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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드나드는 곳에 안녕 바라는 마음 모였네

[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2) 사천

김훤주 기자 pole@idomin.com 2014년 06월 25일 수요일

◇지리산까지 이어졌던 사천 물길

남명 조식(1501∼1572)이 지리산 유람을 위해 첫 걸음을 내디딘 데가 사천이다. 두원중공업 가까운 축동면 구호리 언덕배기 쾌재정에 올랐다가 거기서 배를 타고 하동 화개까지 올라갔다. 남명은 1558년 4월(음력) 지리산을 둘러보고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남겼다. 남명은 4월 11일 삼가현 외토리 계부당(鷄伏堂)을 떠나 진주 자형 집에 사흘을 묵은 뒤 15일 여기를 찾았다. 사천군수 노극수는 고을 수령 자격으로 찾아와 술자리를 베풀고 배에다 술과 안주와 음식을 실어줬다. 남명 일행은 이틀 동안 곤양 바다를 지나고 섬진강을 거슬러 하동·악양을 거쳐 화개에 이르러 배에서 내린 뒤 여러 아전이 모시는 가운데 지리산 자락 쌍계사로 들어갔다.

지금은 아니지만 옛날에는 이처럼 물길을 따라 교통로가 열렸고, 그 딱 좋은 자리가 사천이었다. 지금 사람들은 사천만·광포만 같은 사천 갯벌이 아주 너르다는 사실을 두고 어떻게 그런 뱃길이 열릴 수 있었을까 미심쩍어한다. 바닥이 뾰족하고 모터로 프로펠러를 돌려서 움직이는 요즘 배를 두고 보면 당연한 의문이다. 하지만 바닥이 편평한 옛날 배는 프로펠러를 돌리지 않았다. 요즘은 바닥이 깊고 썰물과 밀물 차이가 적은 데가 좋은 항구지만 옛날은 바닥이 깊지 않고 썰물과 밀물 차이가 큰 데가 오히려 좋은 항구였다. 밀물을 타고 최대한 뭍에 가까이 올라왔다가 썰물 때 짐을 부린 다음 다시 밀물을 맞으면 배를 띄워 나갔다. 사천만에 흘러드는 많은 물줄기들이 펄(뻘)을 풍부하게 실어다 주기에 여기 너른 갯벌은 이뤄질 수 있었다.

   
  창선삼천포대교.  

◇갯벌이 낳은 석장승과 매향비

옛적 사천만에는 조창(漕倉)이 여럿 있었다. 만의 동쪽인 용현면 선진리와 사남면 유천리 조동마을에 통양창과 유천창이 있었고 서쪽 축동면 구호리와 가산리에도 제각각 장암창·가산창이 있었다. 조창은 고려·조선 시대에 조세로 거둔 곡식을 모았다가 옮겨가기 위해 강가·바닷가에 지은 곳집이다. 물론 같은 시기에 여러 조창이 있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통양창은 고려시대 조창이고 지금도 자취가 남아 있는 가산창은 조선 영조 때 생겼다. 사천이 지금은 항구 노릇을 못하고 있다. 모터 달린 배가 대세를 이루면서 좋은 항구의 조건이 달라졌다.

사천에는 그래서 갯벌 관련 유적이 많다. 남명 지리산 유람의 시점 쾌재정(지금은 자취조차 찾기 어렵지만)도 그렇고 퇴계 이황이 곤양군수로 있던 스승 어득강과 노닌 작도정사도 그렇고 가산마을 석장승도 그렇다. 가산마을 언덕배기와 당산나무 아래 저마다 남녀신장이 두 쌍씩 있었는데, 여신장 한 쌍은 도둑을 맞아 1980년 새로 세웠다. 다른 지역 석장승은 남녀 합해 한 쌍이 고작인데 여기는 모두 네 쌍이나 되니 남다르다. 사천 둘레 일곱 군현에서 거둔 공물을 모아 서울로 보냈는데 가산리석장승에 고사를 지내며 뱃길도 평안하게 해주고 조창도 잘 지켜주십사 빌었다(관립). 가산창이 없어진 뒤에도 남아 마을 지켜주고 고기도 많이 잡게 해주는 수호신이 됐다(민립).

   
  가산리석장승 남신장.  
   
  가산리석장승 여신장.  

갯벌 유적 가운데 으뜸은 사천매향비다. 고려 우왕 13(1387)년 미륵부처 왕생을 기원하며 갯벌에 향을 묻고 세웠다. 첫머리는 "많은 사람이 계를 모아 미륵불 왕생을 기원하며 향을 묻는다(千人結契埋香願王)"고 끄트머리는 "모두 4100(計四千一百)"이다. 4100명이라면 어마어마한 숫자다. 지금도 4000명 모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중앙귀족과 지역토호에게 겹으로 시달림을 받았던 당시 민중들의 바람이 간절했기에 가능했겠다.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에 이어 모든 중생을 구제하도록 운명지어 있는 희망불이자 미래불이다.

