교차로를 상대로 홈페이지 제작시스템을 납품하는 업체가 됐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교차로와 벼룩시장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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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앤잡

“벼룩시장은 우리가 아는 대로 본사에서 지역점 가맹해서 운영하는 형태입니다. 교차로는 본사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교차로 협의회’라는 곳에서 교차로라는 브랜드를 가지고 나누는 곳입니다. 처음 교차로를 만든 분은 박권형 카이스트 교순데, 미국 유학시절에 생활정보 신문을 보고 우리도 만들어 보자고 해서 1989년에 만든 것이 대전 교차로입니다. 돈 보다는 ‘정보가 유통돼야 한다’는 신념으로 만들었고, 전국 각지에 생활정보지를 소개해서 교차로가 전국에 씨앗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는 전국의 교차로 홈페이지를 icross.co.kr 로 통합하고 2005년 아이크로스 총괄본부장이 됐다. 그의 목표는 벼룩시장과 경쟁해 이기는 것이었다.

“벼룩시장은 수도권에서 강하지만, 교차로는 지방에서 강한 곳이 많습니다. 이를 잘 활용해서 지역 교차로를 ‘지역포털화’시키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광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 정보를 상담 부분 담을 수 있는 지역의 관문 역할을 하게끔 하자.” 

2007년, 그렇게 만들어진 그의 교차로 홈페이지 시스템은 지역교차로에서 웹 디자인을 할 수 있는 디자이너 한 명만 고용하면, 그 디자이너가 얼마든지 모양새나 메뉴·구성 등을 바꿀 수 있도록 했다. 지역마다 홈페이지가 다르게 된 셈이다. 성과는 얼마나 있었을까?

“창원교차로는 하루 방문자 숫자가 5000명에서 2만 명 수준으로 폭증했습니다. 부산과 서울을 제외하고는 교차로가 각 지역에서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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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앤잡

또한 그는 2009년 아이폰을 시작으로 스마트폰 혁명이 일어나리라 예상했다. 그가 그때 만든 앱이 ‘스캐니(scany)’였다. 초창기 QR코드 스캐너로 널리 쓰였다.

“알바앤잡 성공, 좋은 세상 아냐”

그렇게 그는 20년 동안 IT최전선에서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경험과 노하우를 쌓아왔다. 그러다 지금 ‘알바앤잡’ 대표로 있다.

-지금 아르바이트나 구인 사이트는 많지 않나요? 당장 생각나는 것만도 알바몬, 알바천국, 잡코리아가 있는데요.

“저도 그걸 고민해 봤습니다. 어떻게 하면 차별성을 줄까. 제일 처음에 했던 것은 콘텐츠를 쌓는 겁니다. 일단 창원교차로와 인연이 많으니 제휴를 해서 취업콘텐츠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제일 고민한 부분은 ‘기업콘텐츠를 어떻게 쌓을 것인가’ 입니다. 교차로 기반 취업콘텐츠는 기업 정보가 거의 없습니다. 고객들이 봤을 때 내가 취업하려는 곳이 어떤 곳이고, 무슨 일을 정확히 어떻게 하는 지 알 수 있어야 일할 마음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기업 콘텐츠를 모으고 있고, 6월 달이 되면 1주년이 되는데 대대적인 업그레이드를 통해 기업정보를 보충하고 기자가 직접 취재해 업체탐방을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다른 취업관련 사이트들은 지역 기업 현황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 수가 없을 겁니다. 따라서 주로 서울과 경기지역에 몰려 있습니다. 지역성을 가지고 콘텐츠를 구축하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봅니다.”

-창원시에 보면 ‘일구데이’라고 해서 정기적으로 일자리 알선을 하던데, 이런 공공기관과 제휴할 생각은 없는지요?

