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만 매립, 그 20년간의 기록] (1) 마산만의 역사와 의미

창원시 월남동 마산항 1부두와 돝섬 사이 마산해양신도시 매립현장. 63만㎡(19만 평) 매립공사의 공정률은 현재 37%이고, 2018년 12월이면 완공된다. 마산만 지도를 바꾸는 이 공사의 출발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4년 해운항만청(현 해양수산부)의 전국항만기본계획이다. 그 속에 가포바다를 메워 새 부두를 만드는 마산항 개발계획이 포함됐다. 그리고 1996년 해양수산부의 마산항 광역개발기본계획에 준설토투기장 용도의 서항지구(해양신도시) 매립계획이 추가됐다.

20년이 지난 현재 이 계획은 실현 단계다. 39만5907㎡(12만 평)의 가포바다는 이미 사라져 개장을 앞둔 신항과 배후부지로 모습을 바꿨다. 서항지구 역시 6.6m 높이의 거대한 석축 호안이 조성되면서 이후 해양신도시 매립지의 모습을 예고한다. 경남도민일보는 마산신항과 해양신도시 개발계획의 완결 여부와 상관없이 지난 20년간의 매립과정 기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모두 20편의 기획을 통해 항만물동량 예측치로 대표되는 개발계획의 근거와 20년이 지난 지금의 실제 통계를 비교하려 한다. 개발과 보전으로 압축되는 그간의 숱한 쟁점과 논란을 다시 한번 정리한다. 양 측면의 정책과 주장을 주도했던 인물들을 기록한다. 이후 유사한 사례에 충분한 교훈이 될 것이다.

마산해양신도시는 마산만의 일부다. 1400만㎡ 면적의 마산만에 세워질 63만㎡의 매립도시다.

마산만은 가포와 신마산 서항지구, 어시장 앞 구항지구와 자유무역지역·봉암해안, 건너편 두산중공업과 삼귀동 해안 등 도심에서 조망할 수 있는 바다다. 하지만 그 경계는 소모도와 막개도(등대섬), 덕동만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그 바깥 쪽은 진해만이다. 이 경계선은 마창대교에서 2.1㎞ 거리에 있다. 이는 마산항 항계선과도 일치한다. 바깥쪽 진해반도와 구산반도로 둘러싸인 내만인데다, 소모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외양의 파도를 막아 평온하고 수심이 깊은 천연의 양항이다. 마산만의 규모를 면적으로 따지면 1400만㎡ 정도라고 마산지방해양항만청 홈페이지 항만정보는 안내한다.

마산만은 마산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시민들에게 이를 물으면 보편적으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낭만과 정취를 말하지만, 과연 그게 다일까. 마산바다의 진정한 의미와 이미지를 유추하는 것으로부터 전체 20편에 이르는 마산해양신도시 매립 기록을 시작한다.

창원시 월남동 마산항 제1부두에서 바라본 마산해양신도시 매립현장. 높이 6.6m의 거대한 석축호안이 이후 매립지의 모습을 예고한다. /이일균 기자

◇도시의 태동과 성장의 근거지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

노산 이은상이 노래한 1920년대의 마산 바다다. 가장 널리 알려진,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마산만의 보편적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혹은 간과해온 마산만의 의미가 없을까.

없지 않았다. 관념적 낭만을 훌쩍 뛰어넘는 실체적 의미와 이미지가 있었다. 도시의 태동, 생업과 생존의 터전. 마산 바다는 그랬다.

옛 마산시나 마산만이라는 명칭은 고려말부터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마산포'에서 유래했다. 당시 조정에 조량미를 공급하는 석두창이 이곳에 있었고, 여몽연합군이 일본 원정을 위해 주둔했던 정동행성 또한 이곳에 있었다. 하지만 마산포에 앞서 삼국시대까지는 골포, 이후 고려말 마산포로 바뀔 때까지는 합포라는 이름이 쓰였다. 경남대 사학과 유장근 교수는 이를 두고 말했다.

"석두창이나 시대별로 포구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주장이 엇갈리죠. 하지만 마산이라는 도시의 태동이 포구에서 시작됐다는 건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뒤에 조선이나 일제에 이르기까지도 마산의 도심은 포구였으니까요."

