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4) 통합창원시 옛 창원지역

◇창원은 누가 뭐래도 공업도시

창원이라는 지명은 조선 초기인 1408년 처음 등장한다. 의창현과 회원현을 합쳐 의창의 창(昌)과 회원의 원(原)을 따 창원이라 이르고 부(府)로 승격했다. 의창은 통합 창원시 옛 창원이고 회원은 옛 마산이라 보면 대체로 맞다. 1415년 도호부로 높아졌다가 1601년에 임진왜란 당시 창원읍성은 함락됐지만 민·관·군이 한 사람도 왜적에게 투항하지 않았다 해서 대도호부까지 올랐다. 그 뒤로도 오르내림이 있었지만 창원 지명은 줄곧 유지됐다.(1910년 경술국치로 창원부가 마산부로 이름을 갈았지만 4년 뒤 창원군으로 돌아왔다.)

창원 역사가 오래됐음을 일러주는 지표는 이 밖에도 여럿이다.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동읍 산남리 합산조개무지가 있고 청동기시대는 성산패총 최하층, 남산 환호취락유적, 상남동 일대 고인돌들, 가음정동 일대 유적, 덕천리 등 동읍 일대 고인돌들 등이 있다. 철기시대는 다호리 고분군과 성산패총 야철지 유적에 더해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포상팔국 가운데 하나인 골포국으로 옛 마산과 더불어 옛 창원이 나온다. <일본서기>에는 탁순국(卓淳國)도 나오는데 나중에 신라 땅이 되면서 굴자군(屈自郡)이 됐다.

그런데 역사가 오래인데도 옛 창원에는 문화재가 지나치게 적다. 2009년 통합 이전 창원시가 펴낸 <창원 600년사 제2권: 창원의 오늘 그리고 내일>을 보면 모두 31개고 2011년 12월 새로 보물로 지정된 성주사의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감로왕도·몽산화상육도보설(감로왕도는 경상남도지정문화재였다가 보물로 승격)을 더해도 33개로 경남에서 가장 적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진주·양산 220개, 합천 156개, 밀양 141개, 창녕 108개, 함양 106개, 산청 94개, 남해 90개, 거창 84개, 하동 79개, 고성 70개, 김해 69개, 의령 63개, 통영·함안 60개, 사천 47개, 거제 44개가 올라 있다.(옛 마산·진해는 제외)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1974년 4월 옛 창원 43㎢가 산업기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뒤로 제대로 보전하지 못한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도 살아 남은 옛 창원 고인돌들의 큰 덩치나 뚜렷한 특징에 비춰보면 자취도 없이 사라진 문화재들이 더욱 아깝다.

성산패총 야철지 유적과 유물 전시관은 역설적 입증이다. 지금이면 개발 지역 전체를 시굴·발굴하지만 당시는 죄다 밀어버렸다.

지난달 30일 창원시 성산구 외동 성산패총 야철지 일원에서 열린 제4회 창원 시민의 날 기념 야철제 모습. 부싯돌로 불씨를 채화하고 장인이 쇳물을 헌납하는 과정을 재현하는 야철제례를 지내고 있다. /김구연 기자

그런데도 성산패총은 살아남았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현장을 찾았을 때 '성산패총 아래층에서 나온 야철지 유적을 창원기계공단의 상징으로 삼으면 적합하겠다'는 건의를 받아들인 때문이다. 발굴 책임자는 보존을 위해 밤낮 궁리한 끝에 쇠를 다루는 기계산업과 쇠를 생산한 야철지를 연관지어 냈던 것이다.

성산패총유물전시관 2층 뒤편에서는 LG전자 창원 1·2공장 등 공단 전체가 한 눈에 그윽하게 들어온다. 요즘은 아파트 택지를 하나 개발해도 갖은 유물이 쏟아지고 전시관·유적공원이 들어선다. 창원공단 개발 면적 43㎢는 1300만 평이 넘는 크기다. 70년대 박정희 정권 때는 이렇게 넓은 땅을 뒤집으면서도 전시관조차 하나밖에 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창원공단 자체가 20세기말을 상징하는 유물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덕천리 지석묘와 다호리고분군