“관공서에서 우리를 알지 못합니다. 저희가 알바앤잡을 오픈한 건 작년 6월입니다. 고작 1년 밖에 안 됐기 때문에 검증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구데이 때 저희 사이트 홍보하러 갔다가 쫓겨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창원노인일자리창출지원센터와 협약을 맺었습니다. 아르바이트와 비정규직 채용공고 중에 중장년층이 할 수 있는 공고는 선별해서 매일 센터로 보내주는 것입니다. 센터에서는 그 정보를 가지고 기업과 구직자를 연결해 주는 겁니다.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르바이트 시장을 보면 경제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요즘 경기가 죽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구인시장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 경기가 죽었다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르바이트 시장이 가장 많은 곳이 홀 서빙이나 식당인데 그리 공고가 많지 않습니다. 비정규직 시장도 저희가 취급하는데, 일거리가 많이 줄었습니다. 창원은 특성상 수출이 늘어나야 경기가 사는데, 조선 쪽에 경기가 죽은 것 같고 STX사태도 영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창원 말고도 전국적인 것 같습니다. 제가 교차로와 인연이 깊어 각 지역의 생활정보지 사람들과도 아직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같은 곳도 채용건수가 많이 줄었습니다. 작년 까지만 하더라도 구미, 화순, 수원 이쪽으로 삼성 갤럭시 특수를 타고 일자리가 많았는데 올해는 그것도 줄었습니다. 그리고 부동산 거래도 역시 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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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종금 기자

-보통 어떤 사람들이 아르바이트를 많이 찾는가요?

“15세 부터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데, 통계로는 18~24세, 25~34세, 35세 이상으로 나눠서 통계를 잡습니다. 18~24세가 35%, 25~34세가 35%로 이분들이 70%를 차지합니다.”

-25~34 세 구간에서 아르바이트나 비정규직 구직자가 많다는 게 놀랍네요. 어찌 보면 이 시기에 자리를 잡아야 할 때가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만큼 기업에서 비정규직-아르바이트로 많이 뽑는다는 소립니다. 결코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우리 사회 온갖 문제들이 많이 있지만, 일단 다 집어치우고 최소한 최저 임금만은 대폭 상향 됐으면 좋겠습니다. 시간당 5210원으로는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 시간당 7000~8000원 이상이 돼야 생활이 가능하고, 이들이 경제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수도 증진되고 경제선순환이 이뤄지는 겁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생활물가가 거의 비슷합니다. 시급은 거의 평균 1만 원 대에 달합니다. 아르바이트나 비정규직 시장이 늘어나면 알바앤잡은 성장하겠지만, 과연 그것이 좋은 사회인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경제로 넘어갔다.

경남, IT융합해야 제조업 살아남아

-경남 경제를 살리려면 제조업이 살아야 하는데, IT도 중요한 축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공장자동화를 해봤던 사람입니다. 소프트웨어로 기계를 제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잘 압니다. 외국에 있는 공장자동화 기계를 보면 소프트웨어가 잘 돼 있는 곳은 기계의 움직임이 다릅니다. 소프트웨어는 값비싼 기계를 효율적이고 고급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심지어 전차를 만들어도 요즘엔 다 소프트웨어가 들어갑니다.”

-그럼 경남에는 소프트웨어를 육성하는 곳이 많이 있나요?

“거의 전무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무조건 초지일관 기계화입니다. 제가 앞서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다녀도 아무도 신경을 안 씁니다. 소프트웨어가 들어가야 기계가 생명을 얻는 데 말입니다.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소프트웨어를 공급해 줄 인력이 없는 겁니다. 경남에 정부지원으로 여러 기술학원이 있는데 프로그래밍을 하는 곳은 제가 알기로 하나도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학교에서도 간간이 소프트웨어 인력이 나오지만 다 서울로 가 버립니다. 대구나 부산, 구미, 울산 만 하더라도 이렇게 무관심하지는 않습니다. 제발 소프트웨어에 관심을 가져 주시고, 특히 인력 창출에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경남에 로봇랜드도 만들고, 소프트웨어 업체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제대로 된 로봇랜드를 만들고 싶으면 창조적 아이디어도 나와야 하고, 로봇을 제어할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프로그램 업체를 키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업체를 육성하고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기껏해야 1~2년짜리 용역 하나 던져주고 끝내는 것이 다겠죠. 설령 용역을 주더라도 장기적인 투자로 계속 프로그램이 업그레이드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렇게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그와의 인터뷰가 끝났다. 그는 영민하고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하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큰 실책 없이 능력을 인정받고 안정적으로 그는 업계에서 자리를 잡았다. 다만 그는 답답한 것이 많은 것 같았다. 경남의 기계 일변도의 제조업도 그렇고, 사회에 대한 답답함도 많은 것 같았다. 그의 영민한 눈으로 볼 때 이걸 그대로 둬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었다. 과연 그의 답답증이 풀릴 날이 언제쯤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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