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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 마지막 왕은 왜 산청에 돌무덤을 남겼나

[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6) 산청군

김훤주 기자 pole@idomin.com 2014년 07월 23일 수요일

산청과 지리산

산청에서 으뜸은 단연 지리산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는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다. 지리산에 기대어 있는 전북 남원, 전남 구례, 경남 하동·함양·산청 가운데 산청에 있는 지리산이 가장 넓지는 않지만,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1915m)은 산청군 영역에 있다.

문화유산에서도 지리산은 산청에서 으뜸이다. 먼저 지리산을 지키는 지모신(地母神)을 형상화한 성모상(聖母像)을 천왕봉이 품고 있다. 조선 선비 김종직이 1472년 쓴 '유두류록(流頭流錄)'에도 성모묘(聖母廟), 성모석상이 나온다. 한 해 전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은 성모에게 주과(酒果)를 올리고 "오늘 저녁에는 하늘이 말끔해져서 달이 낮처럼 밝고, 내일 아침에는 만리가 환히 트여 산해(山海)가 절로 구분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또 세속에서 성모를 두고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 또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라 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 밖에 남한 석탑 가운데 가장 고도가 높은 법계사 삼층석탑(1450m)도 지리산에 있고 대원사삼층석탑·내원사삼층석탑·산청대포리삼층석탑·석남암사지석조비로자나불상(내원사)·삼장사지삼층석탑도 지리산 너른 자락에 안겨 있다. 여기에 더해 김해 가락국 마지막 임금으로 알려진 김구해 구형왕의 왕릉과 그와 관련된 수정궁터·왕산사지 또한 지리산과 이어지는 왕산 자락에 놓여 있다.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을 간직한 웅석봉도 마찬가지고, 시천면 일대 덕산리 등지에 있는 덕산서원·산천재 같은 남명 조식 유적도 그러하다.

가락국의 마지막 왕릉이 산청에?

지리산은 넓고, 또 깊다. 지리산은 육산(肉山)이면서 동시에 골산(骨山)이다. 흙산이면서도 바위산이라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다. 지리산은 이래서 모습이 여럿이다. 같은 지리산 자락이라도 전남 구례에서 넉넉한 느낌, 전북 남원에서 서늘한 느낌, 같은 경남의 하동과 함양에서 제각각 다양한 느낌과 따뜻한 느낌을 받는다면 산청에서는 산뜻한 느낌을 얻는다(개인적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지리산이 해당 지역 다른 여러 속성과 어울리면서 여러가지로 변주한다는 말이 좀더 맞을 듯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느낌을 주는 첫 머리에 놓이는 문화유산이 바로 구형왕릉이다. 보기 드물게 돌을 쌓아 만든 무덤(적석총積石塚)인데 비탈진 산기슭을 따라 일곱으로 나눠 층을 이루고 가운데 네 번째에는 감실 비슷한 구멍이 나 있다. 전후좌우로 넓게 퍼져 있고 위로도 적지 않게 높게 솟은 커다란 돌더미다. 신라나 가야의 고분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매우 신선한 장면이 될 수 있다.

구형왕릉 앞에는 아직 '전(傳)'이라는 글자가 붙는다. 구형왕의 것이라 확정되지는 못했고 '카더라'는 것이다. 김구해 구형왕은 김해 가락국 마지막 10대 임금으로 신라 법흥왕한테 532년 나라를 넘긴(讓) 당사자로 알려져 있다. 가락국은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침공을 받은 이후에는 그럴 듯한 고분을 전혀 남기지 못했다. 그만큼 커다랗게 타격을 받았다는 얘기다. 일찌감치 치명상을 입은 나라의 임금이 그것도 멸망한 뒤에 이런 무덤을 남겼다. 게다가 그 자리는 김해에서 한참 떨어진 왕산 자락이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니 저간에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짐작하기 쉽지 않다. 구형왕의 무덤이 아니라는 얘기도 있고 구형왕이 여기로 도망해 고토회복을 겨냥해 여러 작업을 했으리라는 주장도 있고 정복한 신라가 아량을 베풀어 구형왕 일족이 여기 들어와 살 수 있게 했으리라는 얘기도 있다. 어쨌거나 구형왕릉 둘레에는 수정궁(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별궁이었다가 구형왕이 만년에 거처했다는)터와 왕산사터 같은 구형왕 관련 다른 유적도 있다. 그이가 올라 옛적 도읍을 바라봤다는 망경루도 있고 그이 증손인 김유신의 활터였다는 사대비(射臺碑), 김유신이 시릉살이를 했다는 빗돌도 아울러 있다. 게다가 구형왕릉이 기대고 있는 묏부리가 바로 왕산(王山)이다.

