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1) 통영

신문이나 방송은 지역적인 것 대신 전국적·세계적인 것을 주로 다룬다. 학교나 학원도 다르지 않다. 지역 주민들이 지역을 제대로 모르는 원인이다. 고장 사랑의 뿌리라 할 역사·문화 분야도 마찬가지다. 정치·경제는 지역에서 애써도 한계가 뚜렷하지만 역사·문화·생태는 애를 쓰면 쓰는 만큼 지역주민 스스로가 자랑스러워하고 아낄 만큼은 성과가 난다. '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이라는 기획을 10월까지 스무 차례 싣는 까닭이다. 취지는 고장에 사는 어른·청소년·어린이는 물론 떠난 이들에게도 지역의 속살을 조금이나마 더 알고 애틋한 마음을 갖게 하자는 데 있다.

◇삼도수군통제영 주전소

도시 이름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나왔다. 해군사령부격인 통제영은 1593년 이순신 초대 통제사 시절 한산도(통영)에 설치됐다가 가배량(거제) 등을 거쳐 1604년 제6대 이경준 통제사 시절 지금 자리(당시 고성 두룡포)에 들어섰고 1895년 고종이 폐지할 때까지 292년 동안 이어졌다.(마지막 홍남주(洪南周) 통제사는 제209대.)

통제영은 군수물품이 필요했다. 창·칼만 아니라 통제사가 쓰면 부채도 군수물품이었다. 조정의 물품 진상 요구도 계속됐다. 옻칠·자개·목기·대발 따위로 이름난 십이공방(十二工房)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십이공방이라 해도 공방이 열두 개는 아니었다. '아리랑 열두 고개', '열두 번도 더 했다' 따위에서 보듯 '꽤 많다'는 뜻으로 숫자 '십이'를 붙였다. 300년가량 이어진 십이공방은 통영이 빼어난 예향(藝鄕)이 된 원인 가운데 하나다.

8년 동안 복원해 올해 3월 새롭게 문을 연 통제영. /김훤주 기자

서포루에서 한눈에 보이는 통제영은 8년 동안 복원해 2014년 3월 새롭게 문을 열었다. 옛날 그대로인 건물은 객사인 세병관밖에 없다. 간악한 일제도 세병관만은 허물지 못했다.(통제영은 외세에 맞서는 민족정신도 남겼다.) 되찾은 옛 모습은 절반 정도뿐이지만 통제사의 운주당(집무실), 내아(사택), 득한당(휴게실), 주전소터와 후원과 십이공방은 나름 짜임새가 있다.

가장 눈여겨볼 데는 주전소터다. 쇳물을 부어 엽전 만들던 자리와 창고로 쓰였음직한 건물 자리 둘이 있는데 우리나라 하나뿐인 주전 유적인데도 아직 눈길을 끌지 못하고 있다. 이 주전소는 통제사의 드높은 지위와 드센 권한도 보여준다. 통제사 통제와 관장 아래 독자적으로 화폐를 제조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서 하나뿐인 주전 유적인 삼도수군통제영 주전소.

◇바다의 땅

바다는 풍성한 산물도 기약하지만 고통도 주고 때로는 목숨까지 내놓으라 강요한다. 바다 고기잡이는 들판 농사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하다. 사람은 위험할수록 더 기대려고 한다. 바닷가에는 절실한 마음을 담아 전지전능한 존재에게 비는 의식이 많다.

삼덕항 벅수들이 그런 존재다. 벅수 앞에서 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십사, 배가 파도를 이기고 탈 없이 돌아오게 해주십사 빌고 또 빈다. 삼덕항에는 바다의 땅이라 생겨난 역사적 사실도 기록돼 있다. 포르투갈 사람 주앙 멘데스. 1604년 일본으로 무역하러 가다 풍랑을 만나 떠밀려왔다. 통영시는 2006년 '최초 서양인 도래비'를 세웠다.(기록상 최초 도래 서양인은 1582년 제주도 표착 신원불상 인물이며 두 번째는 1593년 진해 웅천 상륙 에스파냐 출신 왜군 종군신부 세스페데스다.)

