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오백리] (3) 함양군 서상면 구평교~서하면 서하교

구평교를 지나면서 강폭은 한층 넓어졌다. 바짝 엎드려 강바닥을 헤집는 사람 몇이 눈에 띈다. "날이 꾸무럭하거나 비가 흩뿌릴 때 다슬기가 더 많이 나온다"며, 봉정마을 아지매는 다시 허리를 수그렸다. 유역은 온통 억새로 번져 초록 천지다.

서상로를 타고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진입로를 슬쩍 지나치니 옥당교가 금방이다.

"진주 마산에서 전주에 갈라모는 여기를 지나야 했제. 길은 꼬불꼬불해도 옛날에는 전부 이쪽으로 다녔어. 인자는 도로를 넓히면서 저쪽으로 에둘러가지만 더 빨라졌다데. 요즘도 5톤 트럭이나 덤프트럭 같은 짐차들이 마이 다녀. 제일 빠린께네."

옥당교 건너 가르내길에서 만난 한 주민은 서상로가 옛 국도 26호선이었으며,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다니던 옛 길을 포장한 거라고 말했다. 옥당교 위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니 물길 끝에는 백운산이 아득하게 서 있다.

거연정은 눈 앞의 비경을 바라보다 못해 아예 '물과 바위와 어울려 지내보자' 한다.

◇꽃부리징터에 징소리가 사라졌구나

'함양징터'. 강물도 서상로도 살짝 굽어드는 곳이라 지나치기 쉬운 곳이었다. '징터'라는 말이 낯설다. 비문 앞뒤 옆을 꼼꼼히 살펴보지 않으면 '함양장터'라고 읽기 쉽다.

예전에 이곳에서 악기 중 징을 만들었다 한다. 제법 큰 비석이다. 2001년에 비를 세웠지만 주변 조성이 되지 않은데다가 딱히 관리도 되지 않은 듯했다.

징은 농악놀이 중 빠질 수 없는 악기다. 농악기 중 '바람소리'라 하며, 소리가 가장 멀리까지 울리는 악기라 한다. 또 여러 소리를 아우르는 기운을 가진 악기라 집에 징을 걸어두면 잡음 없이 늘 화평하다 하여 집집마다 하나씩은 있었다. 징은 노동과 놀이가 따로이지 않았던 시절 그만큼 가까웠다는 뜻이다.

함양징은 해방 이후 전국에서 제일 알아주는 징이었다 한다. 함양군에 따르면 함양 방짜 징(꽃부리징)의 명장 오덕수가 1947년 이곳 서상면 꽃부리(또는 꽃뿌리)에서 징점을 열고 1978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0여 년 동안 징을 제작했다.

해방 이후 전국 최고의 징을 만들던 함양군 서상면 꽃 부리에 있는 함양징터.

당시 이곳 꽃부리는 물론 서하면 송계리, 봉전리, 안의면 석천리 등에 수십 채의 징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거창에서 '두부자공방'을 하고 있는 경남무형문화재 제14호 이용구 대정이(징 작업의 최고 기술자를 이르는 말)도 이곳 오덕수 명장으로부터 배웠다 한다.

이곳 일대에서 징점이 사라지게 된 것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였다 한다. 당시 유신정권은 '농악놀이는 근대화에 맞지 않는 향락적인 문화'라며 규제를 했고, 놀이를 못하니 자연스레 징, 꽹과리 등 악기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이곳 징점들이 없어진 이유다.

그런데, 당시 첩첩골짜기 안에 어떻게 징점이 수십 채 들어섰을까. 여기에는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가 보태어진다. 징은 삼수가 합하는 곳에서 만들어야 하는데, 세 갈래 물소리가 서로 아우르며 하나의 물소리를 이루듯 징도 여러 악기를 아우르는 소리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 서상면 꽃부리는 남강 본류와 추상천, 부전계곡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합해지는 곳이다.

함양군은 지난해 이곳 꽃부리에다 함양징터를 본격적으로 복원하고 이어나갈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옛 사람 즐기던 곳엔 발길 끊이지 않고

남강 물길은 천지소리를 아우르는 '꽃부리징'의 긴 울림을 담고 30리 밖 서하면 화림동으로 흐른다. 사람을 불러 모으는 땅, 역사에 기록할 만한 사람을 낳는, 특별한 땅이 있긴 하다. 남강 물길이 낳은 화림동을 두고 오가는 말이다.

