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사람]할머니들에게 미술 수업하는 이은아 씨

"선생님, 이렇게 칠하면 됩니꺼?"

주름이 깊게 파인 손이 하얀 도화지 위에서 춤춘다.

창원시사회복지센터에서 펼쳐지는 풍경이다.

창원시 성산구 대방동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이은아(37) 씨는 한 달에 두 번, 금요일 오전 11시부터 낮 12시까지 인근에 있는 창원시사회복지센터에서 할머니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있다. 올해 초 우연히 창원지역 육아 인터넷 카페에 들어갔다 복지센터에서 미술 수업 봉사자를 구한다는 글을 보고 시작한 일이다.

첫날 수업은 굉장히 힘들었다고 한다.

할머니들은 "여든 평생 해본 적이 없는 일이다. 난 못해"라며 먼저 거부감을 드러냈다.

"할머니들은 5살 아이들과 닮은 점이 많아요. 그림을 그리는 형태나 느낌이 비슷해요. 관심 받고 싶어하는 것도 그렇고요. 하지만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요. 아이들은 처음 보는 것에 호기심을 느끼고 서로 해보려고 하는데 할머니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낯선 것에는 바로 '난 못해'라며 생각과 의지를 가둬버려요."

하지만 수업 횟수가 쌓일수록 할머니들은 그림 그리기를 재미있어하고 이 씨가 가르치는 대로 잘 따르게 됐단다. 요즘엔 다음 수업은 어떤 걸 준비해올지 기대하며 먼저 기다린다고 한다.

가끔 왜 이렇게 힘든 것을 가져와서 날 못살게 구느냐고 투정부리는 할머니가 있으면 옆에서 "선생님이 정성껏 준비해 왔는데 너도 열심히 해야지"라며 핀잔을 주는 광경도 벌어진단다. 그럴 때면 이 씨도 스스로 허투루 하면 안 되겠다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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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시사회복지센터에서 미술 수업을 받고 있는 할머니./강해중 기자

이 씨가 가르치는 할머니는 20명 안팎이다. 최고령자가 82세. 평균 75세다. 이 씨는 자신이 살아온 세월의 두 배나 오래 산 노인들을 가르치는 입장이지만 그들에게서 배우는 점도 많다.

"할머니들이 '내가 이렇게 오래 살아서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아'라며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여든 살이 됐을 때도 즐겁게 배울 수 있을까. 내가 못하는 분야, 악기나 외국어를 배우라고 하면 저 할머니들처럼 열의 있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돼요. 배움에 대해 항상 감사해 하세요. 대단한 할머니들이죠."

할머니들이 수업 시간에 그린 작품을 손자에게 자랑하며 뿌듯해하는 모습을 보며 행복을 느끼는 이 씨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이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처음 할머니들을 만났을 때 의심 섞인 눈빛을 봤어요. 봉사하러 오는 분들이 자주 바뀌니까 이 선생은 얼마나 있다가 갈까 하고 심드렁하더군요. 제가 복지센터를 다닌 동안에도 한글 강사만 여러 번 바뀌었거든요. 할머니들에게 믿음을 주고 싶어요. 제가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정도의 수고로움이라서 할머니들과 오래 함께하고 싶어요."

앞서 언급했듯이 이 씨는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학생들은 4, 5세부터 초등학교 6학년생까지 있다. 그의 학원은 일반적인 입시미술학원과는 달리 샌드 드로잉(Sand Drawing·모래 그림) 등 놀이미술·창의미술 위주로 하고 있다. 10여 년 전 교습소를 운영하던 때부터 생각한 일을 조금 무리해서 실행했다. 미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아이와 함께 그림을 그려나가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영어나 수학 학원은 수업이 일방적이잖아요. 선생님이 가르치고 학생은 필기하고. 미술학원은 달라요. 미술은 마음속에 있는 말을 밖으로 끌어내는 매개체예요.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선생님과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그러면서 속마음을 드러내기도 해요. 해답을 원하는 건 아니에요.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안심시켜 주길 바라는 거죠."

그런 이 씨의 마음이 통했는지 학원 아이들은 이 씨를 잘 따른다. 장래 희망이 '미술학원 원장 선생님'이라는 아이가 있을 정도다.

"아이들과 오랫동안 함께했는데 이 일이 지겹거나 지친다기보다 할수록 재미있어요. 아이란 존재만으로도 항상 새롭고 즐겁잖아요. 더 나이가 들어도 아이들이 편안하게 다가설 수 있고 어울릴 수 있는 지치지 않는 선생이 되고 싶어요."

지금까지 해오던 그대로 하고 싶다는 것이 소박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 먹은 마음을 변함없이 이어간다는 건 대다수 사람에게는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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