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만 매립, 그 20년간의 기록] (2) 마산바다 사람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마산만에서 멸치잡이를 했다는 말을 들었다.

"어허야~어허야" "으라차~으라차."

"오이야~오이야" "오사야~오사야."

그때 배 두 척이 그물을 연결해 쌍끌이로 멸치를 잡으면서 불렀던 구령이다.

"멸치 잡는데 배가 다섯 척이 붙어. 큰 배 두 척은 그물을 싸고, 반대쪽에서 또 한 척이 멸치를 몰아넣는기라. 그물을 땡길 때 양쪽 배에서 대여섯 명씩 선두 앞소리 따라 구령을 붙였어."

◇어민 2000여 명의 생업 터전

이야기를 맨 처음 전한 이가 가포동 5통 옛 한국철강 뒤에 사는 가포어촌계 김옥준(69) 씨였다. 그는 서항부두에서 율구미(MBC송신소 소재)에 가린 가포신항 쪽을 가리켰다.

가포어촌계 김옥준 씨 주름살에서 마산만을 생업 터전으로 삼았던 35년 역사가 읽힌다. 서항부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 씨 뒤로 해양신도시 매립지가 보인다. /이일균 기자

"지금은 가포어촌계 회원이 32명밖에 안돼. 가포유원지 매립하기 전인 10년 전에는 70명을 넘었어. 그때는 매일같이 (조업)나갔는데 지금은 일주일에 한두번 아이가. 다들 자기 배로 조업을 했지만 두 척이 쌍끌이도 했지. 대구 전어 노래미 도다리를 주로 잡았지. 가포 쪽에서는 갯장어나 가재도 잡고…. 옛날에는 마산 바다서 멸치도 안 잡았나. 이(마산만) 안에만 멸치 막(덕장)이 서너 군데 있었다. 지금도 가포에서 덕동 넘어가는 중간에 날개라꼬 거 가면 멸치 막이 안 있나."

"내가 가포유원지서 뽀드(보트)도 안 했나. 내 별명이 '코보'아이가. 인기가 좋았지. (보트임대를)깨끗하이 했거든. 가포신항? 헛일한 거 아이가. 거 들어올 배가 오데 있노. 전부 부산(신항) 다 가는데. 돈만 쳐 부 가꼬. 우리(어촌계 회원들과 가포유원지 내 주민·상인들)야 그때 잘 털고 일어섰지 뭐. 보상받을 거 받고. 묵고 살아야 될 거 아이가 사람이."

마산만에서도 얼마 전까지 쌍끌이 멸치잡이 조업이 진행됐다. 사진은 진해만 쪽 쌍끌이 멸치잡이 작업. /기선권현망수협

그의 지론은 '묵고 사는 기 최고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말했다.

"공사 때문에 마산 바다는 다 안 배릿나. 마산 바다는 25년 전에 이미 '죽은 바다'라꼬 선고를 받았다. 부경대 수산연구소에서 그랬지. 저(마산만 입구) 등대섬에서 저쪽 귀산 창원부두 쪽으로 물이 들고, 나갈 때는 돝섬 안쪽 신마산 쪽으로 본래 나가거든. 그런데 그때 연구소에서 우끼(부이)로 실험을 해보니까 이기 안 나가는 기라. 물이 다 안 빠진다는 거 아이가. 그러니까 여름 돼봐라. 물이 벌거이 디비진다 아이가. 플랑크톤이 과잉상태에서 썩는기지. 거기 늦가을이나 초겨울쯤 되면 북풍 따라서 씻기나가는 긴데, 사람들은 뭣도 모르고 물 마이 깨끗해짔다 안 카나. 거기 다 등대섬 옆에 소모도에서 해군기지 쪽으로 제방공사를 해놔서 안 그렇나. 한쪽 물길이 완저이 막힌 기지. 콧구멍 한쪽이 막힜는데 숨을 제대로 쉬겠나."

해군은 1990년대 초반 소모도 방파제 조성 등 매립공사를 진행했다. 이 공사 영향으로 마산만·진해만 어민들이 조업에 결정적 영향을 입었다는 점은 2007년 7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이 해군이 총 37억 원의 어업피해 보상금을 당시 마창어민피해대책위 소속 200여 명의 어민들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함으로써 증명됐다.

시선을 돌려 해양신도시 매립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김옥준 씨.

그에게 마산만은 어떤 의미일까.

