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고야 말았다. 곳에 따라 내리지 않은 데도 없지 않지만 오랜만에 많은 지역의 산과 들과 집과 거리들이 눈으로 덮여 푸근한 느낌을 주었다.
따뜻한 지역이다 보니 눈이 내리면 사람들은 없는 시간을 내서라도 눈구경하러 나가곤 한다. 멀리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도로 사정도 그렇고 무엇이 그리 바쁜지 일상사가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아쉬운 대로 번다하지 않고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마음을 씻고 올 수 있으면 그만이다.
젊은 남녀가 쌍을 이뤄 나가기도 하고 아이들 재촉에 못이긴 듯 온 식구를 데리고 나온 장년층 부부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눈이 젊은 치들 마음만 들뜨게 하는 줄 알았더니 웬걸,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점잖게 모자를 눌러쓰고 스카프로 목덜미를 두른 50대나 60대로 보이는 남녀도 자주 눈에 띈다.
함안 입곡저수지가 그랬다. 서로 상대방 목과 어깨 또는 허리 둘레에 자기 팔을 끼워넣고 보는 사람 ‘닭살’ 돋게 만드는 짝들도 있었고, 미끄러운 길을 무릅쓰고 아이들과 함께 나와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즐기는 축들도 있었다.
물론 이 모든 일에 오불관언하고, 저수지 이쪽저쪽을 따라 산책을 즐기는 나이 지긋한 이들도 군데군데 보인다.
여느 시골이 다 그렇겠지만 함안은 좀 별다른 구석이 있는 곳이다. 고개를 넘으면 들판이 펼쳐지고 들판길을 죽 따라가다 보면 어느 결에 한 모롱이 돌면서 골짜기로 접어든다. 아니면 새로운 기세로 일어나는 산이 앞을 가로막거나.
마산에서 지방도를 따라 가다 처음 만나는 ‘입곡군립공원’ 표지를 따라 들어가면 고개 너머 들판 한가운데서 입곡 마을을 만나게 된다. 왼쪽은 들판이고 오른쪽은 야트막한 산들이 첩첩 싸여 있다. 앞으로 나 있는 길은 고개를 만나게 돼 있으니 커다란 저수지가 있을 만한 데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표지판도 없으니 한참을 헤매다가 길 가의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물어볼 수밖에. 그랬더니 길 오른편 산 첩첩 한가운데로 들어가라는 게 할머니의 분부시다. 과연 얼마 가지 않아 다리가 나오고 깃발이 나오더니 물이 짙푸르게 출렁이는 입곡저수지가 눈에 들어온다.
못 저쪽 건너편은 눈 내린 당일인데도 햇볕에 쪼여 눈이 자취도 없다. 이쪽은 채 녹지 않아 길조차 질척거리고 못둑에는 사람이 닿은 적이 없는 듯 하얀 눈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고개를 들면 응달진 이쪽 산기슭에도 제법 많은 눈이 남아 있다. 갑작스레 이상 고온이 들지만 않으면 적어도 며칠은 사람 발길을 끌어당길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다.
못은 조용하고 서늘하다. 깊이가 꽤 되는지 얼음조차 얼지 않았다.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에 온몸을 내맡기고 솜털처럼 물결이 가늘게 떨린다.
위에는 청둥오리쯤 돼 보이는 철새들이 100마리 남짓 떠 있다. 무엇에 놀란 듯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날개를 털기도 한다.
옆에는 차가운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새들을 손가락질하며 낮게 소리를 지르는 이들도 있다. 건너편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는 산책로에도 청바지와 흰색 스웨터를 젊게 입거나 반코트를 차려 입은 남녀들이 수월찮게 오간다.
들머리 옆구리에는 널찍한 운동장도 마련돼 있고 높다랗게 그네도 하나 매달려 있다. 알맞은 곳을 찾아 불을 피워서 간단하게 요기를 할 수도 있는 모양이다. 건너편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는 산책로에는 농구장도 하나 눈에 띈다.
이쪽저쪽 둘러가며 물가에 솟은 바위는 작으나마 아름다움을 뽐낸다. 저수지 끝막음 하는 데서는 쏴아쏴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어둘만하다.



