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僧)이 되려 했던 소년 경남교육 수장이 되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 경남도지사 선거에 비해 교육감 선거는 표를 열기 전까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선거 이전에 나온 여론조사는 그에게 모두 불리했다. 선거일이 가까워지면서 지지율이 가파르게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세 후보 중 꼴찌라는 순위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막상 표를 열자 역시 지방선거에서 여론조사는 엉터리이며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통쾌하게 입증했다. 박종훈(1960년생) 경남도교육감 이야기다.

그는 1960년 2월 26일(음)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양촌리 대정마을에서 아버지 박정규(1915~1995) 씨와 어머니 최갑남(1923~2008) 씨 사이에서 8남매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양촌초등학교에 다닐 땐 한 번도 1등과 반장을 놓쳐 보지 않은 똑똑한 아이였고, 경쟁심과 승부의식이 지나쳐 친구들로부터 집단 보이콧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마산고등학교에 다닐 때 사찰(寺刹)의 분위기에 심취해 공부는 뒷전으로 두고 전국의 절을 찾아다녔다. 3학년 때는 성적이 떨어져 ‘열등반’으로 편입되자 충격을 받은 그는 부모와 형제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중(僧)이 되기 위해 산사(山寺)로 잠적했다. 깊은 산 속 토굴에서 수련을 하던 그는 꿈속에 어머니가 나타나자 결국 출가를 포기하고 하산했다.

그렇게 중이 되려던 소년은 32년이 흘러 경남 교육을 책임지는 수장이 되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피플파워>가 그의 삶을 기록했다.

박종훈 경남도 교육감./김구연 기자

3․15와 4․19 사이에 태어난 아이

-아버지 고향은 진전면 여양리이고, 교육감 님 고향은 돼지 주물럭으로 유명한 대정마을이죠?

“네. 동네 입구에 양촌식육식당이라고 유명한 식당이 있는데, 그 옆에 큰 느티나무가 있어요. 거기 지금은 길이 되어 있는 그 자리가 우리 집이었습니다. 양촌식육식당과 나란히 길쭉한 집이었는데, 우리 집만 잘려서 길이 되었죠.”

-이력서에는 양촌초등학교와 마산중학교를 나온 걸로 되어 있는데, 혹 여항중학교도 좀 다니셨나요? 동문회 이름으로 당선 축하 플래카드가 붙어 있던데….

“네. 입학해서 약 석 달 정도 다니다가 마산중학교로 전학을 갔죠.”

-마산으로 온 건 일종의 유학이었던 셈이네요?

“유학이기도 하고, 지금으로 치면 위장전입이기도 하죠. (함께 웃음) 형들과 누나가 마산에서 자취를 하면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 자취방으로 주소를 옮기고 전학을 시킨 거죠.”

-여항중학교에 대한 추억도 조금은 있겠네요?

“양촌초교와 여향초교, 두 학교 졸업생들만 고스란히 가는 학교가 여항중학교였거든요. 그래서 3개월만 다녔지만 잘 알죠.”

-여항중학교는 2회가 되는 거죠? 양촌초교는 25회고?

“그렇죠. 개교 후 1년 지난 신설 중학교여서 학교 화단도 우리가 리어카 끌고 돌을 주워가지고 와서 조성했어요. 그런데 10여년 지난 뒤 가보니까 그 돌을 다 들어내고 시멘트로 화단을 바꿨더라고요. 얼마나 보기 싫었는지…. 그 예쁜 자연석을 빼버리고….”

-모교인 양촌초등학교는 폐교되었는데, 그걸 보면 마음이 좀 안 좋겠네요.

“그 당시 진전면 안에 초등학교가 여섯 개였는데, 진전초등학교 하나만 남기고 모두 정리해버렸거든요. 아쉽지만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 그나마 양촌초등학교는 마산아트센터라는 예술촌으로 운영되면서 운동장에 잔디도 잘 관리되고 있고, 제대로 보존을 하고 있더군요. 방치되고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서 가끔씩 가봅니다. 다행이죠.”

박종훈 경남도 교육감./김구연 기자

-생일이 음력 2월 26일이라고 ‘추정’한다는데, 무슨 말씀입니까? 실제로도 생일을 그날로 하고 있나요?

“그게 정확하지 않은 게, 제가 8남매 중 일곱 번째거든요. 부모님이 아이 생일도 다 외워야 하고, 또 우리가 5대 종손이다 보니 제사가 많았어요. 그 때는 기록하는 문화가 아니다 보니 제 생일이 헛갈린 거죠. 역산을 해서 추정해보니 삼월 삼짓날 어미 닭이 품고 있던 유정란 스무 개 모두에서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왔답니다. 보통은 품고 있는 알 중에 몇 개는 실패하는 게 나오는데, 고스란히 병아리로 나온 거죠. 그래서 경사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그 날이 내가 태어난 지 첫 이레 되는 날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음력 2월 26일이 된겁니다.”

-그러면 거의 정확하겠는데요?

“그렇죠. 틀려도 하루 이틀 정도겠죠. 그런데, 이걸 양력으로 환산해보니 1960년 3․15의거와 4․19혁명 사이더라고요.”

양촌초등학교 졸업식. 뒤에서 두 번째 줄에서 왼쪽 첫 번 마산중학교 졸업식. 꽃다발을 들고 있는 이가 박종훈 학 째가 박종훈 학생.

-비판의식과 기질을 타고 났군요.(웃음)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을 때,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마치 국상이 난 듯이 울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고등학교 때 우리 반에 이성철이라는 친구와 둘이 숨어서 ‘이제 독재자가 죽었으니 민주주의가 되겠다’며 기뻐했어요. 그게 태어난 시기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웃음) 물론 그 전에 형의 공책 뒷 표지에 ‘유신만이 살 길이다’는 홍보문구가 인쇄되어 있었는데, 형이 거기에 동그라미를 치고 ‘박군의 총통화, 제1정책’이라고 써놓은 걸 봤어요. 형도 아마 그런 기질이 있었나 봐요. 그런 데서 영향을 받기도 했겠죠.”

시골이지만 부잣집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주류도매업을 하셨다던데, 그러면 집이 부자였겠는데요?