구형왕릉으로 추정되는 적석총. 구형왕은 왜 김해에서 한참 떨어진 왕산 자락에 무덤을 남겼을까.

들머리 금서면 화계리에는 덕양전이 있다. 구형왕과 그 왕비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이다. 나라 잃은 가야 임금의 사당이라…. 사람들은 이쯤 되면 어떤 처연함과 울분으로 감정이 이입되기 십상이다. 비분강개 결사항전 옥쇄를 쉽사리 떠올리는 것이다. 하기야 저 계백 장군의 황산벌 전투가 없었으면 백제의 마지막이 무척 쓸쓸하기는 했으리라. 게다가 신라 마지막 태자 마의태자도 경북 고령 대가야 마지막 태자 월광태자도 모두 비분강개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달리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승패는 이미 정해져 있다. 가야 세력의 우두머리로서 잘나가던 시절은 이미 한 세기 전에 끝나 버렸다. 선대를 기리는 커다란 무덤을, 대가야·아라가야(함안)·고자국(고성)은 물론 합천·창녕 지역 가야 세력조차 만드는데도 구형왕은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은 이란격석(以卵擊石), 새알로 바위 치기도 못 된다. 본인이야 싸우다 죽으면 계백 장군처럼 멋지게 이름이라도 남겠지만 일반 백성들은 고난과 고초를 고스란히 겪어야 한다. 깨끗이 항복해도 지배당하는 설움과 괴로움이 통 없지야 않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구형왕은 시쳇말로 '쿨한 결심'을 했을 수 있다. 그런 덕분에 김유신을 비롯한 후손이 신라에서 지위를 누리고 공덕을 쌓을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덕양(德讓), 나라를 넘긴 덕은 그런 뜻이 아닐까…. 덕양전 안팎 울타리는 구형왕릉과 마찬가지로 모두 돌을 쌓아 둘렀다. 한편 처연한 느낌을 주지만 다르게는 전각 주인의 그런 '쿨한 결심'을 꼭꼭 눌러다지는 구실을 한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두류산 양단수에 산천재를 세운 '남명'

"두류산 양단수(兩端水)를 녜 듯고 이제 보니/ 도화(挑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삼겼세라/ 아희야 무릉이 어듸오 나는 옌가 하노라." 두류산 양단수는 덕천강과 경호강이다. 이 두 물줄기는 시천면 원리에서 만나 하나가 된다. 경남을 대표하는 조선 선비 남명 조식(1501~1572)은 아마 그 두물머리 언저리에서 이 시조를 읊었으리라. 김해 처가에 산해정을 짓고 공부하던 남명은 1545년 태어난 삼가 토동으로 돌아가 뇌룡정·계부당을 짓고 학문을 펼친다. 그러다 1561년 지리산 자락 덕천동으로 옮겨 산천재를 짓고 제자를 가르치다 마지막을 마쳤다.

남명이 늘그막에 여기를 찾은 까닭 가운데 하나는 앞서 시조에서 알 수 있다. 남명은 평생을 처사로 살았다. 태어난 외가를 떠나 산과 물과 들판이 더불어 멋진 데를 찾아들었다. 다르게는 이런 까닭도 있지 싶다. 산천재에 주련으로 붙어 있는 한시 덕산복거(德山卜巨)에 담겨 있다. '봄산 곳곳에 꽃풀 널려 있지만/ 상제 거처하는 천왕만 다만 사랑하네/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무엇을 먹을꼬?/ 은하수 십리 뻗었으니 마시고도 남겠네.'

