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람은 어디로 가는가.”
영화 <바람이 머무는 곳, 히말라야>(2009)에서 주인공 최민식이 설산을 바라보며 이렇게 묻는다. 설산을 마주하고 서보니 그 말이 뭔지 알겠다. 바람은 산 너머에서 불어와 산 너머로 간다. 하지만 ‘산 너머’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여기, 바람이 분다. 그것뿐이다. 그것이 바람이므로 무채색 건물 위에 걸린 저 오색의 깃발이 펄럭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시, 바람이 분다. 그 바람 속으로 걸어간다.

이곳은 네팔 북중부 산속 작은 마을 자카트(해발 1300m). 히말라야에서의 첫 밤이다. 새벽 두 시, 문득 잠이 깬다. 낯선 환경인 데다가 긴장을 한 탓이리라. 공기가 아주 건조하다. 목이 마르다. 방안인데도 침낭 밖은 바깥처럼 춥다. 그냥 침낭에 웅크려 날이 새기를 기다린다.

햇볕 아래 드러난 웅장한 눈 풍경./이서후 기자

이른 아침 고즈넉한 마을 풍경 위로 연기가 솟아오른다. 이곳 주민들이 네팔식 아궁이에 불들을 지피고 있을 거였다. 아궁이 위에 낡고 커다란 주전자에는 뜨거운 물이 한가득, 하지만 그 물 한잔을 얻으려 해도 돈을 내야 한다. 물질 문명은 여기 히말라야 산속까지 이런 방식으로 들어와 있다.

짐을 챙기고 떠날 준비를 한다. 잠이 덜 깬 숙소 주인집 아이를 흐드러지게 안아 준다. 길은 강을 따라 나 있다. 마르샹디라 불리는 강이다. 석회질이 녹아서 그랬다던가, 강은 우유를 섞은 듯 희뿌연 빛. 강 쪽은 여지없이 낭떠러지다.

아래를 내려다보려 강 쪽으로 가까이 가자 다른 일행이 고용한 포터(짐꾼)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한다. 슈퍼맨처럼 날아다닐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지 마요.

우리가 걷는 곳은 까마득한 낭떠러지 그 허리를 스윽 베어 만든 도로다. 강 건너편으로 이전에 사람이 다니던 고즈넉한 오솔길이 그대로 남아있다. 거친 도로 위로 지프가 드문드문 다닌다. 이곳 사람들의 유일한 대중교통. 하지만 길은 오롯이 외길이다. 차 한 대라도 고장 나 멈추면 그날은 종일 길이 막힌다.

고도가 높지 않아서인지 초목이 푸르다. 저 멀리 까마득한 거리에 설산이 조그맣게 숨어있다. 산길은 경사가 완만하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걷는다. 강이 넓어진다 싶더니 강변으로 그림 같은 마을이 나타난다. 히말라야를 찾는 여행자들이 꼭 하루를 묵는다는 마을, 딸(해발 1700m)이다. 딸은 네팔어로 호수라는 뜻이다.

산허리를 에돌아 가는 도로./이서후 기자

마을 초입에 있는 아주 긴 구름다리를 건넌다. 다른 길이 있지만, 왠지 건너보고 싶다. 제법 출렁거리긴 하지만 생각보다 튼튼하다. 강변에서 일꾼들이 모래로 벽돌을 만들고 있다. 일하는 품새는 어설픈데 만들어진 벽돌은 가지런하다. 저만치 드러난 강바닥을 따라 소녀 둘이 나뭇짐을 지고 간다. 강은 넓고 산은 높아 소녀들의 모습이 더욱 까마득하다.

점심을 먹고 식당 마당에서 해를 쬔다. 설산이 한층 가까워졌다. 아까 말을 붙였던 포터가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는다. 이름을 묻자 자신을 ‘미스터 림부’라고 부르란다. 림부는 성이다. 히말라야 산속의 여러 부족은 부족의 이름이 곧 그 사람의 성이다. 그러니까 그는 림부족 사람이다.

림부는 포터 경력만 20년이 넘는다고 했다. 우리 나이로 41세, 철이 들면서 바로 포터를 시작했다. 그는 항상 침착하고 여유로웠다. 그리고 산더미 같은 짐을 짊어지고도 우리 중 누구보다 빨리 걸었다.

다시 길을 나선다. 마을을 빠져나가는 데 우, 하고 바람이 분다. 바람은 거칠게 강바닥을 훑고 지나간다. 검은 개 한 마리가 아까부터 우릴 따르고 있다. 딸 마을에 있던 개다. 우릴 따라온다기보다는 안내한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천연덕스럽고 익숙한 걸음이 그렇다. 검은 개는 징검다리 앞에 이르러서야 작별 인사를 한다.

희뿌연 마르샹디강./이서후 기자

두 시간을 더 걸어 다라빠니(해발 1900m)에 도착한다. 오늘 묵을 마을이다. 숙소는 2층 벽돌 건물이다. 왠지 느낌이 스산하다. 우리는 식당에 옹기종기 모여 불을 쬔다. 그게 아니고서는 이 밤, 어둠과 추위를 견디기 힘들다.

이튿날. 추운 아침이다. 하늘이 참 맑다. 하여 차갑게 아름다운 아침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대기, 그 아래 선명한 설산을 보며 오늘도 길을 나선다. 길 정면으로 멀리 람중 히말(해발 6983m)이 나타난다. 그 뒤로 안나푸르나 2봉(해발 7937m)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진다. 길 뒤편으로는 마나줄루(해발 8156m)가 가만히 우리를 건너다보고 있다.