화림동을 얘기하자면 먼저 '안의삼동'을 빠뜨릴 수 없다. 함양군지에 따르면 '안의삼동'은 옛 안의현에서 천하절경으로 손꼽은 화림동, 용추계곡의 심진동, 수승대가 있는 원학동을 일컫는다. 1914년 일제 행정 개편에 따라 화림동과 심진동은 함양군 안의면으로, 원학동은 거창군 위천면으로 속하게 된다. '안의삼동' 중 남강 본류를 끼고 있는 곳은 화림동이다.

조선 말기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수많은 정자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7개의 정자가 있다. 문화재로 등록된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이 있고, 지은 지 수십 년이 채 되지 않는 영귀정, 경모정, 람천정이 있다. 여기에다 2003년 화재로 소실했지만 농월정터가 더한다.

화림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곳은 서하면 봉전마을 앞이다.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봉전교로 들어서면 기암괴석과 소나무 몇 그루를 배경으로 강 한가운데 자리한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조선 중기 화림재 전시서(1601~?)가 은둔하던 곳을 1872년 후손이 재건한 거연정(경남 유형문화재 제433호)이다.

거연정은 눈앞의 비경을 바라보다 못해 아예 '물과 바위와 어울려 지내보자' 한다. 대부분의 정자가 물가에 자리 잡고 한 발 떨어져 경치를 보는 것과는 달리 거연정은 물길이 두 갈래로 나뉘면서 만들어놓은 작은 섬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작은 구름다리가 있어 건너가지만 옛적에는 어찌 건넜는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구름다리 아래는 물길이 제법 깊은 소가 시퍼렇게 일렁이기 때문이다.

거연정 옆에는 일두 정여창(1450~1504)을 추모하는 군자정(경남문화재자료 제380호)이 있다. 군자정은 너럭바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얼핏 봐도 반듯하고 격이 느껴진다. 다만 가까이 식당과 회관이 들어서 있어 정자의 품위를 느낄 만한 여유로움이 없는 게 흠이다.

군자정은 일두 정여창을 추모하는 정자로 너럭바위에 자리잡고 있다.

7월 초 장맛비가 흩뿌리고 있는 가운데 봉전교 위에 서서 위로 물길을 거슬러 봐도, 아래로 물길이 흘러가는 곳을 내려다봐도 사방이 그저 운무에 떠오르는 산수화 한 폭이다. 강물과 제각각의 바위가 빚어놓은 경치 앞에서 정작 감탄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한다.

거연정과 군자정을 둘러보고 다시 강을 따라 1km 정도 내려오면 동호정(경남문화재자료 제381호)이다. 이곳은 임진란 때 선조를 업고 피신했다는 동호 장만리를 추모하는 정자이다. 때마침 동호정에는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 빗속에 드러난 산과 물과 바위를 보고 있다.

"저렇게 큰 너럭바위가 한 덩어리라니 눈으로 보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네요. '해를 가릴 만한 바위'라더니…. 넉넉하게 사람을 불러들이고 품어주는 것 같잖아요. 강물도 그렇고."

정호용(67·충북 청주시) 씨는 비는 오고 관광버스 예약은 취소하기 그렇고, 머뭇대며 겨우 나선 걸음이었는데 오히려 맑은 날보다 운치는 더하다고 말했다.

◇어쩌랴, 저 물길이 예사롭지 않음을…

함양군은 2006년 강 이쪽과 저쪽을 이어, 약 10㎞가 되는 '선비문화탐방로'를 만들어 놓았다. 탐방로 전 구간은 안의면 강가 오리숲에서 거연정까지 이어지는 '누정산책로'라 말해도 좋을 만하다. 강둑을 따라 가다가 낮은 돌다리를 건너기도 하고, 나무데크를 걷다가 징검다리를 건너 강 한가운데 놓인 너럭바위에 앉아 도시락을 먹을 수도 있다. 어느 길에서든 산과 물과 바위가 빚어놓은 경치를 즐기기엔 아낌이 없다. 게다가 옛 사람들이 가졌던 여유와 멋까지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슬며시 엉뚱한 곳으로 생각이 미친다.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화림동 정자에서 음풍농월 하고 세상을 논할 때 이들의 술과 밥과 옷은 누가 해다 바쳤을까 싶다. 화림동 경치라면 이고지고 걷는 길도 '즐거운 노역'이었을까. 아주 잠시 생각이 끓어 넘쳐, 화림동 선비문화에서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백성들의 삶을 미루어 짐작해본다.

   

눈앞 물길은 기세도 좋게 서하교를 향해 흘러가고, 장맛비에 불어난 강물은 이미 누런 황토 빛이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안의현을 떠나며 애틋해하던 '저 녹수는'이 아니다.

※이 기획은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한국수자원공사가 후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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