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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뺏길 수 없었던 거제 바다에 깃든 치열함

[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3) 거제

김훤주 기자 pole@idomin.com 2014년 07월 02일 수요일

거제는 옛적 우리나라 해상 방위에서 요충이었다. 당시 조선(造船)·항해(航海) 기술로 볼 때, 고려·조선 시대에는 거제 남쪽 바깥바다로 배가 빙 돌아서는 다닐 수 없었다. 요즘도 장승포항과 지심도를 오가는 노선은 직선거리로 6km 남짓밖에 되지 않는데도 조금만 바람이 불고 물결이 높아도 배가 뜨지 못한다.

거제 바깥바다의 거칢과 험함은 옛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거제 북쪽 통영(당시는 고성)과 맞닿은 좁다란 해역(견내량)을 지나거나 섬들 널려 있는 거제 남쪽 연안을 거쳐야만 했다. 바로 이 때문에 거제만 지켜도 왜구의 노략질을 손쉽게 차단할 수 있었다.

앞서 고려 때는 들끓는 왜구에 밀려 거제도가 비워진 적도 있었다. 1271년 조정이 거제 군민들을 거창군 가조현(가조면)과 진주목 영신현(고성군 영오면)으로 집단 이주시켰다.(군사까지 옮기지는 않았다)

   
  거제질청.  

◇대마도 정벌과 거제도 수복

사정은 조선 개국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1419년 5월 왜구들은 충청도 비인과 황해도 해주를 침략했다. 이는 조선이 대마도 정벌에 나서는 직접 원인이 됐다. 6월 19일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는 거제 남쪽 주원방포(통영 한산면 추봉도)를 떠나 대마도를 들이치고 7월 3일 돌아왔다. 이어서 군사·외교적 실랑이를 벌이다 1421년 대마도 도주(島主)의 통상 요청을 받아들여 평화관계로 전환했다.

대마도 정벌이 마무리되자 조선 조정은 거제 되찾기에 나선다. 이듬해 세종은 거제현을 수복하고 사등에 치소를 두면서 1423년 거제도민을 돌아오게 한다(사등성 축조는 1426~1448년). 1432년 고현으로 치소를 옮겼으나 읍성(고현성)은 한참 뒤인 1451~1453년에 쌓았다.

수군 진영도 다듬었다. 거제도만 보면 1419년 웅천 제포(진해 제덕동)에 있던 경상우수영을 오아포(가배리)에 설치했다. 고성 가배량(통영 도산면 오륜리)과 고성 견내량에 뒀던 수군만호도 옥포로 옮겨 지키게 했다. 영등포·장문포·조라포·율포·지세포에도 진영이 있어서 오아포·옥포와 함께 7진을 이뤘다.

◇옥포대첩과 고현성 함락의 관계

조선 해상 방위의 요충이었기에 거제와 임진왜란·이순신 장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거제 일대 그리고 바로 맞붙은 고성 앞바다에서 많은 해전이 치러졌다. 한산도대첩은 견내량에서 벌어졌다. 거제 사등면과 통영 용남면 사이 한산도까지 좁고 기다란 이 해역에서 이순신은 1592년 7월 8일 학익진으로 왜군을 물리쳤다.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군도 여기를 통해 출전했다. 썰물 때 배를 띄우면 곧바로 쿠로시오해류를 타고 대마도까지 바로 갈 수 있다.

   
  옥포대승첩기념탑.  

옥포대첩은 원균과 이순신이 함께 싸워 일군 조선 수군 최초 승전이다. 5월 7일 조선 수군은 옥포만에서 노략질하던 왜군을 포위하고 함포를 쏘아 26척을 깨뜨렸다. 탈출한 왜선은 얼마 되지 않았고 배를 타지 못한 왜군은 뭍으로 달아났다.

이순신 전승·불패신화가 시작된 옥포해전에 두고 거제 사람들은 1957년 옥포만이 내려다보이는 당등산에 옥포대승첩기념탑을 세웠다. 대우조선해양이 들어서면서 대승첩기념탑은 1975년 아양공원으로 옮겨졌다. 1996년 지어진 옥포대첩기념공원에서 기념관은 판옥선 모양이고 옥포루에서는 옥포만이 보인다. 거세찬 왜군 기세를 꺾고 전라도 곡창을 지킨 조선 수군 첫 승전이 여기 있다.

그런데 고현성은 옥포해전 닷새 뒤(5월 12일) 왜군에 함락되는 난리를 겪었다. 당시 육지 올랐다가 조선 수군에 퇴로가 막힌 왜군이 저지른 일인데, 승전과 패전이 이런 식으로도 맞물리는 모양이다.

◇통영보다 먼저 있었던 통제영

경상우수영이면서 삼도수군통제영 구실도 했던 오아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593년 초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오아포에 삼도수군통제영을 뒀다가 이듬해 8월부터 한산도 등지로 옮겨다녔다. 1597년 2월 이순신이 파직되고 3월에 통제사가 된 원균은 통제영을 오아포로 다시 옮겼으나 칠천량에서 전사했고 8월 3일 다시 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전라도 고하도·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했다. 오아포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다시 통제영이 됐으나 1602년 5대 통제사 류형이 춘원포(통영 광도면 안정만)로 옮겼고 6대 통제사 이경준은 두룡포(지금 통제영 자리)로 다시 옮겼다. 거제가 '통영'이 될 뻔했었다는 얘기다. 오아포 일대를 지금은 가배리라 한다.

