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68) 통영별로 34회차

지금까지 걸어 온 길과 앞으로 걸어 갈 길은 먼 고대에는 가야와 백제가, 뒤에는 신라와 백제가 교류와 전쟁을 수행한 경로입니다. 고려 말엽에는 남해안에 창궐하였던 왜구가 내륙으로 이 길을 타고 침투하기도 했습니다. 전북 남원으로 진격하던 왜구는 뒷날 조선 태조가 된 이성계의 활약으로 인월(引月)에서 궤멸당하였음은 지난 경로에서 이미 살펴봤습니다.

이 길이 해안에서 내륙으로 진입하는 중요 교통로였음은 임진왜란 때, 경상·전라 양도 의병이 진주성 방어를 위해 협력한 배경에도 잘 반영되어 있지요. 사근도 북쪽의 육십령(六十嶺) 이르는 길도 삼국시대에는 같은 기능을 하였으나 오르내리기가 만만찮아 대규모 병력은 우리가 지나온 통영별로를 이용하였음을 걸어보니 몸이 알아채더이다.

◇함양을 나서다

함양 고읍성(古邑城) 자리 신관리 관변마을에서 동쪽으로 사근역을 향해 나섭니다. 높지 않은 방아고개(방애골)를 넘어 함양을 벗어나니 고갯마루에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참전을 기리는 공원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고개 이름은 너머에 있던 방아골에서 비롯했으며, 내려 선 곳은 백천리 본백마을입니다.

방아고개를 넘어 함양을 나서다.

◇백천리에서 옛사람의 자취를 더듬다

본백마을과 척지마을 사이 구릉에는 옛사람들의 자취가 곳곳에 있습니다. 척지마을에는 고인돌과 백천리고분군으로 알려진 5~6세기 고총고분(高塚古墳:봉분이 크고 높은 옛무덤)과 돌덧널무덤이 떼지어 있습니다. 지금 이화요업 있는 자리에서 1980년 3월 25일~5월 25일 부산대 박물관이 대형 봉토분 5기와 작은 돌덧널무덤 21기를 발굴조사하였습니다. 공장 건축에 따른 구제발굴이었는데, 지금이라면 이곳에 공장이 들어서기 쉽지 않겠지만 유적은 이 공장을 비롯하여 변전소, 고속도로 입체교차로 등 탓에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에 나오는 여러 소국 가운데 하나이거나 그 하위 집단일 가능성이 높은 유적이 이렇게 훼손됐습니다.

도굴당한 상태로 남은 백천리 고분군 고총분.

아이러니하게도 유적의 입지가 탁월했기에 이런 훼손을 불러오지 않았을까 여겨집니다. 사근역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교통요충인 점, 높지 않고 비탈이 밋밋한 잔메(구릉)인 점, 토양 또한 고령토라 불리는 양질의 석비레인 점 등이 요업공장을 불러들였겠다 생각해 봅니다. 너무 잘나서 불러온 화를 보니, 역시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는 법임을 깨닫게 됩니다.

◇만덕총(萬德塚)과 구부총(九夫塚)

옛사람들은 이 고분군을 어떻게 인식했을까요? 선조 34년(1601)부터 37년까지 함양군수를 지낸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 : 1553~1623)이 이곳에서 보고 들은 바를 시로 읊고 산문으로 남긴 <태촌집> 제5권에 있는 <효빈잡록(效嚬雜錄)> 하 여화(餘話)에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만덕과 그 아홉 남편의 무덤(九夫塚)에 대한 시 '만덕총'을 실었는데, 풀이는 연민 이가원 선생의 <조선문학사>의 것을 옮깁니다.

"시집가는대로 죽어버려 이 삶을 보내니/ 아홉 번 과부되어 얼마나 상심했나/ 산허리에 열 무덤 나란히 놓여 있으니/ 천추만세 지하에서 월명에게 부끄러우리."

