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한 맛읽기]경남 술문화 탐구

특정 음식이 아닌 술과 음식을 먹는 방식 그 자체, 즉 '술문화'가 지역 고유의 이름을 갖고 대중화·상품화된 곳은 국내에서 경남이 유일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통영 다찌, 마산 통술, 진주 실비 등은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경남만의 독특한 술문화다.

다만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는 드럼통 위에 고기 등 각종 안주를 펼쳐놓고 선 채로 막걸리 잔술이나 소주를 곁들이는 '대폿집'이란 술문화가 1950~1960년대경 있었다. 그러나 퇴근 후 하루 일과에 지친 노동자들의 몸과 마음을 달래주던 이 유용한 공간은 그 자체로 발전하기보다 음식 종류에 따라 전문 식당·술집으로 분화되었고, 지금은 '대폿집'이란 상호를 건 곳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듯

익히 알려진 대로 다찌와 통술, 실비는 제철 해산물 중심의 안주, '통으로'(상째) 나오는 안주 제공 방식, 술과 상을 기준으로 한 셈법 등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다. 당연히 그것은 각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생성된 술문화가 아닌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파생·전이된 것임을 의미하는데, 시점상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통영 다찌로 파악된다.

통영 다찌 상차림

오랫동안 인터넷 블로그(김장주의 통영여행, blog.naver.com/tongumi)에 통영의 다양한 문화를 소개해오고 있는 김장주 씨에 따르면 다찌는 어원 자체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나왔다. 즉, 서서 술이나 음식을 먹는 문화를 뜻하는 일본의 '다치노미' '다치구이'에서 생긴 말이라는 것이다.

기후가 온화하고 해산물이 풍부한 통영에는 일제강점기 많은 일본인이 정착해 살았는데, 이들을 비롯한 어부, 상인, 거주민들은 갓 잡은 생선회나 해산물 몇 점에 술을 함께 즐기길 좋아했다. 시간과 공력을 들여 구색을 갖춘 밥상을 차리기보다는 그때그때 허기를 달래기 위한 손쉬운 수단으로 '다찌'를 택한 것이다. 이는 사시미와 사케로 대표되는 일본의 술문화와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마산과 진주 지역 음식점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통술집은 대략 1960~1970년대, 실비집은 1980년대 무렵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제시대와 해방 직후 통영 다찌로부터 파생되어 인근 마산으로, 그리고 통영과 마산에서 다시 내륙의 진주로 술문화가 옮겨갔다고 추정할 수 있는 셈이다. 통술이란 이름은 술을 통에 담아 팔았다는 데서, 실비는 말 그대로 '실비(實費)' 즉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는 술집이라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통술은 통째로 상을 낸 데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한 가지. 경남 술문화의 '원조' 격인 통영 다찌와 관련해 분명히 할 것은, 서서 먹는 술문화 즉 '다찌'가 꼭 일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름만 다를 뿐, 우리에게도 '선술집'이란 술문화가 조선시대부터 존재해왔다. 말 그대로 '서서 먹는 술집'을 뜻하는 선술집 풍경은 조선 후기 풍속화가 김홍도나 신윤복의 주막 그림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음식문화 전문가인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사실 선술집은 조선적인 정조를 대표했다. 여기에 민중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1920년대 경성의 종로통에는 조선인 술꾼들을 위한 선술집이 골목마다 들어섰다"고 전한다.

마산 통술거리

◇각자의 색깔을 갖추게 된 배경

다찌와 통술, 실비는 큰 틀에서 같은 계통이지만 각 지역 특색과 조건에 따라 고유의 색깔을 갖춰오기도 했다.

관광도시로서 확고히 자리 잡은 통영의 다찌는 점차 그 규모가 커지고 가격대도 높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술 10병이 따라 나오는 4인상 기준 기본 10만 원, 2인일 경우 소주나 맥주 3~5병에 기본 5만 원 정도를 받는다. 추가되는 술의 가격은 보통 맥주 6000원, 소주 1만 원가량이다.

이는 4인상 기준 5만 원에 4000원(맥주)~5000원(소주) 정도의 술값을 따로 받는 통술이나, 6000원(맥주)~1만 원(소주)가량 하는 술 주문에 따라 안주가 계속 제공되는 실비에 비해 여러 면에서 상당히 부담 가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높은 가격대도 그렇지만, 적은 수의 인원이 먹기에 만만치 않은 데다 원하든 원치 않든 많은 술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다찌는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진주 실비와 유사한 형태로 운영됐다. 기본 상차림에, 술 주문에 따라 다양한 안주가 차례차례 뒤따르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관광객이 몰리고 자연히 물가가 오르면서 언젠가부터 음식점주 입장에서 보다 많은 수익을 올리고 보다 편하게 서빙할 수 있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주문에 따라 그때그때 안주를 내게 되면 손님 입장에서는 술·음식의 양과 술값을 조절할 수 있어 좋지만, 요리를 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손이 많이 갈 수밖에 없다.

이와 비교하면 마산 통술과 진주 실비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하고 서민 친화적이라고 볼 수 있다. (관광)상품화 정도를 따지면 다찌-통술-실비 순이 될 테고, 서민과 밀착도를 기준으로 보면 반대인 실비-통술-다찌 순이 될 것 같다. 실비는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다찌나 통술과 달리 주로 주택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것도 차이가 난다. 이런 각 지역마다 특징은 도시의 발전 정도나 식재료(해산물) 획득·유통 경로, 외부 인구 유입 규모 등과 직·간접 연관돼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진주 실비 상차림

다양한 제철 해산물 안주를 풍성하게 즐길 수 있는 경남의 자랑인 이 세 가지 술문화에서 다만 좀 아쉬운 것은 앞서 잠깐 언급한 음식점주 중심의 운영 방식이다. 여러 안주가 나오는 것은 분명 미덕이지만 손님에게 전혀 선택권이 없는 건 아무리 봐도 경직된 측면이 있다. 나는 가자미구이를 먹고 싶어도 가자미조림만 준비되어 있으면 무조건 그것을 먹어야 한다.

상째 '통으로' 파는 방식을 굳이 버릴 필요는 없겠지만, 먹고 싶은 안주 위주로, 인원 수와 각자 주머니 사정에 따라 조금이라도 유연하게 운영하는 방법은 없을까? 하긴 그렇게 되면 메뉴판을 내걸고 손님이 주문한 안주만 내놓는 일반 선술집, 대폿집과 별다른 차별성이 없어지긴 한다. 그래도 좀 저렴한 2인상 메뉴를 개발하거나 술 양을 각자 조절하게 하는 등의 유연성 정도는 약간만 신경 쓰면 갖추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경남의 술문화, 통영 다찌, 마산 통술, 진주 실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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