“우리 동네가 그 때 딱 95가구였는데, 매년 연말 전후하여 서열을 정했어요. 그 때 우리 집이 대체로 3위더라고요. 1위는 방앗간도 하고 담배 가게도 하던 잘 사는 집이 있었는데, 그 집 사위가 전두환 대통령 경호실장도 하고 국회의원도 했던 정동호였어요. 2위는 논이 60마지기 이상 되는 대농이었죠. 우리 집은 논이나 땅 같은 부동산은 많지 않았지만 장사를 해서 3위가 되었던 것 같아요. 항상 집에는 무학소주가 300상자씩 있었으니까. 석유와 경유 등 기름도 취급했고, 소금도 팔았고, 시멘트도 팔았어요. 한참 새마을운동할 땐 슬레이트와 못도 팔고, 과자도 팔고, 심지어 버스표도 팔았으니까. 그리고 우리 집이 관장했던 주류도매업의 범위가 마산 쪽으로는 진동면, 진주 쪽으로는 사봉 삼거리까지, 고성 쪽으로는 배둔까지였어요. 4개 시․군 7~8개 면에 소주, 청주, 맥주를 공급했죠.”

-그러면 아버지가 언제 마산으로 나오신 건가요?

“제가 대학 2학년 올라갈 때 큰형이 경남대학교 교수로 오셨죠. 그 때 장사를 정리하고 나오셨죠. 장사도 나이가 드니까 젊은 사람에게 밀리더군요. 그런데 제가 <베니스의 개성상인>을 읽으면서 느낀 건데, 아버지도 ‘작은 개성상인’ 정도는 되었던 것 같아요. 항상 남들은 하지 않는 새로운 아이템을 돈을 벌고, 이후 경쟁자가 따라붙으면 또 다른 업종으로 바꾸고…. 그런 쪽으로 참 탁월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10남매 중 큰 아들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할아버지가 공부를 안 시켜서 그렇지 공부를 하셨다면 크게 성공하셨을 수도 있죠. 그런 상황에서도 아들 4형제를 모두 박사학위까지 시켰으니까 농사만 지어서는 그게 불가능했겠죠.”

누나들에게 지금도 미안한 까닭

박종훈 교육감은 8남매 중 일곱째다. 위로 누나 4명과 형 2명이 있고, 아래에 남동생이 하나 있다. 남자 형제 4명은 모두 박사학위를 받았다. 큰 형(종근, 1952년생)은 서울대 공과대학을 나와 경남대 교수를 하고 있고, 둘째 형(종갑, 1954년생)은 영남대 국문학과를 나와 역시 영남대 교수를 하고 있다. 남동생(종승, 1964년생)은 미국 미네소타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미국의 관련 업체에 근무하고 있다. 형제 모두가 학자이자 교육자 집안이 된 셈인데, 여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장사를 정리하면서 재산도 좀 남겼을텐데….

“저는 우리 집이 부자인줄 알았는데, 처분하고 마산으로 오니까 스무 평짜리 연립주택 전세 얻을 돈밖에 안 되더라고요.”

-자식 교육에 돈을 다 써버려서 그런 건가요?

“그렇기도 하고, 무형의 자산이 전혀 인정이 안 된 거죠. 예를 들어 거래처라든지 그런 것도 재산인데, 그런 것에 대한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거죠.”

-그리고 마산에 나오신 후 시조창을 하셨다더군요.

“네. 그렇게 해서 나오셨는데, 장사를 할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두커니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죠. 그 때부터 시조창을 하시더니 국창부 1등까지 하셨어요. 명인부가 대학 격이고, 국창부가 대학원 격인데, 양산 삽량문화제에서 1등을 하셨죠. 평생을 택시 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전국 시조대회를 다니면서도 항상 통일호 기차만 타고 다녔죠. 새벽에 마산역에서 내려 구암동까지 걸어오시고….”

마산중학교 졸업식. 꽃다발을 들고 있는 이가 박종훈 학 째가 박종훈 학생. 생. 오른쪽 두루마기 차림은 아버지 박정규 씨.

-돈을 벌긴 하셨지만 근검절약이 몸에 배였군요.

“당신을 위해서는 전혀 돈을 쓰지 않으셨죠. 그러지 않고는 자식들 공부를 시킬 수가 없었으니까. 그 대신 제 바로 위 누나는 독창, 노래를 엄청 잘했어요. 계명대와 경남대 콩쿠르에서 1등도 하고 도내 고등학생 학예대회에서도 1등 하고, 그래서 음악대학을 가고 싶어했지만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네가 대학을 가면 동생 둘이가 공부를 못하게 된다’며 보내주지 않았죠. 아들 선호사상이 아주 강했죠.”

-그 누나에게 아무 미안한 마음이 있겠군요.

“미안하죠. 그나마 다행인 게 누나가 50이 넘어서 숭실대학교 실용음악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래서 음악을 지금도 계속하시나요?

“작년에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독창회를 한 번 했습니다. 관객은 내가 모아주고….(웃음) 나 때문에 누나가 대학을 못 갔다는 그 짐에서 벗어나게 해줘서 참 고맙죠.”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8남매 중 제가 다섯째인데, 제 위에 네 분이 누나거든요.

“네. 큰 누나와 둘째 누나는 초등학교밖에 못나왔고, 셋째 누나는 중학교, 넷째 누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죠.”

박종훈 경남도 교육감./김구연 기자

아버지의 죽음, 당선 직후 떠올린 아버지

<박종훈, 도서관에서 길을 나서다>(2009, 도서출판 삼덕)라는 책에 보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 보일러가 잘 안 된다는 아버지 전화를 받고 일요일 오전에 가서 고쳐드린다고 한 게 오히려 고장을 내버렸다는 것이다. 그날 아버지는 시조회관에서 비를 맞으며 돌아왔고, 가벼운 감기 증세가 있었는데 보일러마저 고장을 냈으니 밤새 추위에 떨다가 감기가 폐렴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박 교육감은 노인이 감기가 들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당시엔 몰랐다. 병원으로 옮겼으나 아버지는 이틀 후인 화요일 새벽 돌아가셨다. 이 죄책감 때문에 박 교육감은 3년 동안 생선회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생선회를 좋아하셨던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문성고 교사 시절이었죠?

“아버지가 81세로, 제 나이 서른다섯에 돌아가셨는데, 저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생각에 많이 힘들었어요.”