태촌은 이 시를 두고 "만덕도 사근역(沙斤驛) 여인이다. 아홉 번 시집갔으나 아홉 번 과부가 되었다. 사근역 사람들이 무덤을 연이어 장사를 지내주었다. 만덕이 죽자 또 아홉 무덤의 아래에 장사를 지내 열 무덤이 구슬목걸이처럼 연이었다. 월명총 아래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설화는 앞서 본 고총고분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월명총 아래에 있다는 구부총은 백천리고분군입니다. 옛사람들이 연주형(聯珠形)으로 분포하는 무덤을 그리 인식한 것으로서, 만덕총과 구부총 10기는 고분에 가탁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만덕총과 구부총은 가루지기타령의 근원설화와 닮아 있습니다. 강쇠와 옹녀가 실존 인물인지 여부는 차치하고, 설화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따로 있습니다. 열녀 월명(月明)의 무덤 아래에 구부총과 그 아홉 남편을 잡아먹은 만덕총을 병치한 것이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선악이 한 자리에 있지 아니한가요? 선한 열녀는 가장 높은 수지봉 꼭대기에, 남편 아홉을 앞세운 만덕총은 가장 낮은 곳에 둔 까닭이 무엇일까요. 또한 기우제와 관련해서도 왜 월명총에서만 비가 내렸겠습니까. 이미 태촌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 깊고 얕음이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월명총(月明塚)

만덕총과 구부총 관련 이야기가 음행을 경고하고 있다면,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양군 고적에 실린 월명총은 열행을 기리는 슬픈 사랑이야기입니다. "옛날에 동경(東京=경주) 장사꾼이 사근역 계집 월명(月明)을 사랑하여 며칠 머물다 갔다. 월명이 사모하다가 병으로 죽었으므로 여기에 묻었다. 뒤에 장사꾼이 무덤에서 곡(哭)하다가 또한 죽어서 드디어 같은 무덤에 묻혔다." 함양군수를 지낸 김종직은 "무덤 위에 연리지 푸르구나. 길손이 그를 위해 화산기(華山畿) 부른다. 지금도 달 없으면 여우 우는데, 꽃다운 넋은 나비 되어 날고 있겠지"라고 시를 읊었습니다. 화산기는 중국 남북조시대 짝사랑하다가 죽은 남자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상사병에 걸려 죽은 남자의 상여가 여인의 집 앞을 지날 때 움직이지 않자 여자가 나와서 "나를 연모하다 죽었다면, 나도 그대를 좇을 것이니 원한다면 열려 주오" 하니 관이 열렸고, 여자가 관 속으로 들어가니 모두가 놀라 꺼내려 하여도 이미 죽었으므로 할 수 없이 합장하고 노래한 것이 화산기라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황진이가 기생이 된 비슷한 이야기가 전합니다만, 강도가 훨씬 더하네요.

   

월명의 무덤이 있다는 수지봉(愁智峰)은 수동 삼거리에서 함양읍으로 이르는 들머리가 되는 백천리 남쪽 구릉을 일컫습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월명이란 마을이 있고, 수지봉 꼭대기에는 쌍분으로 조성된 월명총이 아직도 있습니다.

<태촌집>은 "월명은 사근역 여인이다. 남편을 생각하다 병사하여 산꼭대기에 장사하였다. 가뭄이 들었을 때 그 무덤의 흙을 무너뜨리면 비가 내린다"고 하였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다른 점은 기혼녀로 소개된 것과 가뭄들 때 무덤의 흙을 무너뜨리면 비가 내린다는 대목입니다. 역시 풀이는 연민 선생의 것을 옮깁니다. 제목은 '월명총'입니다.

"금석 같이 곧은 마음 갈아도 닳지 않고/ 낭군이 근심 끼쳤으나 무덤은 같이 썼네/ 능히 만세에 윤리를 세우게 하였고/ 농사철에는 비가 되어 내리기도 했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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