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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릉에 가려진 김해 가야의 보물들

[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5) 김해시

김훤주 기자 pole@idomin.com 2014년 07월 16일 수요일

◇'코트디부아르'와 '금관가야'

아프리카대륙 중서부에 '코트디부아르(Cote d'ivoire)'라는 나라가 있다. 오랫동안 프랑스 식민지였다가 1960년 독립했다. 식민지 시절 쓰던 지역 이름을 독립한 뒤에도 정식 국명으로 쓰고 있다. 코트디부아르는 프랑스 말로 '상아해안'이라는 뜻인데 영어로는 아이보리 코스트(Ivory Coast)라 한다. 아프리카에는 상아해안 말고도 황금해안·노예해안 따위가 있다.

식민지 시절 이전부터 유럽 사람들이 아프리카에서 황금을 빼앗고 노예로 사로잡아 실어나르면서 유럽 사람들이 붙인 이름들이다. 유럽 사람 관점에서 본, 아프리카 사람에게는 오히려 치욕스러운 이런 명칭을 코트디부아르 사람들은 자기네 나라 이름으로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금관가야'는 어떨까? 김해 지역에 있었던 가야 세력이 스스로 '금관'이라고 했을까? '금관(金官)' 또는 '금관국'은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 나온다. '금관국 수로왕', '금관국주 김구해(金仇亥)' 같은 표현이 있고 '김해소경(金海小京)' 항목에서는 "옛날 금관국, 가락국(駕洛國)이라고도 하고 가야(伽耶)라고도 한다"고 했다. 이어 "532년 구해왕이 백성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해 그 땅을 금관군(金官郡)으로 삼았다"고 적었다.

<삼국유사>는 다르다. 일연은 고려 문종 시절 금관주 장관을 지낸 한 문인이 쓴 <가락국기>를 간추려 실으면서 "서기 42년 (수로왕이) 임금 자리에 오르며 나라를 대가락이라 하고 또 가야라고도 일컬었다"고 했다. 또 고려 태조 왕건 시절인 940년에 "다섯 가야의 이름을 고치니 첫째가 금관"이라 하고 스스로 주를 달아 해당 지역을 '김해부(金海府)'라 했다.

구지봉 고인돌. 구지봉석이라고 한자가 적혀 있다.

수로왕의 나라는 가락 또는 가야였다. 신라가 정복하면서 금관군·금관소경으로 바뀌었고 '금관가야'라는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이 지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이를 따라 가락국을 금관국이라 했다고 보면 그르지 않다. 금관가야는 말하자면 수로왕은 몰랐던 국명이다. 신라는 지금 김해를 왜 금관이라 했을까? 뚜렷한 기록은 있지 않지만, '쇠(金)를 관리한다'는 정복자의 의지가 담겼다는 얘기가 그럴 듯하게 여겨진다. 쇠는 가락국의 중요 산물 가운데 하나였다. 이렇게 보면 코트디부아르나 금관가야나 크게 다르지 않다.

◇가락국 옛터와 분성산

분성산은 해발 382m로 높지 않지만 여기 서면 김해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서남쪽으로 서낙동강이 아련히 보이고 그리로 흘러드는 조만강, 그리고 조만강과 합류하는 해반천(海伴川)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모습도 보인다. 해반천을 따라서는 수로왕비릉(허황후릉), 구지봉과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 고분군과 대성동고분박물관, 수릉원·김해민속박물관·수로왕릉, 봉황동유적공원이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잇달아 나온다.

말하자면 이렇다. (서)낙동강은 옛적 바다였다. 해반천은 그 바다와 직접 만났는데 이는 봉황동유적으로 남았다. 그 일부인 회현리 조개더미에서는 갖은 조개껍데기와 함께 토기·짐승뼈·뿔도구·석기·가락바퀴·불탄쌀·화천(貨泉=기원전 14년 만들어진 중국 화폐) 따위가 나왔다. 또 해반천 바로 옆 습지에서는 가야시대 선박 부재와 노, 접안시설·목책·토성, 움집·높은 마루 건물(高床建物)·망루 자리 등이 확인됐다. 가야시대 항만시설이 동시대 주거시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이렇게 남서쪽 평지와 해안에서는 사람이 살면서 교역을 했다면 그 북서쪽은 무덤 자리였다.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 사이에 대성동 고분군을 비롯한 여러 떼무덤이 있다. 지금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중국제 청동솥·청동거울, 호랑이·말 모양 띠, 바람개비 모양 방패 꾸미개 등 엄청난 유물이 나왔고 더불어 남녀 인골도 나왔다. 산 사람을 위한 양택(陽宅)과 죽은 이를 위한 음택(陰宅)이 뚜렷하게 나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가락국 옛터가 내려다보이는 분성산은 그 자체로 유물 덩어리이기도 하다. 먼저 분산성. 길이가 900m가량인데 남쪽 바위가 험한 데는 쌓지 않고 동~북~서쪽에 걸쳐 있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성벽은 분산성의 굴곡을 따라 이리저리 미끈한 곡선을 그려보인다. 여태까지 조사 결과를 따르면 통일신라시대 처음 쌓은 뒤 고려 말기 김해부사로 왔던 박위 장군이 왜구 침략을 막기 위해 고쳐 쌓았다.

지금 분성산과 산성이 주는 장쾌함은 그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려 선비 정몽주는 산성기에서 "옛 산성을 고쳐 넓고 크게 쌓았다. 돌을 포개 굳게 하고, 산세도 높였다. 성을 다 쌓은 뒤에 밑에서 올려보니, 천 길 깎아지른 기세가 한 사람만 시켜 지켜도 만 명이 당할 수 없겠다"고 했다. 김해 가락국 옛터 어디서나 보이는 분산성은 지금도 그런 느낌을 준다.