◇선진리왜성 사천전투·조명군총

사천은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처음 투입한 승전지이기도 하면서 왜군의 거점이기도 했다. 선진리 왜성이 그런 사실을 일러주는데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토성을 바탕 삼아 그 위에 쌓았다. 아쉽게도 요즘 들어 복원하면서 토성을 꽤 망가뜨렸다.

   
  선진리왜성.  

어귀 '조명군총'은 정유재란 이듬해인 1598년 10월 1일(음력) 조명연합군이 선진리왜성 왜군을 치러 갔다가(사천전투) 이기지 못한 결과로 생겼다. 4만 명 규모 조명연합군은 7000명 왜군에 밀려 식량이 불타고 괴롭힘을 당한 끝에 숱한 주검을 남기고 물러났다. 왜군은 숨진 군사들 귀와 코를 잘라 일본에 보내고 머리는 베어내 성 앞에 쌓고 묻었다. 귀·코는 일본 교토 도요쿠니 신사 앞에 묻혀 이총(耳塚:귀무덤)이 됐고 머리는 조명군총(朝明軍塚)으로 남았다. 옆에는 이총도 있는데 1992년 사천문화원 등이 일본 원래 이총에서 떼어온 흙을 안치하고 표지판을 세웠다. 전쟁으로 얼룩졌던 400년 전 뼈아픈 동북아시아 중세 역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솔사가 품었던 인물들

사천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이 바로 다솔사다. 신라시대 지어졌다는데 들머리 잘 자란 솔숲과 전통차, 소담스러운 분위기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과 극락전을 거쳐 오솔길을 오르면 옛적부터 가꿔온 차밭이 나온다. 거기 한가운데 은행나무 아래 서면 절간 전체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불교계 민족운동의 중요 거점이기도 했다. '님의 침묵'을 지은 만해 한용운은 1917~18년 이태 동안 머무는 등 12년 넘게 드나들었고, 1930년에는 응진전을 고쳐 짓기도 했으며 안심료 뜨락 황금공작편백 세 그루는 1939년 만해 회갑 기념 모임을 하면서 심은 나무이기도 하다.

   
  다솔사 적멸보궁.  

다솔사는 소설가 김동리도 품었었다. 1935년 등단해 1961년 문제작 '등신불'을 발표했는데 그 창작 배경이 다솔사다. 일제강점기 다솔사에 머물 때 여기서 소신공양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 바탕 위에 1960~61년 다솔사에서 창작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다솔사가 민족운동의 거점이 된 배경이 사천 출신 스님 최범술(법명 효당曉堂)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16년 출가한 최범술은 1920년대 불교계 항일 비밀결사 만당(卍黨) 조직에 앞장섰고 당수(黨首)로 추대된 이가 바로 만해다. 또 1934년 지역 민족교육을 위해 광명학원(光明學院)을 세웠는데 김동리는 여기에 선생님으로 와 있었다.

◇삼천포대교와 늑도유적

창선·삼천포대교는 사천의 새로운 명물이다. 삼천포대교·초양대교·늑도대교·창선대교 넷으로 이뤄져 있다. 제대로 느끼고 누리려면 자동차를 타지 않고 발품을 팔아야 한다. 그래야 철따라 달라지는 자연풍광이 바다와 다리가 어우러지는 정형화된 풍경뿐 아니라 사람 사는 속살까지 엿볼 수 있다.

창선·삼천포대교를 놓을 때 늑도유적이 발굴됐다.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 청동기시대 우리나라 최대 규모 유적지다. 일상 유물과 더불어 낙랑·중국·왜(일본) 등 바깥에서 들여온 유물이 엄청나게 나와 커다란 무역항이었음을 알려준다. 여러 사람들이 섞여 살았기 때문인지 무덤에서는 주검을 모신 다양한 형태가 확인됐다. 똑바로 누인 데도 있고 옆으로 눕힌 다음 팔·다리를 꺾은 데도 있고 엎어 놓은 데도 있고 개와 함께 묻은 데도 있다.

이보다 더 눈길을 끄는 유물은 탄화미와 시루다. 예나 이제나 늑도서는 논농사를 지을 수 없는데 그런 늑도에서 쌀을 주식으로 삼은 자취들이 발견된 것이다. 늑도가 아닌 다른 데서 쌀을 들여왔고 여기 살던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먹으면서 무역이나 그에 필요한 물품 생산을 전문으로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런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데는 없다. 다리를 내면서 남겨두지 않았고 여태껏 전시관을 짓는다 하고는 있지만 성과는 아직 없다.

사천은 비단 늑도유적뿐 아니라 다른 역사·문화 유물도 많지만 눈에 담을 거리가 적어 무척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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