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동의 추억'에서 23년 단골은 주인으로

첫 만남, 첫 사랑, 첫 키스 등등 처음으로 경험했던 것들은 머릿속에 자리 잡아 기억 저편으로 놓아주지 않는다. 1987년 대학 1학년 때 처음 마셨던 칵테일 ‘진토닉’, 맛은 잊었다. 그러나 칵테일 마셨던 곳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CAFE DE SUNSET’ 제목의 빛바랜 액자가 손님을 반겨주는 카페가 있다. 바로 그곳이 27년 전 첫 칵테일을 맛보았던 장소다.

80년대와 90년대 구 마산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 당시 젊은이의 발길로 분주했던 골목길에는 바람만 분다. 바람을 따라가다 멈춘 곳 창동 167번지. 80년대 만들어진 낡은 간판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해거름’이다. 

낯설지 않은 계단을 올라 문을 열면 일렬로 가지런히 놓인 빈 양주병이 손님을 맞는다. 일곱 명이 앉을 수 있는 스탠드바를 지나 맞은편 진열장 맨 위에는 시간의 흔적이 쌓인 빈 갈리아노 술병이 천장을 벗 삼고 주인 손때로 헤어진 포장에 쌓인 LP레코드판은 아날로그 전성시대를 잊지 못해 버티는 파수꾼처럼 카페 해거름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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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해거름 내 LP레코드판./김구연 기자

“좀 빨리 왔네. 아직 가게 문을 열 준비가 안 됐는데 10분만 기다리세요.”

해는 저물어가고 어둠이 내리기에는 이른 오후 5시 40분 그는 셔츠를 벗고 러닝만 입은 채 대걸레 잡고 카페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있었다. 

87년 처음 왔던 이곳은 시간이 멈추어 있었다. 메뉴판을 대신해서 걸어 놓았던 액자도 칵테일을 마셨던 탁자와 의자도 87년에 만났던 그대로 그 자리에서 반기고 있다.

“정리를 깔끔하게 해 놓아야 곧 출근할 직원이 편하지요. 또 오래된 가게를 지키려면 청소로 시작해서 청소로 끝나요. 인터뷰하러 오신 것도 손님인데 음악부터 틀고 시작할까요.”

해거름 2대 지킴이로 자신을 소개한 고굉무(51) 씨는 스탠드바 제일 구석에 놓인 전용 의자에 앉아 턴테이블에 LP음반을 올려놓았다. ‘Gazebo(가제보) - I like Chopin(아이 라이크 쇼팽)’

흘러간 80년대 올드팝과 함께 그와 해거름에 관한 시간 여행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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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굉무 카페 해거름 사장./김구연 기자

친구와 골목길을 걷다 인수 결심

“2008년 3월에 해거름을 인수했으니 올해로 6년째 되네요. 사실 저도 해거름 손님이었는데 전에 운영하시던 정의교 사장님(2010년 작고)과 농담처럼 주고받던 말이 현실이 되어버린 거죠. 저 나이 50살이 되면 해거름을 인수하게 해 달라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뜻하지 않게 정 사장님에게 일이 생겨서 6년 빨리 인수하게 됐죠.”

그와 해거름과의 인연은 오래된 일기장을 넘기듯 적지 않은 사연을 갖고 있었다.

고 씨는 1985년 해거름을 알게 되었다. 그가 고 1때 성당에서 만나 35년의 우정을 쌓고 있는 친구 이정국(51) 씨가 85년 당시 입대 영장을 받아 놓고 ‘해거름’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이다. 

“당시 해거름은 마산에서 최고 카페였죠. 카페 문화도 없던 시절인데 바텐더가 직접 만들어주는 칵테일 마시면서 듣고 싶은 음악도 신청 할 수 있는 고급문화 공간이었죠. 지금처럼 음악을 쉽게 접할 수도 없던 시절 친구가 일하는 곳에 종종 들린 것이 해거름과 인연의 시작이에요.”