분산성은 조선 고종 흥선대원군 시절 한 번 더 손질을 받았다. 세계적으로는 이미 화포가 발달해 산성이 소중한 존재는 아니었으나 1871년 김해부사 정현석은 다시 고쳐 쌓았다. 산마루 봉수대 아래 바위 만장대(萬丈臺)는 대원군이 내린 별칭이었는데 "하늘은 만장대를 내었고(天生萬丈臺/ 나는 천년수를 심노라(我植千年樹)" 하는 호방한 한시도 함께 새겨져 있다.

충의각도 있다. 부사 정현석은 성을 고쳐 쌓은 해에 정국군박공위축성사적비와 흥선대원군 만세불망비를 새겨 여기에 세웠다. 부사통정대부정현석영세불망비도 있는데 1874년에 세워진 것이다. 만장대(萬丈臺)는 타고봉(打鼓峰)이라고도 한다. <김해읍지>는 "왜구가 쳐들어오면 북(鼓)을 쳐서(打) 백성들로 하여금 분산성으로 들어오도록 했다"고 적고 있다.

둥글게 돌로 표시한 김해율하유적전시관 일대 묘역 자리. 보존 상태가 열악하지만 다른 곳 유적들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다.

◇국내 하나뿐인 항만 유적과 솟대 자리

봉황대 일대에서 나름 확인됐던 옛적 항구 유적은 관동리에서 더욱 뚜렷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지금은 내륙이 됐지만 2000년 전에는 바다와 붙은 갯벌 지대였던 장유면 율하리 율하신도시 조성 사업지의 동북쪽 끄트머리다.

선착장 구실을 했던 뜬다리(棧橋) 자리와 여기에서 싣고 부리고 했던 물건을 실어날랐을 배후도로까지 창고건물 자리와 함께 발견됐다. 길은 양쪽에 물빠짐을 위한 도랑도 끼고 있었고 바닥은 돌을 깐 위에 진흙도 다져 만들었다. 가야시대 도로와 별도로 조선시대 도로도 확인됐는데, 그 단단한 정도는 가야시대 것이 더 나아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항구 유적이지만 아직 어떤 문화재로도 지정을 받지 못한 상태다. 바로 옆에 상가 건물을 짓는 공사가 한창인데 '관동유적모형관'은 갈수록 초라해지고 있다.

복원한 관동리 가야시대 선착장.

솟대 자리가 유일하게 확인된 율하리유적도 관동리유적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있다. 사방을 아파트 단지가 둘러싼 가운데 '김해율하유적공원'으로 조그맣게 남았다. 솟대 자리에다가는 새로 솟대를 만들어 꽂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덩그마니 비워놓은 구멍에 애꿎은 흙들이 들어가 메우고 있다. 이래서야 그냥 돌덩이 몇몇일 뿐 범상한 생활공간(집터)과 신성한 신들의 영역(무덤)을 갈라주는 구실을 했던 솟대 자리로는 알아보지 못하겠다. 차라리 둘레 흩어져 있는 고인돌들이 더 잘 가꿔져 있다.

율하리 유적 솟대 자리. 유적 자리인지 알아보기 어렵다.

율하리유적은 하나 더 있다. 이 또한 찬밥신세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범위도 너르고 다른 건물 공사로 쪼그라들지는 않는다. 김해율하유적전시관이 있는 일대다. 크고작은 고인돌이 그야말로 엄청나게 많이 있다. 대부분 둘레에는 둥글게 또는 네모지게 돌들을 에워 꽂아 묘역을 이뤘고 아래에 있는 무덤은 매우 여러 가지가 확인됐다. 김해율하유적전시관 일대는 그래도 유물이 아니라 사람 처지에서 보자면 잘 가꿔져 있다. 나름 특징이 뚜렷한 이런 고인돌 유적지를 잔디 깔리고 나무 들어선 가운데 손쉽게 드나들 수 있다는 점은 무척 좋다.

관동리 솟대 자리는, 아파트로 가득찬 둘레 분위기가 좀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거기 서면 삶과 죽음을 가르는 자리에다 새를 뜻하는 솟대를 세워놓고 그것을 통해 하늘 또는 무한과 이어지기를 빌었던 옛적 사람들 처연함이 눈에 밟힌다. 또 율하리 옛적 선착장 자리에서는 이를테면 가락국 특산물인 쇠(鐵)를 덩이 지어 내어나가는 장면이 그려지기도 한다. 아니면 허황후 신행길에 가져왔다는 한사잡물(漢肆雜物:다른 나라의 그럴 듯한 여러 물건) 같은 수입품이 저기 들어오는 돛단배에 실려 있을 수도 있겠고….

◇구지봉과 수로왕릉의 지나친 대표성

지금껏 김해 문화유산은 적어도 대중 차원에서 보자면 구지봉과 수로왕릉·수로왕비릉이 지나치게 많이 대표해 왔지 싶다. 이런 탓에 김해의 다른 빛나는 문화유산이 꺾이거나 죽어지내는 측면도 있었다. 물론 단순히 문화유산으로만 그치지 않고 관광(산업)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자치단체의 처지도 고려해야 마땅하겠지만 말이다. 다른 나라 고대 항구 유적지에서 보존·활용하는 방안을 배우고 김해시가지 유적과 분성산 그리고 율하리·관동리 유적 등을 연관짓는다면 김해 문화유산은 좀더 체계를 갖출 수 있을 테고 사람들 관심도 좀더 많이 끌 수 있을 것 같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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