-아버지가 자신을 돌보지는 않았지만, 자식들을 보고 대리만족을 많이 느꼈을 것 같은데요.

“제가 박사학위를 한 계기도 아버지 권유 때문이었죠. 저는 교사 하면서 박사까진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 제 동생이 박사학위를 먼저 받았거든요. 그 때 아버지가 ‘동생도 학위가 있는데 너만 없으면 되겠냐’고 하여 시작하게 됐죠.”

-결과적으로 형제들이 모두 교육자 집안이 되었네요.

“아마도 아버지의 바람이 교사나 교수가 되는 것이어서 자연스럽게 그리 된 것 같네요.”

-이번에 당선됐을 때도 아버지가 많이 떠올랐겠습니다.

“예. 그랬죠. 그래서 당선증 받고 형제들이 다 모여서 아버지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렸어요. 산소가 진전면 둔덕마을에 있습니다. 여양리 민간인학살 터 위에 군북면으로 넘어가는 곳에….”

-책에서 보니까 부인(변화선, 1962년생)은 손문숙이라는 후배가 주선한 미팅 자리에서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던데, 그러면 문성고 교사로 발령나자마자 만나서 1984년 바로 그해 결혼하신 건가요?

“결혼은 95년 2월이었죠. 음력으로는 설 전이었으니까 84년이라 했지만…. 문성고에 84년 3월 발령 받고, 85년 2월에 결혼했으니 1년도 안 된 거죠.”

-미팅은 언제 했던 건가요?

“결혼 한 달 전이죠.”(웃음)

박종훈 경남도 교육감./김구연 기자

-어떻게 그렇게 속전속결로? 보는 순간 꽂혔나요?

“(웃음) 그런 개념보다 제가 그 때 마산의 큰 형 댁에 얹혀살았는데, 아파트 한 채에 아버지, 형님 내외, 사촌 동생 한 명, 그리고 저까지 이렇게 가족이 많은 속에서 저라도 빨리 독립하고 나와야 형수님에 대한 도리라 생각했죠.”

-그래도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한다는 것은 빠르지 않나요?

“저는 그 때 결혼관이 이리저리 재고 따지고 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차츰차츰 만들어나가고 이루어나가는 것이 재미라고 생각했죠. 돈은 없고 결혼은 해야겠고, 그래서 지금 서울서 교사를 하고 있는 가장 친한 친구 어머니를 찾아갔어요. 그 때 방 두 칸에 부엌 하나 달린 전세가 300만 원이었는데, 그걸 좀 빌려달라고 했어요. 그게 적은 돈이 아니었던 게 그 때 제 월급이 30만 원 정도였거든요. 흔쾌히 빌려 주시더라고요. 그렇게 결혼했죠. 신혼여행도 못가고, 남들 다 하는 비디오 촬영도 못했죠.”

-첫 신혼살림을 어디서?

“마산 구암동 한전 옆에 보면 주택가가 좀 있습니다. 거기서 시작했죠.”

-부인은 그 때 어느 학교 교사였나요?

“결혼하고 6개월 뒤 거제 하청면에 있는 거제종고(현 경남산업고) 가정과 교사로 첫 발령이 났죠.”

-그러면 곧바로 주말부부가 된 거네요?

“신혼 6개월 만에 주말부부 2년을 했죠.”

-군대는 왜 안 갔나요?

“대학에서 교련도 잘 받았고 병영훈련도 받았고 다 잘했는데 그렇게 됐네요. 신체검사를 대학 4학년 때 받았는데, 그 때 마침 징집연령이 21세에서 20세로 낮춰졌는지, 20세에서 19세로 낮춰졌는지 그랬어요. 그러다보니 자원이 두 배로 많아져버렸잖아요. 그래서 웬만하면 징집대상에서 빠졌나 봐요. 제 큰형이 체중 미달로 신체검사를 1년마다 세 번째 받고 방위근무를 섰거든요. 그런데 저는 한 번 만에 바로 ‘징집면제’라 하더라고요.”

-특별히 몸에 이상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그런 건 없었는데 몸무게가 45kg밖에 안 됐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랄까.”

-지금은 얼마나 됩니까?

“55kg. 많이 나갈 땐 57kg까지 나갔는데 선거 치른다고 고생을 해서 그런지 어제 재보니까 55kg이네요.”

-지금도 참 작은 거네요. 키가 몇인데요?

“169cm, 보통은 170이라 하는데….(웃음) 몸무게 60kg쯤 되어보면 소원이 없겠는데…. 우리 형제 중 작은 형과 내 동생은 할아버지를 닮아서 체격이 좀 있고, 큰 형과 저는 어머니를 닮아서 좀 왜소한 편이죠.”

박종훈 경남도 교육감./김구연 기자

아들이 고액 과외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딸 선영(1986년생)이와 아들 지호(1989년생)는 다 컸죠?

“선영이는 조금 전 통화를 했더니 지금 둘째 아이 낳는다고 병원 가는 중이라고 하네요. 이화여대 대학원 석사까지 마치고 서울 키스트(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 있었는데, 결혼하면서 사위 되는 친구가 한국남동발전에 있는데, 아이부터 둘 낳아 빨리 키워놓고 공부를 계속하면 도와주겠다 그렇게 자기들끼리 합의가 되었겠죠. 그래서 사표를 내고 지금은 전업주부인데, 큰 아이(아들)가 만 두 돌 됐고, 작은 아이가 곧 태어날 것 같네요.”

-아들 지호는요?

“지호는 어릴 때 참 애를 많이 먹였는데, 중학교 때 싸움을 해서 내가 물어준 돈만 해도 제법 되고, 그 때 내가 교육위원 할 때였는데, 결과적으로는 교육위원 활동으로 아이에게 관심을 쏟을 시간이 적어서 오히려 나았던 것 같아요. 그러지 않고 내가 교사로 있으면서 매일 저녁에 아이에게 간섭을 했다면 더 빗나갔을 수도 있죠. 그러다가 고등학교 3학년 딱 올라가면서 ‘이제 공부 좀 해야죠’하면서 휴대폰도 반납하고 공부를 하더라고요. 아이가 그래도 기초가 어느 정도 되어 있어서 그랬는지 3학년 때부터 성적이 올라가데요. 내신은 별로 안 좋았는데 수능은 과학 탐구영역에선 1등급도 받았어요.”

