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국에 무엇이며 조국은 내게 무엇인가”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 재외국민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일까? 유광임(48) 씨는 일본 시즈오카시에 살면서 한국어와 한국 가정요리 강사로 살고 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가정교회(세칭 ‘통일교’) 신자로서 종교적 신념에 따라 국제결혼을 했고 일본에 가서 22년을 살면서 3자녀(고웅대·정향·현웅)를 낳고 살지만, 대한민국 국적을 버리지 않았다. 그에 더해 두 아이를 김해에 있는 한 고등학교로 진학시켰다. 그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이며, 조국은 어떤 의미일까? 이제 고3이 된 딸아이 진학 문제로 고민이 많은 그를 김해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났다.

“2남 1녀에요. 큰 애가 고 웅대이고, 둘째가 정향이로 딸입니다. 그 아래 현웅이 있습니다. 정향이하고 현웅이를 김해대청고등학교에 보냈어요. 아이들을 국제적으로 활동하게 키우고 싶었고요, 그 출발을 엄마의 조국인 한국에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아이들 어릴 때부터 해왔어요.”

아이들을 한국으로 ‘유학’ 보내려고 나름대로 치밀하게 준비를 했지만 큰아들은 뜻대로 되지 않아 일본에서 대학까지 진학했고, 나머지 둘은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한국을 보낼 수 있었다.

“정향이가 국민학고 5학년인가 6학년 때 늘 그런 얘기를 해줬어요. ‘너는 공부는 꼴찌라도 좋다. 엄마하고 한국말로 농담따먹기 했으면 그게 제일 행복하겠다’고요. 솔직히 저는 굉장히 짠순이에요. 일본에서는 아이들을 엄하게 키우고 넉넉하게 대해주지 못했지만 한국에 나오면 호텔에서 재워주고, 먹고 싶은 것도 맘껏 먹게 사주고 그랬지요. 엄마의 조국에 좋은 이미지를 남겨주려는 생각에서 그랬죠.”

두 아이를 한국 고등학교 유학 보내고

정향이 중학교에 진학하고 엄마는 바빠졌다. 아이도 한국 고등학교로 가려는 의지는 있었기에 방법을 찾아주는 것은 엄마 몫이었다. 경기도 파주가 고향인 그는 경기도교육청과 서울시교육청에 아이를 유학시킬 방법이 있는지 여러 차례 문의했지만 길을 찾을 수 없었다고. 그러면서 들은 대답이 “아니 다른 사람들은 한국을 벗어나서 외국으로 유학가려고 애쓰는데 어머니는 왜 아이들을 한국으로 보내려고 안달이냐”는 것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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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인 기자

“나는 아이들을 대학교 때 한국으로 보낼 방법도 있겠지만 그래서는 아이들에게 한국은 조국이 아닌 제3국밖에 안 될 것 같았어요. 그게 싫었어요. 애들에게 그랬어요. ‘대학교 때 가려거든 미국으로 보내겠다. 더 많은 걸 볼 봐라. 하지만 고등학교는 다르다’고요. 고등학교 때 내가 많이 형성됐었고 그랬듯이 고등학교 때 가서 한국을 제1이건 제2건 조국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게 형성되리라고 확신을 했죠.”

결국 길을 찾지 못해 정향이는 일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렇게 엄마의 꿈은 무산되는가 했는데 민단 사업 하면서 알게 된 사람을 통해 경남도교육청이 민족교육 차원에서 교포 자녀 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석 달 동안 모든 절차를 마무리 짓고, 일본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정향이를 자퇴시키고 한국으로 보냈다. 다행히 잘 적응하고 언어 소통문제로 힘들었던 학업도 안정돼 가는 걸 보고 현웅이도 대청고로 진학시킬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가장 큰 어려움은 시아버지를 설득하는 거였다고.

“시부모님께선 내가 한국 국적을 버리지 않고 있는데다가 통일교는 종교적 고향을 한국에 두고 있으니 ‘언젠가 아이들 데리고 한국으로 가버리는 것 아닌가’는 걱정을 하셨던 듯해요. 그런데 아이를 한국 고등학교에 보내겠다고 했으니 무척 화를 내셨어요. 그렇지만 정향이더러 몇 주에 한 번씩 할아버지와 스카이프로 통화하게 하고, 한국에서 어려운 얘기보다는 좋은 얘기 많이 들려 드리게 했어요. 그리고 시아버지 주변에서 ‘야 대단하다. 손주 한국 유학 보내고’ 이런 말씀들을 많이 들으셨나 봐요. 지금은 치매에 걸려 고생이신데, 그래도 마음은 풀어져서 다행입니다.”