그의 말대로 조선 영조 때인 1760년에 지금의 창동에 석두창과 같은 역할의 조창이 들어선다. 그리고 중성·서성·동성·성산·성호·오산리 등 창동 일대 6개 이는 마산포의 중심, 지금 마산의 원도심이 된다. 이후 일제는 지금의 월영동·해운동 일대에 새 시가지를 만들면서 신마산이라 부르고, 이전 원도심을 구마산으로 불렀다는 것이 유 교수의 주장이다.

2014년 현재 가포고개에서 내려다본 국립마산병원과 가포만 매립지. /이일균 기자

오동동타령을 기억하시는지?

어디 어디 노래다 아니다 말이 많지만, 2절을 들으면 마산 오동동이 딱이다 싶다.

'동동 뜨는 뱃머리가 오동동이냐/ 사공의 뱃노래가 오동동이냐/ 아니요 아니요/ 멋쟁이 기생들 장구소리가/ 오동동 오동동 밤을 새우는/ 한량님들 밤놀음이 오동동이요.'

근대 마산조창 주변에 4곳의 선창, 즉 오산선창(오동동)과 서성선창, 백일세선창, 어선창이 있었다. 그리고 1950년대 초 만들어진 이 노래의 배경이 오동동 바다와 기생집이었다는 것이 그 근거다.

◇휴양 나아가 생존의 바다

마산에 연고를 둔 많은 이들에게 가포바다의 기억은 경쾌하다.

유원지의 보트와 아이들이 진 빠지게 놀던 해수욕장, 횟집이나 레스토랑·카페 등에서 도심을 벗어난 위락이 있었다. 60대 초반의 진모 씨는 목소리를 낮춰 추억을 전했다.

"연인들끼리 놀기가 얼마나 좋았는데. 이래저래 놀다보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따다가 차도 일찍 끊겼거든. 그걸 노리고 간다 아이가."

창원시 해운동에서 가포동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는 흔히 '가포고개'라 하지만, '자부고개'나 '아리랑고개'로 불렸다. 아리랑고개는 고개 바로 밑 국립마산병원에 드나들던 옛날 결핵환자들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이라 해서 붙였다. 가포고개 마루에서 병원 쪽을 바라봤다. 고개를 더 들면 개장을 앞둔 가포신항과 배후부지가 있다.

같은 장소에서 1948년에 찍은 사진은 우리에게 잊었던 바다의 기억을 가져다준다. 2005년 11월 가포신항 착공과 함께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진 가포바다가 거기에 있다. 1941년 상이군인 요양소로 문을 열고, 1946년 국립 마산요양원으로 재개원한 이후 결핵병원의 기능을 이어가고 있다. 다음은 이곳에서 2년여 결핵치료를 받았던 시인 구상의 시 '바다'다.

1948년 당시 아리랑고개(현 가포고개)에서 찍은 마산요양원과 그 뒤 훤하게 보이는 가포만 바다의 모습. /국립마산병원연보

'파도만이 보이누나/ 바다를 바라보던 사나이는 어느 친구의 시 구절을 중얼거리며 일분도 채 못 가서 떨어뜨리고 다른 어지러운 생각에 잠기곤 하였다. 인간, 운명, 사랑, 시, 생활, 이런 허접스러운 것들이었다/ 자연에 반역해 온 그의 과거가 이제 자연과 단 일분도 바로 맞서지 못할이만큼 자연에게 배반당하여 이런 기찬 습성이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다/ … / 앗, 자기가 저지를 몸서리칠 역사에 그는 눈을 꽉 감아버렸다. 사나이는 가슴을 앓고 이 바다를 다시 찾아온 것이다.'

시를 찾아준 경남대 교양기초교육원 한정호 교수는 "시시각각 죽음의 그림자와 대면하는 사투, 결핵으로 꺼져가는 재활의 둥지에서 바라보는 가포바다는 그렇게 환자들에게 새 삶을 기약하는 자연이었다"고 풀이했다. 가포바다, 나아가 마산만의 의미는 전국에 널리 알려졌던 휴양지요, 생명의 바다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빼놓고 마산 바다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마산만의 진정한 의미는 사람, 어부, 어업관계자들의 삶과 생업의 터전이 아닐까. 그 실체를 2편에서 만난다.

39만㎡(12만 평)가 넘는 가포 바다는 이제 매립돼 앞쪽 가포신항과 뒤쪽 배후부지 형태로 탈바꿈했다. /이일균 기자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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