가배리 언덕배기 마루금을 따라가면 별로 허물어지지 않은 가배량성을 잘 볼 수 있다. 공격을 위해 불쑥 튀어나온 치(雉)도 볼 수 있고 통제영 시절 군선이 가득했을 앞바다도 내려다볼 수 있다. 통제영 관아 자리에는 주춧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거제대교 통영쪽 들머리 통영타워에서 내려다본 견내량. 보이는 다리는 옛 거제대교.  

◇고현성이 함락돼 옮겨진 기성관

거제면 소재지에는 거제향교와 기성관(岐城館)·질청이 있다. 객사로 쓰던 기성관은 정면 9칸으로 통영 세병관·밀양 영남루·진주 촉석루에 이어 경남에서 네 번째 큰 목조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지붕이 높다랗고 양쪽은 낮아 상승감을 느끼게 한다. 질청은 아전이 쓰던 행정실 또는 도서관이다. 27칸으로 ㄷ자형인데 수령 자제들 강학하는 공부방으로도 쓰였다.

지금 자리에 기성관 등이 있는 것도 임진왜란 때문이다. 거제읍성(고현성)이 왜군에 폐허가 되는 바람에 치소를 옛적 명진(溟珍)현 자리인 여기로 바꾸고 거기 건물들을 1663년 옮겨왔다. 거제가 임진왜란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신라~조선 후기 성곽 전시관

영등포성·옥포성·조라포성·지세포성·율포성·오량성·아주현성·중금산성·탑포산성·수월리산성·율포산성·다대산성·장목산성·하청성·성포산성, 그리고 왜군이 쌓은 견내량왜성·영등왜성·송진포왜성·장문포왜성…. 가배량성·고현성(거제읍성) 말고도 이렇게 많고 가장 나중에 쌓은 옥산금성과 삼국시대 처음 쌓은 둔덕기성(폐왕성)도 있다.

   
  옥산금성.  

사등성은 변한 12국 가운데 독로국의 왕성이라는데 자동차 달리는 한길에서 보면 돌담장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고즈넉함과 아늑함으로 푸근하다. 안팎에 민가가 들어서 원래 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들녘과 마주한 거뭇거뭇한 색깔은 옛날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기성관 뒤편 옥산금성은 화포의 발달로 전통 산성이 효력을 잃은 시점에 탄생했다. 1873년 거제부사 송희승이 거제 관아에 읍성을 쌓겠다고 했지만 고종 임금은 백성 부담이 크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송희승은 대신 산성을 쌓기로 하고 백성들 노력과 재산을 동원해 여덟 달만에 완공했다. 백성들 원성은 높았고 조정은 송희승을 파직했다.

성문을 통해 들어가면 여기저기 어우러진 바위들이 아기자기하고 올려다보이는 계룡산과 내려다보이는 바다 모두 그럴듯하다. 산성을 한 바퀴 돌면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도 든다. 게다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은 편이라 전통 축성 기법도 일러준다.

◇칠천량해전과 원균에 대한 평가

임진왜란 조선 수군의 유일한 패전도 거제에 있다. 2대 통제사 원균은 1597년 7월 칠천량에서 완패했다. 본인뿐 아니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도 전사했고, 한산 진영을 불사르고 달아난 경상우수사 배설이 갖고 있던 배 12척만 남았다.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에는 당시 전투가 재구성돼 있다. 애니메이션도 있는데 임금·고관대작·장군이 아니라 일반 수군·백성의 관점에서 다룬 내용이어서 새롭다. 칠천량해전만이 아니라 모든 전쟁이 참담하다고 일러준다. 되풀이하지 말아야 으뜸은 바로 전쟁이다.

원균을 무능하고 나쁜 인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객관 사실을 따라가다 보면 오해 또는 일부러 덧씌워진 이미지로 말미암은 측면 또한 적지 않다. 먼저 원균은 경상우수사로서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수영이 전멸한 가운데서도 적극 나서 왜군을 막았고 이순신과 합동 전투도 치렀다. 용렬하게 뒤로 숨는 지휘관은 아니었다.

이순신은 처음부터 이겼지만 원균은 그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두고 무능을 탓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순신은 임진왜란 1년 2개월 전인 1591년 2월 전라좌수사로 임명돼 시간이 넉넉했지만 원균은 1592년 1월 3개월 전에 경상우수사가 됐기에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1594년 3월부터는 충청병사 등 줄곧 육지에 있었기에 해전에 익숙지 못한 상태였다.

선무1등공신에 이순신·권율과 함께 원균도 책봉됐다는 사실도 있다. 공신도감은 이순신·권율만 1등에 올리고 원균은 2등으로 낮춰 선조한테 보고했다. 군사 없이 참전했고 패전한 과실도 있다는 이유였으나 선조가 다그치는 바람에 올려서 1등에 넣은 사실은 인정된다.

<선조실록>의 사신(史臣)은 "원균은 주함(舟艦)을 침몰시키고 군사를 해산시킨 죄가 매우 컸다"는 기록, "이순신·원균·권율은 혈전(血戰)한 공이 있었다"는 기록을 함께 남겼다. 이순신과 맞먹을 정도는 못 되지만, 그렇다고 무능하고 몹쓸 나쁜 존재는 아니고 나름 전공이 뛰어났다고는 할 수 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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