사실 시부모님은 처음부터 유광임 씨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고. 남편은 대학 때 통일교를 알게 돼 입교했는데 시부모는 이를 용인할 수 없어 아들을 끌어다 통일교에 반대하는 목사 앞에 데려가서 왜 통일교가 나쁜지를 설득하곤 했다고. 하지만 국제결혼 프로젝트로 결혼하겠다는 얘기 앞에서 시부모가 한 말은 ‘사람이냐 동물이냐’였다고 한다. “당시까지 일본 사람이 한국 사람을 보는 보편적 인식이 그렇지 않았나 싶다”고 했다.

통일교 국제결혼이란 게 결혼식 올리고 곧바로 남편 나라로 가서 사는 건 아니라고 했다. 식만 올리고, 몇 달에서 몇 년까지 신부 나라에서 서로 교제할 수 있는 기간을 준다는 것. 1988년 10월 한국에서 결혼식을 하고 남편이 고려대로 유학 와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90년 시어머니가 암에 걸려 수술받게 되자 며느리를 보고 싶어한다고 했다. 수술 전날 일본으로 가서 시부모님을 처음으로 뵙게 됐고, 그렇게 서로 알아가고 인정해가며 살게 됐다. 문화적 차이에 따른 어려움이야 많았지만 잘 적응해가던 무렵 새로운 복병이 나타났다. 시어머니가 광임 씨의 국적을 문제 삼고 나선 것.

아이 데리고 한국으로 가버릴까 두려워한 시부모

“큰아이 웅대가 국민학교 들어갈 무렵이었어요. 당시 일본에서는 이지메가 막 사회문제가 되고 할 때였죠. 엄마가 한국 사람이라서 아이들이 이지메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었겠지요. 하루는 우리 부부를 부르시더니 시어머니께서 저보고 국적을 일본으로 바꾸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아버님께 말씀드렸어요. ‘아버님 제가 국적 일본으로 바꾼다고 저는 일본사람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웅대가 한국 엄마를 둔 자녀로서 부끄럽지 않게, 일본 애들보다 더 잘 키우겠습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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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인 기자

그러고 나서 국적 문제는 해결됐지만, 아이들이 일본인으로 성장하는데 걸림돌이 될 만한 것에 대해서는 제재가 많았다고. 아이들이 국민학교 들어가 일본말을 잘 쓸 수 있을 때까지는 집에서 한국말을 못 쓰게 한다거나 그런 식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아이들을 한국으로 유학 보낸 이유는 뭘까?

“정향이 한국 보낸다 했을 때 시아버지께서 반대가 심하셨죠. 그때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저는 아이들을 일본사람만으로도 한국 사람만으로도 키우지 않을 겁니다. 세계 시민으로 키우고 싶어요. 한국 유학은 그 세계 시민으로 가는 첫걸음이 될 겁니다’라고요.”

그런 그에게 ‘조국’이란 무엇일까? 재외국민 중에는 ‘조국이 내게 해준 게 뭐가 있느냐’는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교포 분들 중에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요. 나는 솔직히, 이 나이까지 한국에서 살았더라면 조국에 대한 내용도 그렇고, 내 관념도 그렇고 내가 이렇게까지 형성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들어요.”

종교적 이유로 일본에 가서 살게 됐지만, 자신을 지켜내는 데는 종교적 신념도 한몫했다고 했다.

“문선명 총재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타인도 사랑할 수 있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세계도 사랑할 수 있다고 단계적인, 8단계 사랑을 말씀하시는데요. 문 총재님은 자기가 받으려는 사랑은 사랑일 수 없고, 줘야 오가고 해서 사랑의 힘이 나온다고 말씀하셔요. 조국이나 한국에 대해서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의 조국관이 위기를 맞고 있다. 그와 그의 자녀가 요즘 무척 힘들어하는 일이기도 하다. 평소 조국이나 정부가 ‘재외국민’을 위하는 듯이 보이지만, 정작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보니 조국이 해주는 게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의 딸 정향이는 간호를 배우고 싶어 한다. 일본에서는 간호사가 모자라 얼마든지 관련 대학에 진학할 수 있지만 한국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싶다는 게 광임 씨나 정향이 생각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대학에 갈 길은 어쩌면 이렇게까지 철저히 막혔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인도 외국인도 아니더라”