-기록에 보니까 부인이 몰래 과외수업을 시켰다고 하더군요.

“그랬죠. 나중에 알고 보니 나 몰래 50만 원짜리 영어․수학 고액 과외를 시켰더군요. 교육위원으로서 공교육 중심의 정책을 세워야 할 사람이 자기 아들에게 과외를 시켰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죠. 학원이라면 모르지만…. 엄마가 생각할 때 ‘아이가 언젠가 정신을 차려서 공부를 하려고 할 때 수학과 영어 기초는 만들어놔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방학 때 과외를 시킨 것 같아요.”

박종훈 경남도 교육감./김구연 기자

-물론 지향하는 방향은 공교육 강화로 가야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사교육 자체를 악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나요?

“사교육하는 분들은 사교육 자체를 공공의 적으로 보는 데 대해 억울해합니다. 저도 사교육 자체를 타도해야 할 대상이라 보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공교육이 담을 수 없는 게 있거든요. 공교육은 서른다섯 명의 한 가운데에 초점을 맞춰서 가르치다보니 잘하는 아이에겐 어설프고, 못하는 아이에겐 어렵겠죠. 그러면 그 부분에서 잘하는 아이를 좀 더 잘할 수 있게, 못하는 아이는 따라오게 할 수도 있고, 또 개성이 있는 아이는 그 개성을 살려줄 수도 있고, 음악이나 미술 같은 특기과목은 학교에서 못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공교육과 사교육이 보완재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지호의 과외도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이 만일 일반 학원이었다면 지극히 정당하겠지만, 고액과외까지 시켰다는 점에서는 부끄러운 일이죠. 그것도 교육위원의 아들인데.”

-그래서 부인을 많이 질책했나요?

“그 때는 아주 난리가 났죠.”(웃음)

-이후 지호는 어떻게 되었나요?

“3학년 때 열심히 하더니 서울에 있는 대학교는 못가도 홍익대 조치원분교 건축학부로 갔어요. 아마 입학할 때 공과대학 수석이었나 봐요. 등록금을 돌려주더군요. 2학년 올라갈 때 5년제 건축학으로 갈 것이냐, 4년제 건축공학으로 갈 것이냐를 선택해야 했는데, 설계보다는 시공 쪽으로 선택을 했죠. 군대 갔다 와서도 성실하게 공부를 하더니 졸업하자마자 (우리 지역에서 로봇랜드 민간사업자로 있는) 울트라건설에 취직해서 남양주 쪽 아파트 현장에서 일하고 있죠. 헬멧 쓰고 고공에서 사진을 찍어 카카오톡으로 보내주기도 하고 그래요.(웃음)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사람 되겠나 싶었는데….”

-늦게나마 지호가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네요.

“그 때 에피소드가 또 하나 있습니다. 제가 합천에 있는 대안학교인 원경고등학교에 ‘학부모와 함께 하는 마음공부’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었죠. 박영훈 현 태봉고 교장 선생님이 그 때 원경고 교감을 하셨는데, 그 분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죠. 그 때 제가 아이를 아마 억지로 끌고 갔을 겁니다. 그 때 아마 그 교감 선생님이 우리 지호를 데리고 저녁에 들판을 산책하면서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많이 해준 것 같아요. 그 프로그램에서 아버지가 아이 발을 씼겨 주는 거라든지 여러 가지를 많이 했는데, 그 때 이 마음공부라는 게 아이들 인성교육이라든지 학교폭력 예방이라든지 대안이 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을 했죠.

나중에 와서 보니까 정현태 전 남해군수도 마음공부 그걸 많이 하셨더군요.”

-그렇죠. 그걸로 책도 냈죠.

“네, 그래서 원경고등학교가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싶었는데, 제대로 도와주지 못해서 아쉬웠죠. 교육위원의 역할이 그렇게 여의치 않더군요.”

-이제 교육감이 되셨으니 그쪽에 신경을 쓰시겠네요.

“네. 그 때 기숙사에서 5일을 자봤는데, 바퀴벌레도 나오고 참 열악하더군요. 그 분들이 소홀해서가 아니라 예산이 없는 거죠. 형편이 되면 그런 학교는 돕고 싶습니다.”

지나친 경쟁심과 승부의식의 결과는?

-어릴 때 지나치게 경쟁심이 강해서 생긴 에피소드가 많더군요. 초등학교 때 김애숙이란 친구가 주도한 반장 선거 반란사건도 있었고….(함께 웃음)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런 경쟁심이 지금 교육감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원천이 되진 않았을까요?

“저는 승부근성이라는 것이 특히 강했어요. 초등학교 4학년이 마라톤대회에서 5․6학년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거기서 1등을 하려고 얼마나 오버페이스를 했던지 골인 지점에서 기절을 해버렸어요. 나중에 눈을 떠보니 선생님들이 그늘에 저를 눕힌 채 다리를 걸상 위에 올려놓고 걱정스럽게 보고 있더군요. 지고는 못산다는 생각이 너무 강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런 승부근성이 남아 있겠죠?

“그렇~겠죠? 교육감 선거 과정에서도 다른 후보가 유세하는 모습을 보면 몸이 막 떨리는 것 있지 않습니까? 나도 유세를 하는데, 다른 후보가 하는 모습을 보면 못견뎌하는 그런…. 승부근성이 지금도 있는 것 같아요.”

-‘김애숙 반란사건’은 어떻게 된 건가요?

“학교 다니면서 계속 1등만 하고 선생님의 사랑을 독점하는 과정에서 만용을 부렸다고 할까, 학급 안에서 독재를 했다고 할까. 1학년 때부터 6학년까지 반장 선거를 학기마다 한 번씩 모두 열두 번을 했는데, 한 번도 반장을 빼앗겨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6학년 2학기 때 오죽했으면 반 아이들이 반란을 꾀한 거죠. 김애숙이라는 아이가 반란을 주도했죠. 지금은 창원 쪽 학교에서 교감을 하고 있어요. 우리 반에서 제일 얌전하고 말도 없는 조용한 아이에게 표를 몰아줬던 거죠.”

-입후보도 하지 않은 아이에게?

