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는 현대미술에 대한 감상이 자신의 주관적 견해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이것(그림)이 말을 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작품이 직접 말을 건네 왔다는 것이다.

아마도 예술에 대한 현대인의 지적 콤플렉스는 이렇게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현대미술은 불친절했다. 아무것도 재현해주지 않으면서 설명은 늘 부족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작품을 뒤적거리면서 마치 탐정처럼 그 뒤에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루뻬'(확대경)를 들이댄다.

과거 이집트인들은 그들이 '알았던 것'을 그렸고,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본 것'을 그렸다. 중세 미술가들은 그들이 '느낀 것'을 그림 속에 표현했다.

이때 그림 읽기는 화자 의도를 염두에 두고 그가 무슨 마음에서 저렇게 그렸을까 생각하면서 이미지를 감상했다. 즉 이미지를 읽으면 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그림에서 읽을거리가 사라지고 칸딘스키나 몬드리안에 이르러 마침내 그림에서 형태와 색채가 분리되고 해체되었다.

이렇게 내용을 알아보기 어려운 그림들은 주변 대상을 있는 그대로 화면에 그리는 일을 포기했다.

선이나 색과 같은 순수 조형요소로서 화면을 구축하거나 작가의 주관적 감성을 표현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작품 속에는 흐트러진 색이나 선이 전부였다. 때로는 잘 나열되어 있는 색면과 같은 순수 조형요소들뿐이었다.

사람들은 왜 이걸 예술이라고 부를까?

이제 미술은 작가가 만든 공식을 풀 줄 아는 사람에게만 그 세계를 보여주게 되었다.

프랑스의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는 바로 이 부분을 참을 수 없어 했다. 하나의 해석은 다른 해석으로 확장되고 다른 해석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른 진리를 열어줄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데리다가 강조하는 것은 예술 작품이 열어주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다.

해석자와 만남 속에서 다양한 시각을 끊임없이 생성해내는 미적 창의력. 바로 거기에 예술 작품의 진리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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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수용법은 작품을 보는 사람을 제한하고 있다.

즉 상상력이 빈약하거나 규칙에 얽매이는 사람들,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무현(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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