"뭐긴 뭐라. 생계 아이가. 서른다섯 때 가포동에 들어간 이후로 우리 집은 바다에 지대가(의지해) 살았다."

◇항운노조 조합원에 상인들까지

마산만 멸치잡이에 대해서는 구산면 원전 사는 어민 박영재(60·전 마창어민피해보상대책위 위원장) 씨가 또 훤했다.

박영재 마창어민피해대책위 전 위원장.

"멸치야 저 안쪽 마산만이나 바깥쪽 여기 진해만이나 주 어종 아니었슴미꺼. 도다리나 장어, 갈치 이런 거 하고. 지금도 심리에는 멸치막이 네 군데나 있어요. 노동요요? 뭐 따른 기 있나. 선두가 '어허야'하먼 어부들이 '어라차'하고 또 옆쪽 배에서 '오이야~ 오이야'하면 또 이쪽 배가 '오사야~오사야' 이런 식이지."

"요즘은 홍합양식이 99%지예. 저쪽 덕동만 안쪽은 미더덕 양식이 많고. 홍합은 여서 대한민국 생산량 70%를 한다니까. 우리 어민들 입장에서야 마산만이고 진해만이고 뭐 따로 있나? 전부 다 4대 5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생업터전이지. 그런 어민이 마산수협에만 22개 어촌계에 2000명 이상 있어요."

"인간들이 계속 이 바다에다 손을 대는 게 문제예요. 신항이니 거가대교니 하면서…. 가만히 놔두면 바다는 다 지가 알아서 돌아요. 조류라는 게 있잖아. 다 지가 알아서 정화를 시키거든. 좀 있다 9월부터 이 앞에 부도수도를 준설한다 아임니꺼. 근데 준설할 항로 안에 피조개니 키조개니 패류가 엄청나게 들어있거든. 이걸 그대로 준설해서 저 마산 앞바다에 투기하먼 깔따구 문제가 심각할 걸로. 그래서 이걸 채취해야 된다 캤더니 5월에 보름 시간 주데. 그거가 되나?"

이들이 고기를 잡는 방법으로 마산만에 의지해 산다면, 정영곤(65) 씨 같은 항운노조 조합원들은 330명 넘게 마산항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다. 수산물이나 농산물 하역을 담당하는 형태와 가동 중인 마산항 3~5부두에서 화물 하역을 맡는 일로 크게 구분된다. 그중 정영곤 씨는 마산수협 어판장에서 수산물 하역을 35년 이상 해오다가 지난 3월 은퇴했다.

"제대하고 스물여섯에 들어왔어요. 1975년이었지. 그때는 어판장이 지금 수협은행(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 합포로 변) 자리에 있었지요. 92년에 지금 자리(창원시 마산합포구 수산1길 186)로 옮겼지만. 하역일이라는 게 정해진 시간이나 물량이 없어요. 그때그때 다르지. 어쨌든 100t 안팎의 고깃배가 들어오면 보통 1000상자씩 어창에서 끌어올리고, 하역하고 선별하고, 새벽 5시 반(지금은 6시)에 경매가 끝나면 결복하고 했지."

"나는 하역파트였는데 (은퇴 직전에)13명이서 했어. 최고 잘 될 때(1990년대)는 67명까지 있었지. 그때는 연매출이 1100억, 1200억 그랬어. 갈치 조기가 주 어종이었지. 지금은 삼치고. 전라도 소흑산도나 더 멀리 동지나해에서 왔지."

"요즘 사정? 자꾸 줄지. 어판장 사정이나 저쪽 화물부두 사정이나 다 똑같애. 가포신항? 어차피 정해진 마산항 물동량을 갈라묵는 것밖에 더 되겠소."

마산 바다를 생업의 터전으로 삼는 이들이 어디 이뿐인가.

250년 역사에 전체 면적 19만㎡로 전국 최대 규모의 마산어시장만 해도 1200여개 점포에 700여 개 노점 상인들이 각각의 업에 맞게 새벽부터 심야까지 생업에 종사한다. 해안도로 건너편 바닷가 쪽 횟집이나 장어집 등과 복국거리 쪽 식당가는 또 어떤가.

그래서 마산 바다를 그냥 '가고파의 바다'로 부르는 건 맹숭맹숭하다. 그곳엔 어시장 대풍골목 횟집 도마 위에 살아 펄떡거리는 활어처럼 생동감이 있다. 단칼에 도마 위 생선 모가지를 따버리는 아줌마처럼 생업을 일구는 단호함이 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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