“아마 교황 선출식 투표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도 그 아이를 찍었어요. 내가 나를 찍지 않더라도 나에게 몰표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내가 나를 찍는 게 비양심적이라는 생각도 있었고…. 그랬는데 1차 투표에서 그 아이와 내가 동점이 나와 버린 거예요. 그래서 2차 투표를 했는데, 1차에서 나를 찍은 아이들까지도 반란의 가능성을 보고 그 아이에게 몰표를 줘버린 겁니다. 그래서 내가 졌죠. 그런데 그 다음날 그 아이가 학교에 안 나와 버린 겁니다. 반장을 못하겠다는 거죠. 그래서 선생님이 어쩔 수 없이 차점자가 승계를 받으라고 하여 2학기에도 내가 반장을 했죠. 제대로 뽑힌 반장도 아닌데.(웃음)”

-그 때 몰표를 받았던 얌전한 남학생은 이름이 뭔가요?

“2002년 마산에서 도의원 선거에도 출마했던 정태천이라는 친굽니다. 자동차 영업을 하는데, 아주 잘 합니다.”

-그 땐 그렇게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는데, 지금은 달라졌군요.

“아마 자라면서 바뀌었겠죠.”

-이번 선거에는 안 나왔죠?

“네. 안 나오고 이번엔 저를 많이 도왔죠.”

-김애숙 사건이라든지 이런 건 굳이 드러내지 않고 싶은 일이잖아요. 자서전에 보면 굳이 고백하지 않아도 될 일을 고백해놓은 게 많던데.

“그냥 저의 일기라고 생각하고, 나중에 기억하지 못할까 싶어서 기록해둔 거죠. 남들이 본다는 생각은 별로 안 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솔직한 게 좋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했죠.”(웃음)

고등학교 때 가출, 표충사 토굴로 가다

-초등학교 땐 그렇게 줄곧 1등도 하고 반장도 했지만, 고등학교 땐 아주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다는 기록도 있더군요.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마산중에서 전교 1등도 해봤습니다. 강재현 변호사가 늘 1등이었는데, 강 변호사는 참 대단한 아이였죠.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동기인데, 중․고등학교를 통틀어 1등을 한 번도 빼앗기지 않은 친구였죠. 공부만 잘 한 게 아니라 책도 많이 읽는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한 번 저에게 1등을 빼앗긴 거죠. 저는 기복이 좀 있었어요. 전교 1등도 했다가 전교 70등도 해봤으니까.”

-전교 70등도 상위권이잖아요.

“그렇죠. 한 학년 전체가 770명이었으니까. 그런데 고등학교 올라가서 3월에 첫 시험을 치는데, 60명 중에서 내가 55등을 했더라고요. 나는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 3개월을 촌에서 완전히 놀아 버렸는데, 다른 아이들은 마산에서 유상학원, 대성학원 이런 데서 공부를 했더라고요. 그 당시 마산고는 다 1등 하던 아이들을 모아놓은 곳이고, 그 중에서 1등도 있고 60등도 있는 게 당연한 일인데다, 첫 시험이라는 게 결정적인 것도 아니라는 걸 알 법했는데, 나는 그 때 충격을 너무 크게 받았나 봐요. 그 때부터 공부를 놓아버렸죠.”

-그러면 공부 대신 뭘 했습니까? 혹시 불량학생?(웃음)

“절에 빠졌죠. 정법사라는 절, 마산 포교당이었는데, 거길 우연히 지나가다가 뭔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걸 느꼈어요. 들어가서 법당에 앉았다가 절에 빠져버렸죠. 그 때부터 고등학교 1․2학년 동안 전국에 안 가본 절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토요일 수업 마치면 책가방 던지고 절을 찾아다녔죠. 일요일 밤에도 돌아오고, 월요일 새벽에도 돌아오고….”

-뭡니까? 불교에 심취했던 건가요?

“불교라기보다는 절에 빠진 거죠. 산사의 분위기에 빠졌던 것 같아요. 오대산 월정사까지도 갔으니까요. 그러다가 대학 시절에는 참선을 했죠. 밀양 표충사에서 선 공부를 했죠. 지금 경남대 최유진 교수와 금강경 공부도 했고요. 아침부터 다리 꼬고 앉으면 점심때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고 참선을 했어요. 그리고 점심 한 숟가락 먹고 또 저녁까지 참선했죠. 참 치열하게 했어요.”

-다시 고등학교 이야기로 돌아가면, 1년 휴학을 했던 경력이 있던데, 그건 왜?

“네.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니 제가 특별반에 편성되었어요. 그 땐 예비고사가 있던 시절인데, 서울지역 예비고사에 떨어질 우려가 있는 아이들만 따로 모아 특별반을 만든 거죠. 공부 잘하는 아이들 특별반이 아니라 못하는 아이들 특별반이었던 거죠. 저에겐 충격이었죠.”

마산고등학교 1학년 때 모심기 봉사활동 중. 맨 왼쪽 안경 쓴 이가 박종훈 학생.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냥 책가방을 그대로 둔 채 밀양 표충사로 갔어요. 그 때 마침 마산 포교당 주지스님이 표충사 주지스님으로 가 있었거든요. 주지스님이 딱 보더니 ‘공부하기 싫어 도망 온 놈이구나’ 하는 걸 알아차리고 행자 노릇을 시키지 않고 층층폭포 올라가는 쪽에 토굴을 하나 주더군요. 토굴이라 하면 방 한 칸, 아궁이 한 칸 있는 작은 암자를 말하는데, 거기서 책 읽고 경전 읽고 공부를 하라더군요. 일주일에 한 번만 내려와서 쌀과 반찬 챙겨가고…. 거기서 폭포소리, 새소리, 밤이면 짐승 소리 들으며 지냈죠. 아마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나 싶어요.”

-학교는 그러면 휴학을 하고 간 겁니까?

“아니죠. 그냥 모든 걸 던지고 가출한 거죠. 집이나 학교에서 보면 가출이지만, 내 입장에선 출가를 한 거죠. 머리 깎고 중이 되려 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두 달 만에 내려왔습니다.(웃음) 한 달 지나면서 꿈에 어머니가 보이기 시작하니까 안 되겠더군요. 어머니가 방방곡곡 아들 찾아다니는 게 꿈에 나오고 하니 못 견디겠데요.”

-어머니에게도 아무 말 없이 나왔던 겁니까?