그 후로 그와 친구는 사회생활을 하며 자신들 청춘의 문화가 녹아있는 곳을 떠나지 않았다. 약속의 장소, 회포의 마당, 고단한 삶에 무게를 잠시 내려놓는 곳으로 ‘해거름’을 택했고 CAFE DE SUNSET 또한 그와 친구 정국 씨를 단골손님이라는 호칭을 넘어 ‘해거름패밀리’라는 애칭으로 성골고객(?) 대우를 해 주었다. 

‘해거름’을 출입 한지 23년째 되던 2008년 단골인 고 씨와 동갑내기 친구 정국 씨에게 청천병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1980년 개업 이후 턴테이블 앞자리 지키며 신청음악을 전해주던 정의교 사장이 불의의 사고로 더는 ‘해거름’ 운영을 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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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굉무 카페 해거름 사장./김구연 기자

“친구 정국 이와 정 사장님 사고 며칠 후 해거름을 찾았는데 사모님(정의교 부인)께서 가게 정리를 하고 계셨어요. 그런데 대뜸 사모님이 사장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겠느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워낙 단골집이라 사장님 은퇴하면 저희가 해거름을 맡겠다는 말을 종종 했었는데 그것을 기억하고 계셨죠. 친구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저도 자영업을 하는 처지라 난감했죠. 인수 제안을 받은 날은 음악도 못 듣고 술만 마시며 아무런 말도 못했죠.”

‘해거름패밀리’의 고민은 일주일을 넘기지 않았다. 인수 제의를 받은 며칠 후 그는 친구 정국 씨와 함께 빈 점포가 즐비한 창동 골목을 걸었다. 전봇대 가로등은 20대에 시작해 30대를 거쳐 40대에도 친구와 함께 걷는 골목길을 환하게 밝혀주었고 불빛이 비추는 바닥에는 창동 활성화를 위해 상인회에서 제작한 창동 골목지도가 있었다. 

“지도에 수많은 가게 중에 해거름이 눈에 쏙 들어오더라고요. 운명이라고 여겼죠. 바로 사모님을 만나 친구와 공동으로 인수제안을 받아들였죠. 진정한 해거름 식구가 된 거죠. 아 저기 입구에 액자 보이죠. 초심을 잃지 말자고 인수를 결정하게 된 계기를 준 골목지도를 저기 보관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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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굉무 카페 해거름 사장./김구연 기자

20대 친구 따라가 40대 정착하다

마산에서 유년기와 학창시절을 보낸 40대 이상이라면 누구나 한 가지쯤 창동에 대한 추억이 있다. ‘해거름’에 추억을 삶의 터전으로 바꾼 고 씨에게는 다양한 경험이 그를 감싸고 있다. 

그는 구 마산시 반월동에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육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나 서울에서 대학에 다닌 4여 년을 빼곤 줄곧 고향에서 생활한 토박이다. 

그가 초등학교 시절 누나들이 연주하는 첼로 멜로디에 합창하던 기억과 클래식 LP레코드판을 함께 들었던 추억은 아직도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있다. 무난하게 학창시절을 보내고 대학 졸업 후 아버지가 운영하는 요업재료업을 도우며 사회에 첫 발을 디뎠다. 아버지가 은퇴하신 후에는 업종을 과감하게 변경하여 의류사업에 도전했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도우지 않았다면 지금의 제 모습도 없었을 거예요. 대학 졸업 당시 교수님 추천으로 조선회사에 입사를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에 마산으로 내려왔죠. 아마 그때 제 운명이 정해진 것일까요. 제가 해거름 지킴이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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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굉무 카페 해거름 사장./김구연 기자

그가 사업을 벌이며 여러 번 고비도 있었다. 아버지 일을 도우며 몇 번의 부도 위기도 넘겼다. 또 의류업을 하면서는 본격적인 괘도에 오르기 직전 IMF를 만났다. 그가 어려움을 극복하는 해결책은 간단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온 힘을 기울이자. 약간의 오기도 필요하죠. 찾아오는 어려움을 회피하면 더 곤란한 일이 닥치죠. 전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사업하며 가장 힘들었던 IMF시절인 1998년에 결혼을 했어요. 눈에 보이지 않은 책임감이 사업을 지켜주었죠. 물론 경남여성 최초로 백두대간을 종주한 강인한 아내가 큰 버팀목이 되었죠. 지금은 절대적인 후원자고요.”