“정향이 대학 진학 문제 고민하다 보니 ‘나는 대한민국에 뭔가’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처음에는 재외국민 자격으로 대학 갈 수 있잖을까 했는데, 안된대요. 부모가 모두 한국 사람이어야 된다네요. 그럴 경우 물론 아이 국적도 한국이겠죠. 그래서 생각한 게 유학생 자격으로는 안될까 싶었는데 그것도 안 되는군요. 엄마 국적이 한국이어서 안된답니다. 내가 한국 국적 버리면 해결되지만, 나는 한국 국적 절대 안 버립니다. 다문화 가족도 알아봤지만 안되긴 마찬가지였어요. 애들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면 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아이 할아버지 아버지가 흔쾌히 동의해줄 성질이 아니죠. 더구나 아직 어려요. 국적 문제는 아이들이 성인이 된 뒤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할 문제지 부모가 나서서 정해줄 수는 없잖아요. 그런 과정에서 느끼는 게 내 권리라는 건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내가 자녀한테 조국이라고 주려고 했던 게 뭐였던가 싶기도 하고, 허무해요. 하지만 애들에게 그런 느낌은 주지 않으려 애쓸 겁니다. 그런 느낌은 나만 가져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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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인 기자

인터뷰 내내 혹시나 인터뷰이를 자극하거나 하지 않을까 싶어 조심했던 소재를 얘기해야 할 시점이 왔다. 최근의 악화한 한일 관계로 일본에서 사는 재외국민이 어렵거나 하지는 않은지, 그런 문제를 풀어갈 방법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등등. 광임 씨가 자연스레 그 물꼬를 터줬다.

“지금 한일관계가 정치적으로 굉장히 경색돼 있잖아요. 그게 피부로 와 닿아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한류 열풍이 대단했거든요. 그때는 한국 요리교실이나 한국어교실에 일본인도 많이 왔어요. 하지만 요즘은 영 썰렁해요. 주로 여자들이 오는데, 집에서 남편이 못가게 한다는 거예요. 한국 노래나 드라마 틀어 놓으면 당장 끄라고 하고요. 예전에는 안 그랬거든요.”

조국이 재외국민을 힘들게 하는 상황. 하지만 재외국민 편하라고 조국이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잖은가.

“하루는 정향이에게서 메일이 왔어요. 역사시간이었는데 토요토미 히데요시 얘기였대요. 일본에서는 그래도 한국어를 잘하는 축에 들지만, 한국인과 프리토킹하거나 받아쓰기를 할 정도는 아닌데, 어떤 느낌 같은 게 있었나 봐요. 평소에도 정향이는 독도문제나 위안부 문제 같은 한일관계에 대해서는 지 아빠에게도 물어보고 내게도 물어보곤 하던 아이였어요. 메일에 뭐라느냐면 히데요시 배우는데 말귀는 다 못 알아듣겠는데 막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막 눈물 흘리며 울었대요. 그랬더니 그 반 아이들이 전부 펑펑 울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정향아 그거다. 정향이로 인해서 이 시대의 고등학생, 같은 연령의 세대가 같은 역사를 두고 같이 눈물 흘린다는 게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니. 지금은 정향이가 어려 금방 답은 안 나올지 모르지만 한일 이런 관계가 언젠가 질문했던 위안부나 독도문제 같은 것도 공유하는 데서 해결책이 있지 내 것을 주장하는 데서는 해결이 없다고 본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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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인 기자

글쎄, 두 시간 넘게 인터뷰하면서 든 생각이다. 어쩌면 유광임 씨는 ‘모난 돌’일 수도 있겠다. 일본사람하고 결혼했으니 일본으로 귀화하고, 자녀 일본에서 공부시키고 그냥 평범한 일본 사람으로 살아갔더라면 지금 하는 마음고생은 안 해도 될 일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랬다고 해서 유 씨를 손가락질할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조국을 잊지 않았고, 버리지 않았고, 자녀에게 어머니의 조국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 했다. 혹시 우리는 그런 유광임 씨를 모난 돌이라면서 정으로 쪼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생각해봐야지 않을까. 그리고 답을 찾아봐야지 않을까. 얼마나 더 많은 모난 돌이 나와야 그 모난 돌도 동글동글해지게 정으로 쪼지 않고 제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둘 수 있는지를.

유 씨는 말을 아꼈지만 이런 말이 환청으로 남는다. “나는 조국에 무엇이며 조국은 내게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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