“그렇죠. 출가의 제1원칙은 무엇이라고 끈을 남겨놓고 오면 안 되거든요. 몸만 살짝 나오는 게 출가니까. 어쨌든 그래서 두 달 만에 내려오니까 학교에서는 휴학을 시켜놨데요.”

-휴학이 그래서 된 거로군요.

“네. 그래서 고등학교를 4년 다녔기 때문에 편의상 3학년, 4학년이라고 이야기하죠.”

대학 1학년 때 경찰에 쫓긴 이유

-남은 휴학 기간에는 뭘 했습니까?

“그 때 큰형이 서울대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무슨 공고 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 가서 형과 함께 자취를 하면서 학원을 다녔어요. 해보니까 되더라고요. 그 때부터 다시 공부를 열심히 했고, 복학해서도 제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한 시기가 그 때가 아니었나 싶어요.”

-대학은 어떻게 경남대로 가게 됐나요?

“예비고사도 잘 치렀는데, 동국대 한의대에 넣었다가 떨어졌죠. 그 때 막 한의대 인기가 시작되는 시기였는데, 그렇게 떨어지고 나니까 이미 1년 휴학을 해서 남보다 늦은 상황에서 또 삼수를 할 순 없고, 그래서 후기였던 경남대로 가게 된 거죠.”

-왜 하필 정치외교학과로 가신 건가요?

“한석태 교수에게 꼬인 것 같습니다.(웃음)”

-입학 전에 한석태 교수를 알고 있었나요?

“그게 아니라 입학 때는 학부로 들어갔죠. 법학과, 행정학과, 정외과 이렇게 3개 과가 120명을 모집하여 2학년 올라갈 때 각 학과별로 40명씩 지원을 받았는데, 1학년 때 한석태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정치학이 진짜 학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가보니 진로가 별로 안 좋더라고요.”

-그런데 1학년 때 학보사 기자를 하다가 쓴 글이 문제가 되었다고 하던데요. 경찰 조사를 받았고, 그 때 아버지가 학교에 왔고, 끊었던 담배를 피우셨고, 대학 총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던데, 그 구체적인 상황이 어떻게 된 겁니까?

“수습기자 때 연습 삼아 글을 써보라는 과제가 있었어요. 그 당시는 박정희가 죽고 1980년 서울의 봄, 완전 해방구이던 시절이지 않았습니까? 마음껏 어떤 글이든 쓸 수 있던 시기였거든요. 그런데 그 때 썼던 글이 신문에 게재되지도 않았는데, 5․18 광주항쟁이 나는 바람에 문제가 되었던 거죠.”

-글이 어떤 내용이었는데요?

“제목은 모르겠는데, 내용 중에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이런 게 있었습니다. 그 땐 충분히 쓸 수 있었던 글인데, 5․18 이후 문제가 된 거죠. 아마 그 원고가 계엄군에게 압수당했던 것 같아요. 계엄군이 진주하면서 제일 먼저 학생회 사무실과 학보사를 수색했겠죠.”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일단 저는 도망을 쳤죠. 내가 도망치면 절대로 못잡죠. 제가 대한민국의 모든 절 정보를 다 갖고 있으니까 절에 숨어버리면 절대 못 찾습니다.”

-수배 상태였나요?

“공식 수배는 아니었는데, 경찰이 시골집으로 계속 찾아왔죠.”

-언제까지 도피생활을 하신 건가요?

“5․18 직후부터 8월초까지 피신해 있다가 이제 고비는 좀 넘었지 않나 싶어 8월 들어 마산에 내 자취방에 왔다가 어머니 권유로 마산경찰서에 자수했죠.”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당시 정보1계장인가 2계장인가 이금갑 경위라고 있었는데, 그 분이 시인이었어요. 경찰이 시인이라는 게 참 특이했는데, 그 분에게 수월하게 조사를 받았습니다. (신군부 세력 중 한 명이었던) 정동호 씨의 덕도 봤죠. 그 분 처남이 이웃에 살았으니 경찰서에 와서 한 마디해주고 간 거죠.”

-그러면 별다른 불이익은 없었나요?

“경찰서에서 나와서 보니까 학보사에서 잘리고, 교련 학점도 펑크 나고, 그리고 학교에서 제적당할 위기에 처해 있더군요. 당시 종합대 승격 전 윤태림 학장 시절이었는데, 학장이 자르라고 한 거죠. 그랬는데 당시 김선수 교수가 ‘아버지 모시고 학장실에 가서 무릎 꿇고 빌어라’고 코치를 해줬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학교에 왔고, 다행히 용서를 받게 되었죠. 잘리지는 않았지만 뭔가 징계를 받긴 했을 텐데 그건 기억이 안 나네요.”

몽둥이로 아이들을 다스린 폭력교사

-그렇게 해서 경남대를 졸업하고 1984년 문성고 교사로 갔잖아요. 그게 불교학생회 활동과 연관이 있다고요?

“네. 지금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시다던데, 배성희 이사장님이 대학불교학생회연합(대불련) 활동에 후원을 많이 해주셨어요. 아주 독실하셨죠. 그게 인연이 되어 문성고가 개교하면서 교사로 오라기에 망설이지 않고 가게 된 겁니다.”

-어쨌든 고등학교 때 방황의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절에 심취했던 게 이런 인연으로 이어지게 된 거군요.

“예. 그렇게 됐죠. 그런데 이후 학교민주화운동을 할 때 내가 평교사 회장을 하면서 인간적으로는 그 어른에게 그래서는 안 되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

-그 때 활동으로 불이익은 받지 않았나요?

“그래서 그 때 관선이사가 들어와 3년 동안 학교를 운영하다 나가고 이후 다시 들어왔지만 일체 보복은 안 하셨어요.”

-그랬군요. 그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쉽지 않죠. 하지만 그랬다면 또 시끄러웠겠죠.”

창원문성고 교사 시절, 2000년 총선연대 관련 사회 계기수업 중인 박종훈 교사.

-문성고는 전교조 사태 때도 해직교사가 없었나요?

“없었습니다. 제가 분회장을 맡고 있었는데도 해직이 안 되었으니까.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문우, 배성희 그 분들이 또 그런 쪽에서는 다른 면모가 있었나 보군요.

“대학에 교수들을 많이 괴롭히고 힘들게 했는데, 고등학교에 대해서는 일체 그런 게 없었습니다.”

