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70) 통영별로 36회차

◇교통의 요충지 사근

사근역은 안의에서 내려오는 경호강의 윗물 남계천(濫溪川)과 함양에서 나오는 위천(渭川)이 결절지를 이룬 동쪽을 차지하고 있어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입니다. 그러니 남계천 동쪽 땅 수동(水東)은 물이 모이듯 길이 모이고 나뉘는 곳이기도 하지요. 이런 까닭에 사근도의 뭍길은 이곳에서 우리가 지나온 서쪽으로 가기도 하고 경호강 본류가 흘러온 북쪽으로도 열리는 곳에 사근역을 뒀겠지요. 달리 말해 이곳은 우리나라 교통 요충지가 가진 삼거리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천안삼거리에서 봤듯 남-북을 중심축으로 두고 동쪽 또는 서쪽으로 길이 열린 정황을 잘 보여줍니다.

고래로 사근역을 기준으로 한 교통로는 북쪽으로 육십령을 넘어 전북 장수 진안 이르는 길과 우리가 지나온 대로 팔량치~여원재를 넘어 남원으로 오간 길이 같이 쓰였으나 그 비중은 함양~남원 경로가 더 많았습니다. 육십령 경로도 적잖이 이용되었지만, 팔량치~여원재 경로보다 덜 쓰였음은 고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길이 험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덕유산 남쪽에서 고원지대인 북쪽의 전북 무주·진안·장수로 진출하기는 길이 거칠어 만만찮았을 것입니다.

◇사근역을 나서다

왜구와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치른 피내(혈계血溪:남계천)와 사근역 찰방을 지낸 이인상·이덕무를 뒤로하고 사근역터를 벗어나니 예부터 사람이 모여 산 자취가 곳곳에 눈에 듭니다. 먼저 거창 가는 길이 갈라지는 섬동마을 농협창고 뒤에 고인돌이 있고, 그곳을 지나면 더 오래된 함양화산리유적과 만납니다. 2005년 안의~마리 간 도로 확장공사에 앞선 발굴조사에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를 거쳐 삼국시대까지 마을을 이루고 산 자취가 드러난 것입니다. 특히 여기 4세기 전반 집자리에서는 움집 벽체가 흙으로 된 것과 판벽으로 된 것이 확인되었고, 방을 나눈 벽과 부뚜막·화덕·굴뚝 등도 완전한 모습으로 나와 주거지 취사와 난방 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마한 지역에서만 사용됐다고 알려진 주구단경호(注口短頸壺:물 따르는 아가리를 가진 항아리)도 출토되어 일찍부터 두 지역이 교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걸은 길이 그런 교류를 가능하게 했겠지요.

◇생초 가는 길

예서 산청으로 이르는 길은 지금 국도 3호선이 그대로 덮어쓰고 있습니다. 들을 질러 곧게 난 길을 걷자니 금방 싫증이 나서 화산교 즈음에서 수동앞들 농로로 내려 걷습니다. 그즈음 들녘에는 양파가 한창 초춘의 양광을 받으며 자라고 있었는데, 보완 답사를 갔을 때는 과잉 생산으로 제 값을 받지 못하는 양파가 그대로 쌓여 있었습니다. 이처럼 농심은 타들어가는데, 마침내 정부는 그들의 억장을 무너뜨립니다. 우루과이라운드 이래 신자유주의 세계화로부터 농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경해 열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노력을 돌이켜 생각하니,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집니다. 바로 엊그제 정부가 발표한 쌀시장 전면 개방인데요,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산경남연맹이 창녕에서 논을 갈아엎는 시위를 벌이고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손수 일군 논을, 그들의 바탕을 스스로 갈아엎을 때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날 논둑과 농로를 번갈아 걷다 길이 끊어져 다시 길을 잡기를 거듭했습니다. 길이 끊어지면 돌아나와 도로로 올라 걷다가 다시 농로로 내려 걷기도 했습니다. 길은 잘못 들면 다시 제 길을 찾아 가면 되지만, 우리나라 농정은 언제 제 길을 찾을지 너무 막막해 보입니다.

