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둔 작은 화분의 나무에서 또 잎이 핀다. 좁은 가지 틈에 어떻게 이토록 많은 잎이 숨어 있었는지, 잎이 견뎌냈을 기다림의 시간이 경이롭다. 바로 얼마 전 새로 핀 잎이 이젠 꽤 크게 자라서 제법 초록이 짙다. 식물이 주는 위안이 이런 것인가 보다.

지난겨울 이웃 할머니 한 분께 반찬을 나눠 드렸더니 화분을 답례로 주셨다. 뭔가 받으면 꼭 다른 것으로 보답하고 싶어 하는 것이 어머니들 마음인지라 괜찮다며 손사래를 쳐도 한사코 주셨다. 화분을 처음 받았을 때 심경은 뭐랄까 고마움보다 부담 반, 난감함 반이었다.

나는 식물을 잘 키우지 못한다. 어린 시절 봄이면 마당에서 지천으로 피어 나를 설레게 하던 꽃들의 기억이 생생하지만 내가 키우는 식물들은 오래 못 가고 죽었다.

선물로 받은 것을 잘 키우지 못한다면 그 마음의 부담도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냥 추운 밖에다 내버려 두었다. 물을 주지 않고 내심 얼른 죽어 나를 이 부담감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바라며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무는 점차 말라갔지만 쉽게 죽지는 않았다. 그런데 죽어가는 나무를 보는 일은 키우는 일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다. 어느 날 생각을 달리했다. 나에게 온 인연을 저버리거나 피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보기로.

시들어가는 나무에 물을 흠뻑 주고 마른 잎을 떼어내고 나니 조금 생기가 도는 듯했다. 나무를 본래의 작은 화분에서 뽑아서 분갈이를 했다. 무심코 지날 때는 몰랐는데 아파트 화단에 꽤 쓸 만한 빈 화분이 주인을 기다리며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그럴듯한 화분이 완성되어 거실 탁자에 놓아두니 이젠 혹시라도 죽을까 봐 노심초사다. 커피 찌꺼기를 거름 삼아 부어주고 유통기한 지난 우유도 주었다. 지극정성으로 돌보니 어느날 아침 새잎이 났고 얼마 후에는 꽃까지 피웠다. 이제는 물을 주고 잎이 새로 피는 것을 보고 시든 잎을 따주는 것이 큰 기쁨이 되었다. 식물은 시간이 아니라 사랑과 관심으로 키운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생각한다.

작은 화분 하나가 이러할진대 심지어 사람임에랴. 거실에 놓인 작은 사진 한 장에 눈길이 간다. 거의 10여 년 간 후원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두 아이 사진이다.

애초에 이들은 나와 아주 무관한 가난한 나라의 아이였다. 가난한 나라에 태어난 탓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불행과 가난의 원인보다 아이들이 놓인 현실에 주목하니 아이들의 문제가 나의 문제가 되었다. 물을 주고 분갈이를 시작하자 생기를 띠기 시작한 나무처럼 아이들도 사랑과 관심으로 그렇게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惡將除去 無非草 好取看來 總是花'(악장제거 무비초 호취간래 총시화). "밉게 보면 뽑아버려야 할 잡초 아닌 것이 없고 좋게 보면 모든 것이 꽃이 되어 나에게 온다." 이 평범한 진리의 말이 새삼 와닿는다.

더 일찍, 더 많이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그 나무에게. 그리고 우리 주변의 작고 약한 모든 존재들에게.

/윤은주(수필가·한국독서교육개발원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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