-교사 시절 스스로 ‘오만하고 교만한 선생, 몽둥이로 아이들을 다스린 폭력교사였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그게 바뀌게 된 계기가 뭐였나요?

“내가 18년 6개월 교사생활을 했는데, 딱 10년 동안은 억수로 두들겨 팼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 때리는 게 답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딱 들었어요. 한 대 때려서 말을 듣던 아이에게 다음에는 두 대 때려야 말을 듣습니다. 충격체감의 법칙이 적용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 나 스스로가 황폐해지더라고요.”

-10년 이후에는 전혀 체벌을 하지 않았나요?

“담배 끊듯이 딱 끊었죠.”

-10년이면 1994년쯤 되나요?

“그 때쯤 되겠네요.”

-그런데 앞의 책에서 보니까 2000년 무렵 도서관 담당교사를 하게 되면서 아이들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는 말도 있던데.

“아마 체벌은 그 이전부터 안 했는데, 그 땐 도서관이 아이들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되었겠죠. 문성고 졸업생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10년 이전 아이들은 저를 폭력교사로 기억하고 있고, 그 이후 졸업생들은 내가 아이들을 때렸다는 걸 믿지 못하죠.”

-1989년부터 전교조 활동을 시작했는데, 분회장도 하시고 창원지회장도 하셨죠?

“네. 그 땐 모두 비합법 시절이었죠.”

-경남지부 연대사업국장과 사립위원장, 창원지회 정책부장도 하셨고…. 그런 활동을 하면서 특별히 탄압을 받은 건 없었나요?

“학교에서는 없었습니다. 형사들의 주목을 받거나 하는 건 있었지만….”

교사직 벗고 교육위원에 도전한 계기

-2002년 43세의 나이에 교사직을 벗고 교육위원에 도전하셨는데, 사실 교사라는 직업이 안정된 직업이고 정년퇴직까지 있으면 연금도 많이 받고, 교감이나 교장도 될 수 있는데, 그런 직업을 박차고 나온다는 게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잖아요. 그 계기가 뭐였을까요?

“나는 한 직장에서 20년 가까이 있어보니까 ‘이건 퇴보다’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거기에다 2001년 박사학위를 받고 나니까 뭔가 사회봉사랄까 이런 의무감이 생겼어요.”

-아, 먼저 박사학위를 받은 동생이 그런 조언을 했다는 기록도 있더군요.

“네, 그랬죠. 박사학위는 시작이다. 학문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하는 자극을 줬죠. 그리고 2002년 교육위원 선거가 학교운영위원 전체 선거로 바뀌었을 때였어요. 문성고등학교 도서관 담당교사를 하면서 도서관을 잘 운영하니까 아이들이 막 몰려오더라는 걸 경험했죠. 교육위원이 되면 도내 모든 학교 도서관을 이렇게 활용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있었죠. 그리고 내 박사학위 논문이 ‘사회적 합의의 노동정치’였습니다. 이해를 달리하는 다양한 집단의 토론과 합의, 의사소통의 통로 역할을 내가 잘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그렇게 교육위원을 8년 하셨고, 2010년 51세에 교육감 선거에 도전하셨다가 아쉽게 낙선했잖아요? 그러고 나서 4년 동안 시민운동도 하시고 많은 활동을 했지만, 사실상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야인 생활을 하신 거잖아요. ‘창녕의 시골마을로 이사 갈 정도로 경제적 타격이 있었다’고 토로한 적도 있던데….

“선거를 하고 나면 빚을 질 수밖에 없잖아요. 공식적인 선거비용은 보전을 받지만, 예비후보 홍보물은 보전이 안 되고, 선거사무실 임대료나 6개월 정도 사전에 사무실 운영비용도 보전이 안 됩니다. 엉뚱한 짓은 안 했지만, 들어간 돈이 3억 원 정도였어요. 그게 다 빚이었죠. 그래서 집사람에게 ‘이 빚을 다 지고 갈 수는 없다’고 했죠. 그래서 창원 집을 팔아서 빚을 갚고 창녕으로 들어간 거죠.”

-창녕 시골집은 원래 있었던 건가요?

“대지 100평에 열 평 남짓 되는 작은 오두막을 1998년에 사뒀죠. 나중에 은퇴하고 들어가 살 요량으로…. 거기로 들어간 거죠.”

음주운전 경력, 사실은…

-그리고 4년 후 재도전 끝에 승리하셨는데, 결정적인 승리 요인이 뭐라고 보십니까?

“진짜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보는데, 크게는 변화에 대한 도민의 요구, 새로운 교육에 대한 갈증이 세월호를 계기로 터진 게 아닌가 이렇게 봅니다. 거기에다 지난 선거에 비해 나름대로 조직을 열심히 했고, 박종훈이가 되면 좋아할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결합도 된 것 같습니다. 솔직히 이번 선거에는 저는 돈 한 푼도 안 냈습니다. 낼 돈도 없었고요.”

박종훈 경남도 교육감./김구연 기자

-그러면 모두 후원금으로?

“후원금으로 했고, 일부는 안 갚아도 된다고 하면서 빌려줬지만 내 양심상 안 갚을 수는 없고, 당선이 되었으니 한 3년 동안 월급 안 쓰고 모아서 갚아야죠.”

-선거 과정을 초반, 중반, 종반으로 나눈다면 선거기간 중 안 될 수도 있다고 느낀 적도 있었습니까?

“방송 3사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을 때 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그 때 14%밖에 안 나왔으니까. 그런데 전문가들은 다르게 보더라고요. 4년 전 선거 한 달 전에 지지율이 4~6% 정도밖에 안 나왔습니다. 그런데 23%까지 따라갔는데 지금 14%는 굉장한 거라는 거죠. 4년 전 그래프와 지금 그래프를 보여주면서 그렇게 설명하더군요.”

-사실 선거 초반의 여론조사는 지지도 조사가 아니라 인지도 조사에 불과하죠.

“4년 전 23%를 받은 사람이 지금 14%가 뭐냐 생각하면 낙담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데 엊그제 목욕탕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과 앉아서 이야기를 좀 했는데, 그 사람 말로는 선거 2~3일 전 방송연설하는 걸 보고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선거 과정에서 제일 힘들었던 일은?