지하농로를 지나 화산리 장성골(장승백이골)에 듭니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골짜기지만 예전에는 장승이 있었으니 옛길을 알려주는 잣대입니다. 사근역에서 5리 정도니 길가에 세운 노표(路標) 장승이라 여겨집니다. 장성골을 지나 남계천 공격사면을 따라 난 길을 돌면 본통마을에 듭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손들이 쉬어가던 곳으로 제법 번성하였지만 지금은 안의~마리 도로가 개통되면서 예전보다 뜸해졌습니다. 이곳에서 생초로 가는 길은 본통잇재(본통령)을 넘게 됩니다. 배후의 태봉산(398m)이 남서쪽으로 뻗어내려 남계천과 위천이 합류하여 경호강을 이루는 곳으로 몰입되는 능선의 잘록이에 있어 내려다보는 풍경이 시원합니다. 잠시 발품을 쉬며 멀리 지나갈 길을 살핍니다. 고개를 내려서면 생초면 소재지 어서리입니다.

◇생초고분군과 산성

생초면의 진산 태봉산 자락에는 가야시대 고분군과 산성이 있어 그리로 발길을 잡습니다. 원래는 고총고분(高塚古墳=봉분이 큰 옛 무덤)이 능선을 따라 많이 있었으나 경작지 개간과 요업 공장의 고령토 채취 등으로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봉분 지름이 25~30m인 큰 무덤은 마루에 자리하고 작은 것은 비탈에 배치되는 가야시대 고총분의 일반적인 입지를 잘 따르고 있습니다. 봉분이 있는 무덤은 20여 기이고, 지하에 무덤방을 둔 돌덧널무덤은 수백 기로 추정됩니다. 두 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조사된 고총분 둘은 6세기 전반의 굴식돌방무덤으로 지역을 다스리던 우두머리의 무덤으로 밝혀졌습니다. 지금 생초고분군에는 전시관과 조각공원이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어 유적과 수준 높은 예술품을 같이 누리는 명소로 발돋움하고 있습니다.

가야시대 고총분의 일반적 입지를 따른 생초고분군과 조화롭게 자리한 조각공원. /최헌섭

고분군 서쪽 능선에는 어외산성 또는 척동산성이라는 오래된 산성이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성이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던 듯, 성이 있는 골짜기를 잣골(척동尺洞), 성이 있는 구릉을 배산(盃山)이라 했습니다. 잣골은 성(재·자)이 있는 골이란 말이고, 배산에서 배는 성을 이르는 재·자를 적기 위해 훈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은 위치로 보아 생초고분군을 조영한 집단이 축조하였으리라 추정되며, 우리가 지난 교통로와 그 아래 경호강~남계천~위천으로 이르는 경로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생초를 나서다

생초면 소재지는 함양군 경계에서 남계천과 위천을 받아들인 경호강이 동쪽으로 흐르다 급하게 남동쪽으로 꺾어 흐르는 곳에 있습니다. 따라서 소재지 맞은바라기의 평촌마을 쪽 경호강에는 하중도가 발달해 있습니다. 강물이 이곳에서 크게 곡류를 조장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토사가 쌓이면서 만들어졌지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그 안에 삼국시대 사람들의 밭과 무덤이 떼지어 있고, 뒤로는 고려시대까지 무덤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생초면 소재지 어서리는 큰물이 들면 쉽게 수해를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지금이야 양수장을 마련하여 강제 배수를 하지만 이전에는 매번 물난리를 겪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생초고분군을 조영한 집단의 생활 장소는 아무래도 강 건너 평촌들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생초를 나서면 구릉 곳곳에 땅을 파헤친 흔적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질 좋은 고령토가 나기 때문인데, 생초고분군이 들어선 구릉도 그런 까닭에 훼손되었고, 지나오며 본 백천리고분군도 질 좋은 흙 때문에 파괴가 되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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