친구 따라 ‘해거름’ 와서 정착한 고 씨는 35년 지기 정국 씨 자랑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아름다운 가게 운영위원장’, ‘경남여성장애인연대 후원회장’ 등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친구의 권유가 절대적이기 때문이었다.

은퇴는 3대 지킴이가 나타나면 

2010년은 ‘해거름’이 개업 한지 30년이 되던 해, 그가 친구 정국 씨와 공동으로 해거름 인수한 지 2년 만에 본업이었던 의류업을 정리했다. ‘해거름’에 전력을 쏟기 위해서였다. 인수 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8년간 ‘해거름’을 운영 했던 1대 정의교 사장의 그림자는 컸다. 사장이 바뀌었다고 발길을 돌린 손님, 서비스가 예전과 다르다며 불만을 표하는 손님 등 정 사장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1대 사장을 대신해 2대 지킴이인 제가 손님들에게 인정받기까지는 5년이 걸린 거 같아요. 손님이 오시면 그분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신청하지 않으셔도 틀어주는 해거름 고객 서비스가 특별하잖아요. 이 메모장이 손님들 취향과 음악을 기록해 둔 것에요. 그리고 인수받은 후 신청음악 용지는 한 장도 안 버리고 다 모아 두고 머릿속에 저장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사업자등록증에 술을 파는 유흥주점으로 신고 되었지만 해거름은 기억과 추억을 파는 곳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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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해거름 내 간판./김구연 기자

지난 간 추억 찾고 향수를 달래러 오는 단골손님 덕분에 가게 실내장식 증·개축은 꿈도 못 꾼다. 고 씨의 보수로 명맥을 유지하는 탁자 5개와 의자 30개는 개업 당시 그대로다. 2005년 소방법 때문에 천장을 보수 한 것 외에는 80년 11월 오픈 당시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또 해거름은 손님의 기증에 의해 세월의 흔적을 채워간다. 수제 진공관 앰프와 턴테이블 그리고 스피커는 열혈 해거름 패밀리의 손에서 탄생해 이곳으로 옮겨온 것. LP레코드판 기증도 심심치 않게 이루어진다. 그와 친구는 오시는 분 모두가 한마음으로 해거름을 아끼는 것에 작은 보답을 하고자 사장이라 호칭을 없애고 지킴이란 명칭을 사용한다.

“다 안 변한다 하여도 손님들 음악 취향은 변화하고 있습니다. 1대 사장님 운영할 때 없던 것이 바로 이 노트북이네요. LP, CD, 이어 MP3까지 그래도 ‘해거름’하면 음악이기에 인터넷을 통해 손님이 원하는 어떤 음악이든지 장르 불문, 국적 불문하고 들려드리려고 갖춘 시스템이죠. 요즘은 블로그다, 페이스북이다. 이런 것 때문에 ‘해거름’이 온라인에도 등장하고 20대 손님도 오고 있어요. 20대에서 70대까지 손님 연령층으론 최고의 카페라고 자부하죠.”

2대 지킴이 고굉무 씨는 ‘해거름’을 세대 간에 소통하는 문화공간으로 키우겠다고 했다. 그리고 ‘해거름’을 아끼고 보존하고 이을 지킴이가 올 때까지 자신은 음악을 틀겠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라. 해거름 공식 문 여는 시간은 7시 간판 불을 켜면서인데 벌써 40분이 지났네.” 

‘해거름’에서는 아날로그라는 골목에서 추억을 되새김질하다 보면 어느새 디지털로 가는 대로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아날로그 골목으로 들어서고…. 이곳에서의 시간은 회전목마를 탄 듯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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