“돈이죠. 뭐.”(웃음)

-박 후보에 대해선 네거티브나 비방이 별로 없었죠? 다른 두 후보가 난타전을 했지만….

“아, 그런데 음주(운전 전과) 부분이 저에겐 가장 힘들었어요. 아마 돈 보다 나는 그게 더 힘들었습니다.”

-그건 토론회에서 깨끗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방식으로 정면 돌파를 잘 하신 것 같습니다만….

“그렇게 말고는 답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핑계 거리는 있습니다. 나는 사실 술은 입에도 못 대는 사람이거든요. 연말 송년회 때 토요일 세 군데인가 네 군데인가 인사를 하고 다니면서 입에만 댄 것이 한 잔쯤 되었을 거예요. 그런데 음주단속에 걸려 차가 대여섯 대 줄을 서 있는데, 마침 가그린이 차에 있었어요. 그걸 입안에 머금고 계속 헹궈냈죠. 그런데 알고 보니 가그린 그게 순 알코올이라네요.”

박종훈 경남도 교육감./김구연 기자

-아! 그런가요?(웃음)

“진짜 내가 음주를 해서 걸릴 정도라면 이미 쓰러졌을 겁니다. 아무리 많이 마셔도 소주 두 잔 마시면 자빠지는 사람인데….”

-그렇게 변명 안 하신 게 정말 잘 하셨네요. 그랬다면 온갖 패러디와 비아냥이 넘쳐나고 오히려 이슈가 될 수 있죠. 자신의 가장 큰 강점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승부근성이라고 해야겠네요.”(호탕하게 웃음)

-약점은요?

“내가 귀가 좀 여린 것 같습니다. 여기서 이 말 들으면 이게 맞는 것 같고, 저 말 들으면 그것도 맞는 것 같고….”(역시 웃음)

-좌우명은 뭡니까?

“볼 견, 이로울 이, 생각 사, 옳을 의. 견리사의(見利思義)입니다. 이익이 될 만한 것이 보이면,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먼저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액자를 하나 만들어 집무실에 걸어야 겠네요.

“글 잘 쓰시는 분이 하나 써주면 걸어야죠.”

-좋아하는 음식은?

“짜장면 제일 좋아하는데, (선거 캠프에선) 짜장면 이야기하지 말고 된장찌개 이야기하라네요.”(웃음)

-짜장면 자주 드십니까?

“짜장면은 일주일을 먹어도 안 질립니다. 어릴 때 맛있었던 기억 때문인지, 점심 때 먹고 저녁 때 또 먹어도 맛있어요.”

-단골 짜장면 집이 있습니까?

“옛날에 희래등. 창원 용지호수 앞 건물 4층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데요.”

-특별한 취미나 즐기는 운동은?

“지난 4년 동안 등산을 가장 많이 했습니다. 주로 혼자 다녔습니다. 시원하고 상쾌한 기분이 좋죠. 봉림산, 무학산을 많이 다녔습니다.”

-그렇게 멀리 다니시는 건 아니네요?

“돈이 있어야 가죠. 기름 값이 없어서 행사장에도 못간 적이 많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집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큰 일 나겠죠?”(웃음)

-존경하는 사람은요?

“노무현 대통령입니다.”

-그 분의 어떤 점이?

“바보스럽지만 원칙을 버리지 않는 우직함.”

교육관료 장악할 자신 있다

-사실 교육감이 되셨지만, 조직 장악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예전 권정호 교육감도 2년 동안 교육관료 조직을 장악하는 데 굉장히 힘들었다고 들었거든요.

“실패했죠. 권 교육감님은 너무 모르고 들어오셨고, 대학총장을 하셨지만 관료를 전혀 몰랐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8년이라는 교육위원 경력 덕분에 관료들을 좀 압니다. 불안하게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자신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파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도지사와 달리 교육감은 자신과 철학을 공유하는 사람을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잖아요. 도지사는 정무부지사도 데리고 갈 수 있고, 정책보좌관 자리도 여럿 둘 수 있고, 산하기관이나 공기업, 투자기관장 등 자리에 측근을 배치할 수도 있지만….

“그게 좀 개선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교육감의 코드와 맞는 사람들이 함께 들어가야 정책 집행이 되는데….”

-공기업이나 투자기관도 없고, 산하기관도 교육직만 가능하죠?

“교육청은 직속기관밖에 없습니다. 비서실장과 수행비서 이렇게 두 명만 데리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없으니까 (선거를 도와던 사람들도) 기대를 하지 않고 오히려 저는 좀 더 자유로울 수도 있죠.”

-98개 시민사회단체가 뽑은 좋은 교육감 후보였죠. 이들 단체와도 계속 좋은 관계를 가져가야 할 텐데, 그 단체들의 요구도 있을 거잖아요.

“그 분들이 바라고 요구하는 정책은 있을 수 있어도, 그 이외의 요구는 없으리라 봅니다. 그런 거 안 하시는 게 운동의 원칙이기 때문에….”

-서울의 경우 조희연 교육감은 아주 좋은 조건이잖아요. 서울시장도, 서울시의회도 협조적인 환경이고. 그런데 경남의 경우 도지사도 새누리당, 도의회도 새누리당 일색인데, 어떻게 협조를 받아낼 수 있을까요?

“쉽지 않겠죠. 오늘 홍준표 지사님 뵙고 왔지만, 지사님도 그러더군요. ‘우리는 보수․진보 없다.’ 그래서 저도 그랬어요. ‘보수․진보보다는 교육의 본질만 갖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자기도 도울 게 있으면 전폭적으로 돕겠다고 하시더군요. 다만 ‘무상급식 이야기는 오늘은 하지 맙시다’고 하데요.”(웃음)

-전국 진보교육감들과 연대․협력은 어떻게?

“기존 교육감협의회가 있으니까 거기서 협의해나가면 될 것 같고…. 그 협의회에서 우리가 다수가 됐으니.(웃음) 상당히 힘있게 교육부와 교섭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경남도민과 학부모들게 당부하실 말씀이 있다면.

“변화와 새로운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지지해주셨는데, 기대수준에 비해 여건이 녹록치는 않습니다. 그래서 책임감이 무거운데요. 안 되면 열어놓고 ‘이래서 안 됩니다’ 솔직히 털어놓고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도민들께서도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지켜봐주시면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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