△가볼만한 곳-모곡리 고려동 유적지

입곡저수지 근처 산인면 모곡리에 고려동 유적지가 있다. 마산에서 가다보면 오른편 문암초등학교가 있는 데에 고려동 유적지를 알리는 표지판이 함께 있으니 찾기는 쉽다.
학교를 끼고 오른편으로 들어와 수동마을을 지나면 장내 마을이 나온다. ‘장내’라……, 무슨 뜻일까. 행정부의 말글정책을 생각하면 한 번씩 꼭지가 돌 때가 있다. 다녀와서 알아보니 장내(墻內), 곧 ‘담안’이라는 말이란다.
말하자면 고려말 목은 이색.포은 정몽주.야은 길재와 더불어 충의를 소중히 여긴 모은(茅隱) 이오(李午)가 고향에 내려와 살면서 담을 쌓고 “담장 밖은 조선 영토라도 ‘담안’은 고려 땅”이라 했다는데, ‘장내’라고 해 놓으니 보는 사람 멍청하게 만들고 동네 역사 모르게 하는 어리석은 짓이 아니고 무엇인지.
재령 이씨 족보에는 이오의 할아버지가 공민왕의 부마로 상장군을 지냈다고 돼 있다. 또 맏형 신(申)은 공양왕 때 이성계의 등극에 반대하다가 유배지로 가는 도중 숨을 거뒀으니 아우 오는 개성 두문동에 72현과 함께 숨을 만했고 고향 마을을 고려동이라 하여 고려답에 농사짓고 고려정의 물을 마시며 살 만도 했겠다.
조선 왕조는 이오를 왜 그대로 두었을까. 체제 지탱에 큰 해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겠다. 조선은 사대부가 다스리는 유교의 나라였다. 충의는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였고 이를 지키고자 한 모은은 후대로 갈수록 지배윤리를 단단하게 해주었으리라고 짐작해 보는 것이다.
표지판의 19대 600년 동안 종손들이 벼슬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손자 대에 맹현이라는 이가 관찰사를 했고 1600년대에는 퇴계의 학풍을 이은 영남학파의 거두가 된 후손이 나와 우암 송시열의 기호학파와 맞서 당쟁을 벌이고 이조판서가 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종손만이라도 이처럼 사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래도 먹고 살만 하니 그랬으리라는, 서로 어긋나는 생각이 한꺼번에 들기도 한다.
담안 마을에 들어서면 자미단에 굵은 배롱나무가 겨울나무로 서 있다. 빙 둘러보면 솟을 대문이 곳곳에 있고 집 안쪽에는 어머니와 아이와 아저씨가 함께 보인다.
옛집들은 사람이 살지 않고 비어 있기 십상인데 여기는 그렇지 않다. 감나무가 열 걸음쯤 간격으로 띄엄띄엄 서 있고 처마 밑에는 메주가 달려 있다. 아이들은 축대와 마당을 오가며 강아지를 놀린다.
마을 뒤쪽에는 대나무가 우거져 있다. 개울을 더듬는 눈길 끝에는 밭둑이 나오고 그 아래 집에는 사당인 듯한 건물도 보인다. 비록 길바닥이 콘크리트로 깔려 있고 대문 기둥마다 전기 계량기가 붙은 게 우습기도 하지만 실감나는 옛집은 참 오랜만에 보는 셈이다.


△찾아가는 길

입곡 저수지 찾아가는 길은 전혀 어렵지 않다. 마산.창원에서는 국도를 따라 내서쪽으로 오다가 마재고개를 지나 중리공단으로 들지 말고 동신아파트를 지나 함안으로 가는 1004번 지방도로 접어들면 된다.
마산대학을 끼고 도는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 고개를 넘으면 4분의 3은 온 셈이다. 고개를 내려오는 곳에 농공단지가 하나 서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길 따라 5km 정도 더 달리면 입곡군립공원을 알리는 높다란 입간판이 왼쪽에 잇달아 나온다.
첫 번째 입간판을 따라 들어가면 철도 건널목을 지나 고개를 넘어 만나는 입곡마을에서 오른쪽으로 꺾어들어야 하고, 마산과 함안 가야읍을 잇는 도로 확장 공사를 하느라 세운 고가도로와 마주치는 데 있는 두 번째 입간판을 따라들어가면 헛갈리지 않아 좋다.
진주쪽에서 오는 길이라면 남해고속도로 함안 나들목에서 빠져 나와 가야읍으로 들어온 다음 지방도 1004번을 따라 마산쪽으로 4km 정도만 가면 된다.
경남 기념물 56호로 지정된 고려동 유적지도 찾기 쉽기는 매한가지다. 같은 1004번 지방도에 붙어 있는데다 3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입곡저수지에서 마산쪽으로 오다가 보면 왼쪽으로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안으로 들어가서 수동마을을 지난 뒤에 길 따라 가다보면 꽃밭처럼 보이는 고려동학 비석이 있는 데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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