바로 옆 당포성도 바다의 산물이다. 왜구가 들끓던 고려 말기부터 임진왜란을 치러낸 조선 시대까지 선조들 피땀이 어린 곳이다. 최영 장군의 승전지인데 이 때문인지 최영은 남해안 곳곳에서 수호신으로 남았다. 당포성과 마주보는 우람한 장군봉은 일대가 한눈에 장악되는 전투지휘소이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도 1592년 6월 2일(음력) 이곳 당포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삼덕항이 당시는 군항이었는데, 침략을 막기 위해 목책(木柵)도 설치돼 있었다. 당포성에 오르면 시원한 바람이 불고 바다가 한눈에 든다. 통통 엔진 소리 분주한 삼덕항도 보인다. 내려올 때는 마을 고샅을 누비는 재미도 있다.

옛 사람들이 바다에 나가기 전 안녕을 빌던 삼덕항 벅수.

◇화산활동이 낳은 통영 암석

통영은 중생대 백악기 화산활동이 활발했다. 화산활동을 증명하는 안산암이 대부분 지역을 덮고 있다. 용암 단일 성분으로도 이뤄지지만 많은 경우 자갈·모래·진흙 또는 다른 바위들과 뒤섞인다. 통영 옛 건축물에 쓰인 돌 대부분은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암석이다. 안산암 등 화산성 암석은 물러서 떼기도 쉬웠고 다듬기도 좋았다. 갈아내는 기계가 없었어도 곱게든 거칠게든 뜻대로 할 수 있었다.

삼덕 고개 벅수, 삼덕 당산나무 벅수, 통제영 앞 문화동 벅수 모두 표면 처리가 거칠다. 그래서 더 퉁명스러워도 보이지만 좀더 친근하게 여겨지게도 한다.

통제영 옛날 계단도 이런 돌이다. 지과문을 받치는 거북 모양(해태라고도 함)도, 복원 과정에 발굴된 기삽석통(旗揷石桶:수자기(帥字旗) 꽂던 돌통)과 석인(石人:동서남북중 오방기(五方旗)를 품었던 돌인형)도 이런 돌로 만들었다. 통영 바닷가 파도에 깎이고 바람에 닳은 기암괴석도 다 이래서 생겼다. 세병관 축대, 통제사 선정비들, 두룡포기사비도 마찬가지다.

◇옻칠미술관과 박경리기념관

전통과 현대 모두 통영 출신 예술가는 많지만 시설로는 통영옻칠미술관과 박경리기념관이 그럴듯하다. 1935년생인 통영옻칠미술관 김성수 관장은 옻칠공예를 몸소 발전시키면서 세계에도 널리 알렸다. 김 관장을 따르면 옻칠이 중국산만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며 우리의 고유한 옻칠이 따로 있고 한국 옻칠의 본고장은 경남이다. 창원 다호리 고분군의 옻칠 나무와 철기가 중국식이 아닌 우리식이고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도 옻칠이 됐기에 썩지 않으며 십이공방에도 옻칠이 있다…. 옻칠 예술품도 있고 실용적인 소품도 있는 여기서는 바다도 내려다볼 수 있다.

옻칠공예를 세계에 널리 알린 김성수 통영옻칠미술관장.

박경리기념관과 박경리 묘소는 들어선 자리가 아주 좋다. 멀리 봉전항 앞바다에는 하늘빛이 드리고 가까운 야산은 철따라 꽃과 잎과 가지로 장면을 바꾼다. 기념관은 선생의 일생과 작품 세계를 알기 쉽게 정리했고 <토지>와 <김 약국의 딸들> 같은 작품에서 통영이 어떻게 형상화돼 있는지도 일러준다. 묘소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곳곳에 선생의 육필 원고, 시편과 산문이 잘 놓여 있다. 지나가며 설렁설렁 읽어도 새겨진 뜻이 마음에 제대로 새겨진다. 묘소 앞에서 고개 숙여 인사한 다음은 돌아서서 멀리 풍경을 꼭 봐야 한다. 선생이 여기 누워 저 편안한 풍경을 보고 있구나….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