가파른 산길, 숨이 가쁘다. 머리가 살짝 아픈 걸 보니 약한 고산증이 온 것 같다. 뒤돌아보니 마나줄루 정상에 눈보라가 피어오르고 있다. 봉우리 근처에 바람이 거세다는 뜻이다. 5000m급 이상의 설산은 눈 덮힌 봉우리와 침엽수림의 경계가 분명하다. 그 경계가 바로 수목한계선(대략 해발 3000m)일 거다.

강변에 그림 같이 들어선 마을 '딸'./이서후 기자

산길을 걷다 아이들을 만난다. 손이 조막만 하고 얼굴이 새카맣다. 아이들은 산속을 헤매며 땔감 나무를 모으고 있다. 해가 가까워 그럴까, 공기가 깨끗해서 그럴까, 히말라야의 햇볕은 유난히 따갑다. 아이들의 얼굴도 오늘 하루만큼 더 까매질 것이다. 저 조그만 손들이 조금 더 커질 즈음엔 남자아이들은 포터로 나서고, 여자아이들은 도시로 나가 돈을 벌 것이다. 맑은 아이들의 눈망울이 길을 걷는 우리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고도가 2100m를 넘자 약한 두통이 계속된다. 확실히 고소 증세가 시작된 듯하다. 오늘 묵을 차메(해발 2670m)란 마을까지 한참 더 남았지만, 어쨌거나 지금 내 생애 최고 고도를 넘어섰다. 가파른 산길의 끝에서 탄촉(해발 2400m) 마을이 나타난다. 아기자기한 골목과 정답고 소박한 집들이 맘에 든다.

산허리를 길게 에돌자 차메 마을이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몸부터 씻는다. 온수 시설이 없어 돈을 주고 뜨거운 물을 한 양동이 산다. 더운물을 몸에 끼얹는다. 하지만 차가운 공기에 금세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급하게 샤워를 끝내고 나오는 길, 문득 뒤돌아보니 마나줄루가 석양에 빛나고 있다. 설산에 비친 노을은 온통 분홍이다.

나뭇짐을 지고 가는 '딸' 마을 소녀들./이서후 기자

밤새 태풍 같은 바람 소리에 잠을 설쳤다. 창으로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들어온다. 밖을 내다보니 눈이 내리고 있다. 눈발이 가는 모래처럼 자잘하다. 몹시 추운 눈이다. 아마도 오늘은 고난의 행군이 될 것 같다.

날이 완전히 밝으면서 눈바람이 거세진다. 창틀을 뒤흔드는 소리가 무섭다. 문득 숙소 식당 창밖을 내다보니 건너편 집 지붕 위로 붉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마오이스트(네팔 공산당)를 뜻하는 낫과 망치가 선명하다. 게릴라전, 테러, 왕정 폐지 등 네팔의 현대사가 이 깃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배낭을 메고 숙소를 나서는데 입구에 말 몇 마리가 묶여 있다. 일꾼들이 바삐 움직이는 걸 보니 말에다 물건을 실어갈 모양이다. 어느 정도 고도까지 도로가 열렸지만 험한 산길에 말은 여전히 중요한 운송수단인 모양이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벌써 허기가 진다. 아침으로 먹은 국수가 부족했나 보다. 지도상으로 다음 마을까지는 아직도 두 시간이나 남았다. 다행히 찻집을 만난다. 내부가 조잡하지만, 장작불이나마 잠시 쬐는 게 큰 위안이 된다.

여행자를 배웅하는 '딸' 마을 검은 개./이서후 기자

눈이 좀 잦아들자 다시 출발. 까마득한 벼랑마다 눈이 촘촘히 쌓였다. 눈구름이 짙어 멀리 있는 산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잠깐 해가 나온다. 순간 온 세상이 눈부시게 웅장해진다. 그 모습에 나는 넋을 잃는다. 이건 이 세상에 없는 풍경이다. 그 풍경 앞에 내가 서 있다.

긴 오르막을 오르니 바로 두쿠레 포카리(해발 3060m) 마을. 이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그러는 사이 눈발은 다시 거세진다. 아무리 봐도 잔잔해질 기세가 아니다. 결국, 눈보라 속으로 길을 나선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에 갇힌 것처럼 사방이 온통 눈발이다.

어느 계곡을 지나는데 눈보라가 정면으로 몰아친다. 이를 악물고 버틴다. 그러다가 어라, 이건 굉장한 경험이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 히말라야의 지독한 눈보라 한가운데라니,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나는 몽유병 같은 기분으로 걷는다.

눈보라가 계속 거칠어 결국 가려던 위 피상(해발 3300m) 마을을 포기하고 아래 피상(해발 3200m) 마을로 향한다. 다행히 멋진 숙소를 하나 찾았다. 주인이 친절히 난로를 지핀다. 우리 일행은 너나없이 난롯가에 둘러앉아 웅크린다.

마나줄루./이서후 기자

눈보라 소리는 밤까지 이어진다. 늦은 밤, 졸다 지친 주인이 인제 그만 자라고 눈치를 주자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다. 벽이 있어 바람이 불지 않을 뿐 방이나 바깥이나 온도 차이가 크지 않다.

침낭 속으로 파고든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정복자 마냥 산을 이렇게 마구 헤집고 들어와도 괜찮은가. 그저 악착같이 걸어오기만 한 건 아닌가. 설산 앞에서 더욱 겸손하고 경건해야 하지 않을까.

내일은 다시 해가 떴으면 좋겠다.

눈보라 치는 산길./이서후 기자

 

모닥불이 있는 찻집./이서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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