덕천리지석묘와 다호리고분군은 각각 기원전 3세기와 기원전 1세기 즈음 만들어졌다. 옻칠 관련 유물은 덕천리와 다호리 모두에서 출토됐다. 덕천리서는 옻칠그릇 조각, 다호리서는 옻칠 칼손잡이와 옻칠잔 조각이 나왔다. 덕천리 옻칠그릇 조각은 우리나라 옻칠의 시작이 외래기술에 있지 않음을 보여줬다. 1988년 다호리에서 옻칠 유물이 나왔을 때 중국 화폐 오수전도 나왔음을 들어 고조선 멸망 이후 설치된 낙랑군을 통해 중국 옻칠 기술이 들어온 결과였을 개연성이 제기됐었다. 하지만 낙랑군 설치 이전에 만들어진 덕천리에서 옻칠그릇 조각이 나오면서 그런 제기는 쏙 들어갔다. 다호리서는 붓과 부채와 긁개도 나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확인되는 문자 생활의 증거물이다.

덕천리지석묘.

덕천리지석묘는 동읍 육군종합정비창 안에 있다. 1993년 발굴 당시는 고인돌이 35t으로 우리나라서 가장 컸었다. 지금은 김해·마산 진동 등지서도 발견되지만, 고인돌을 둘러싼 묘역이 처음 확인되기도 했다. 어지간한 운동장만한데, 간단히 말하면 바위를 촘촘하고 나란히 박아 영역을 표시했으며 넓을수록 묻힌 사람의 권력은 세었다. 지금은 경남 남해안 고인돌의 특징으로 받아들여진다. 나주 등 전라도 고인돌에서는 이런 영역 표시가 없고 반면 장식물이 많이 나온다. 이를테면 권력·지위의 표현이 영남서는 영역 넓이였고 호남서는 장식물 개수였다. 그 뒤 이런 차이가 경상도 사람 권력지향과 전라도 사람 풍류·예술성의 바탕을 이룬다는 짐작이 그럴듯하게 나돌고 있다.

둘레보다 조금 봉긋한 언덕 가운데 덕천리지석묘는 올라앉아 있다. 옆에 알처럼 동그란 바위도 있는데, 다산·풍요를 바라는 주술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옻칠그릇 조각 말고는 동검·돌칼·돌화살촉·구슬·토기 조각이 나왔다. 토기 조각에는 볍씨 자국이 있어 벼농사를 지었음을 알려준다.

반면 다호리 고분군은 발굴했던 주남저수지 들머리에 가도 몇몇 표지만 있을 뿐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유물만 수습하고 다시 묻었기 때문이다. 유물은 국립김해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창원시는 다호리고분군전시관을 짓는 계획을 2006년 세웠으나 아직 짓지는 못했다.

◇창원읍성과 창원향교

1477년 완공됐는데 <성종실록>은 둘레 4410자에 높이가 12자 7치라 했다. 객사와 동헌, 사대문 문루와 북쪽 수문에 세운 시유루, 남쪽 모난 연못과 거기 세운 사미정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객사 자리에는 장터가, 동헌 자리에는 학교가 들어섰다. 북쪽 공북문은 1905년 경전선 철도로 헐렸다고 알려졌었으나 최근 발견된 마산선 창원교 기념사진에서 북성벽은 당시 온전했음이 확인됐다. 2011년 발굴서는 땅 속에 묻혀 있던 북쪽 성벽 일부를 찾아냈지만 창원시는 다시 묻었다. 문화재는 바깥으로부터도 망가지지만 우리가 망치기도 한다.

창원향교는 옛 마산 합성동에서 1748년 지금 자리로 옮겨졌다. 지금으로 치면 공립 중·고등학교다. 공부공간 명륜당을 앞에 낮게 두고 제사공간 대성전을 뒤에 높게 뒀다. 대성전 오르는 계단은 가파른 상승감이 어지러울 정도다. 당장 공부도 중요하지만 높은 가르침을 베푼 성현 헤아리기가 더 소중하다는 공간 배치다.

문은 삼문인데 가운데는 영혼이 드나들고 사람은 양쪽 문만 써야 한다. 오른쪽은 드는 동문이고 왼쪽은 나오는 서문이다. 문루 이름 풍화루는 백성들 풍속을 교화한다는 뜻이다. 정문을 드높게 짓고 앞에 홍살문까지 둔 뜻은 일반 사람들 조심시키는 데 있었다. 학생들 공부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하라는 뜻도 들어 있었겠다.