여기서 이런 마음으로 후학을 10년가량 가르치다 편하게 세상을 떴을 것 같다. 높고 큰 안목은 여전했다. '덕산 개울 정자 기둥을 제목으로 삼아(題德山溪亭柱)'에서 "천석들이 쇠북을 보게/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겠지만/ 만약 두류산과 견주면/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네"라 했다. 하지만 고립감은 벗어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산천재 앞뜰에 심은 매화나무를 두고 지은 '설매(雪梅)'는 "홀로 지내기 어려운 한 해가 저물었네/ 새벽부터 날 샐 때까지 눈조차 내렸는데/ 오래 외롭고 쓸쓸하던 선비 집에/ 매화 피어나니 맑은 기운 다시 솟네"라 했다.

덕천서원에서 남명 조식을 모시는 숭덕사.

덕천서원은 남명 조식을 모시는 공간이다. 느낌이 좋기로는 남명 태어난 합천 삼가 외토리 용암서원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배롱나무·홰나무·느티나무·은행나무 등 오래된 나무의 어울림, 적당하게 나이 먹은 한옥 목조의 간결함은 용암서원에서는 누릴 수 없는 미덕이다. 학생들이 묵었던 건물과 공부하던 건물과 남명을 제사지내는 건물이 나란하다.

산천재에 가거들랑 나이가 450살 넘는 남명매에만 눈길을 둘 일은 아니다. 뜻없이 둘러보기만 해서도 안 된다. 유교 건물답지 않게 단청이 돼 있는데,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는지 눈여겨보면 거기 담긴 뜻도 새길 수 있다. 신선이 바둑을 두는 그림, 농부가 소를 몰고 밭을 가는 그림, 버들 아래 냇가에서 귀를 씻는 그림, 그 물을 벗어나 다른 물을 먹이려고 소를 끌고 가는 그림….

멋진 자리에 앉은 단속사의 숨은 면모

동·서삼층석탑과 당간지주로 남은 단속사(斷俗寺)는 그 놓인 자리만으로도 빛이 난다. 남향으로 개울 두 자락이 흐르는 사이 살짝 도도록하게 솟았는데 골짜기가 넓어 온종일 햇살이 넉넉하다. 단속사를 두고 <삼국사기>는 경덕왕 22년(763) 대나마 이순이 단속사를 지었다 했다. <삼국유사>는 경덕왕 7년(748) 이준 또는 이순이 조연소사(槽淵小寺)를 크게 고쳐 단속사를 지었다는 얘기와 경덕왕 22년(763) 신충이 두 벗과 함께 단속사를 세우고 임금의 진영(眞影)을 모셨다는 얘기를 함께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진주목'에서 들머리에 신라말 고운 최치원이 쓴 '광제암문(廣濟巖門)'이라 새긴 바위와 최치원의 독서당(讀書堂)이 있고 고려말 강회백이 손수 심은 정당매(政堂梅)가 있다고 적었다.

단속사 들머리 '광제암문'이 새겨진 바위.

단속사에는 이런 유명한 정당매 등등에 지금껏 가려진 사연이 있다. 몽골 침략에 맞서 만들어진 고려대장경을 위해 당시 단속사가 했던 역할이다. 최충헌에 이어 최우가 1219~1249년 집권하면서 아들 만종(萬宗)을 단속사 주지로 삼았다.(<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만종의 악행을 전하고 있다.) 단속사가 포함된 진양군 일대는 최우의 식읍(食邑)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고려 민중들의 원력까지 모아냈던 고려대장경이 단속사에서 판각됐다.

조선 선비 김일손은 '속두류록'(1489년)에서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과 같은 장경판각(藏經板閣)이 단속사에 있다고 적었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단속사에 '이상국집판(李相國集板)'이 보관돼 있다고 했다. 고려 문신 이규보(1168~1241) 문집 <동국이상국집>을 찍는 목판인데, 손자 익배는 발미(跋尾)에서 "신해년(1251년) 고려국 분사대장도감이 대장경(大藏經) 판각을 마치고 칙명(勅命)을 받들어 할아버지 문집을 판각했다"고 했다. 대장도감(大藏都監)은 1232년 몽골 침략으로 앞서 처음 새긴 대장경이 불타 버리자 1236년 대장경을 다시 새기려고 설치한 관청이고 분사(分司)(대장)도감은 대장도감의 하부기관쯤이 된다.

이런 사정을 알고 단속사를 둘러보면 망한 절터라도 그 느낌이 예전과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겠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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