◇하동엔 차나무, 창원엔 단감나무

옛 창원은 공업단지지만 농업도시라 해도 모자람은 없다. 옛 창원인 의창구와 성산구 제조업체 종사자가 2만4611명과 7만8253명(합하면 10만2864명)으로 많지만(2012년 현재, 창원시 통계) 농업 인구도 3만6236명과 1만8484명(합하면 5만4720명)으로 절대 적지 않다.(2013년 8월 현재, 창원시농업기술센터 통계)

더욱이 단감은 2635가구가 2010ha에 재배해 해마다 전국 최대 40만t을 생산한다. 전국 생산량의 17%가량이 되는데 이 가운데 옛 창원의 생산량이 90%를 넘는다. 창원단감보다 명성이 앞서는 진영단감의 김해시(1355가구 1365ha)보다 훨씬 많다. 창원이 진영에 밀린 까닭은 창원단감이 옛적에는 철도 교통의 요지였던 진영을 통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이 작용했다. 지역 특산물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창원을 일부러 내세우지는 않아 그냥 진영에 묻혔다. 창원이 공업도시 이미지를 굳힌 뒤에는 "공장 많은 창원에서 무슨 특산물이 나겠느냐?"는 지레짐작도 창원단감에는 장애가 됐다.

창원 북면 단감을 수확하는 모습.

옛 창원 북면 마산리 연동마을 일대는 우리나라 단감 시배지로 꼽힌다. 물론 김해 진영 신용리에 '1927년 단감나무를 처음 식재한 곳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단감나무 60여 그루가 재배되고 있는 단감의 첫 재배지'라는 안내문이 있기는 하다.

이에 대해 창원 북면사무소는 '(북면 단감 시배는) 1900년대로 추정된다'고 적고 있다. 연동마을서 단감을 키우는 하희종(1956년 출생) 씨는 할아버지 대에 단감 농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가서 보니 둥치가 사람 허리만큼 굵은 단감나무가 적어도 열 그루는 됐다. 30~50년 자라도 단감나무는 허벅지 굵기밖에 안 된다는데 이 정도 자라려면 100살은 실히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동은 창원이 보기로 삼을 만하다. 화개면 정금리 산74번지에 2006년 1월 경상남도기념물 제264호로 지정된 차나무가 있다. 100살 남짓인데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굵고 큰 차나무'다. 어떻게 이리 지정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니 연동마을 단감나무도 그럴 자격을 갖추지 않았나 여겨진다. 지역 특산물을 생산하는 가장 오래된 나무라는 점도 그렇고 지역 특산물을 홍보하는 좋은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주남저수지 일대

주남·동판·산남저수지 셋으로 이뤄진 주남저수지 일대가 먼 옛날에는 바다였고 가까운 옛날에는 저습지였다. 땅과 물을 활용하기 위해 가두면서 저수지가 됐고 덕분에 둘레는 논·밭이 됐다. 지금도 여기 논과 밭은 사이사이 부들·갈대·억새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전형적인 습지다. 다호리 고분군의 철기문화 사람들도 여기 습지와 낙동강을 삶의 바탕으로 삼았었다.

주남돌다리.

다른 유적도 있다. 주천강(주남저수지와 낙동강을 이음) 시작 지점에 주남돌다리가 있고 신방초교 옆에 음나무 무리(천연기념물 제164호)가 있다. 주남돌다리는 자연암석을 다릿발과 판석으로 썼는데 주변 풍경과 잘 어울린다. 음나무는 삿됨을 쫓고 잡귀를 막는 주술 효과가 있다고 한다. 신방리 앞까지 물이 들던 옛날 그 물길로 문물이 오갈 때 섞여들기 마련인 나쁜 기운을 막는 구실을 음나무들이 했다는 얘기다.

2009년 4월에는 창원향토자료전시관도 자리잡았다. 옛날 음반과 교복·풍금, 선거 포스터와 전화기·휴대전화·삐삐까지 갖은 물건이 나와 있다. 문화재라면 으레 오래 묵은 것이려니 하는 통념을 깨주는 재미있는 민간 전시관이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