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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읍성 떠나 원형 함양읍성 만들었을까

[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67) 통영별로 33회차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webmaster@idomin.com 2014년 06월 09일 월요일

전북 남원에서 팔량치를 넘어 경남 함양에 들 때 사근도에 속한 제한역까지 옛길을 걸었습니다. 제한역은 삼거리인 덕거리 남쪽에 있는데 이곳서는 제한을 지안이라 불러 지금도 이름이 그런 마을과 고개가 있습니다. 덕거리에서 가는고개를 넘어 함양을 지나 사근도의 본역이 있던 수동면소재지를 향해 나섭니다. 가는고개는 가랑고개 또는 갈은고개라 하는데, 난평리와 사이에 있는 낮은 잽니다.

난평리(蘭坪里)는 마을 앞으로 들이 열려 있어 난들이라 하다가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려 난평이라 했다고 전합니다. 중심 마을 관동은 예전 함양의 소재지라 붙은 이름이라지만 달리 갓거리라 하니까 어디의 가·가새(가장자리)로 새겨야 할 듯합니다. 함양 옛 소재지 운운은 이곳에 있던 사창에 가탁한 이야기이고, 이리로 옛길이 지났음은 마을 동남쪽 비석거리 또는 비전(정)거리 지명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이곳에 비석이 있었는데 돌무더기 속에 묻어 버렸다고 합니다. 옛길의 자취가 또 하나 지워졌습니다.

마을 동쪽 들머리에 늙은 나무 몇 그루가 있고, 그 아래에 바위와 그 주위를 돌로 쌓은 축대가 있습니다. 바위에는 와룡대(臥龍臺) 석 자를 세로로 새겼고, 몸통에 인줄을 두른 느티나무는 마을의 당산(堂山)나무입니다. 정월대보름이 지난 얼마 뒤 여기를 지날 때, 부정을 지우려고 뿌린 황토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으니까요. 마을 동쪽의 옥터-거리와 그 옆의 조산(造山)-거리를 지나면 구룡제에서 나오는 길과 만납니다. 함양군이 '소풍가는 길'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고즈넉한 품새가 좋습니다.

이즈음이 이은리와 경계를 이루는데, 마을 이름은 이곳에 있던 이은대(吏隱臺)에서 비롯했습니다. 인당으로 가는 고개 들머리의 길가 북쪽 바위에 빗돌은 어떤 면장의 공적비입니다. 주위 바위에도 세 군데나 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맨 뒤 글은 뒤에 모신 어느 문중의 무덤과 관련이 되고, 그 앞은 바위의 이름이며, 맨 앞은 바위를 갈아내어 새긴 마애비입니다.

예서 시내와 헤어지며 함양읍내로 이르는 두재-고개를 오릅니다. 고갯마루 북쪽 효자문에는 돌로 만든 빗집에 '효자사인장치권지려(孝子士人張致權之閭)'라 새긴 빗돌을 모셨습니다. 선비 효자 장치권은 <함양군지>에 "어머니 병환에 하늘에 빌었더니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좋은 약을 가르쳐 주므로 구해 드려서 효험을 보았다"고 전합니다. 정려를 내린 때는 같은 책에 고종(高宗) 무자년 1888년이라 했습니다.

◇함양읍성에 들다

고개를 내려서면 백연리가 나오고, 그 이름은 이곳에 있던 백연서원에서 비롯했다고 전합니다. 난평삼거리, 국유림사무소를 지나 위천(옛 이름 뇌계)을 건너 함양읍내에 듭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양군 산천은 "뇌계는 군 서쪽 1리에 있다. 근원이 백운산이며 동쪽으로 흘러 사근역 가에서 남계에 든다"고 했습니다. 내를 건너 북쪽으로 가면 농협하나로마트에서 함양읍성의 남문으로 들게 됩니다. 지도와 위성사진을 보면 함양읍성은 평면이 다른 읍성과 달리 원형입니다. 위 책에는 읍성이 원래는 군의 동쪽 2리에 있었다고 나옵니다.

   
  함양읍 신관리 관변마을에 남아있는 옛 관아 자리 뒤로 백암산이 보인다. /최헌섭  

읍성이 옮겨온 배경을 "홍무 경신년(1380)에 청사가 왜구에게 불탔다. 관아를 문필봉 밑으로 옮기고 흙을 쌓아 성을 만들었다. 둘레는 735척이고, 나각(羅閣)이 243칸이다. 문이 셋인데 동쪽은 제운(齊雲), 남쪽은 망악(望岳), 서쪽은 청상(淸商)이다"라 적었습니다. 홍무 경신의 난리가 바로 지난 여정에서 살핀 왜구의 침입이니, 당시 피해가 얼마나 심했는지는 앞으로 사근역에서도 처절하게 보게 됩니다.

이곳은 연해지역이 아니라 돌이 아닌 흙으로 쌓다 보니 평면이 둥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영조 때인 1765년 부사 김광(金洸)이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고 하나 형태는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당시 가로망은 동·서·남문을 잇는 'T'자였습니다. 남문은 하나로마트와 상림약국 사이 남문거리에 있었고, 문루는 망악루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양군 누정에서는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까닭"이라 했습니다.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 남악(南岳)인 거지요. 지금은 상림 안으로 옮겨 함화루(咸化樓)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학사루

남문 자리를 지나 성안으로 드니 동서대로인 고운로와 만나는 남서쪽에 학사루가 있습니다. 위의 책 누정에는 "학사루는 객관 서쪽에 있다. 최치원이 태수로 있으면서 자주 등림(登臨)하던 곳이라 학사루라 한다"고 나옵니다. 지금 건물이 당시의 것은 아닙니다. 앞의 책에 뒤에 왜병에게 불탔는데, 관아를 옮길 때 누각도 옮겼는데 이름은 그대로 이었다 했으니까요. 옛 함양읍성 안에는 이 누각과 느티나무 등을 빼면, 당시 모습을 헤아릴 만한 게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윤곽을 유지하던 성의 평면 모습도 군청 북쪽으로 주차장과 운동장을 만들면서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함양에서 보존에 대한 관심은 온통 상림(옛 이름 대관림)에만 쏠려 있어 안타깝습니다.

학사루를 살피고 학사루 느티나무를 지나 동문을 빠져나옵니다. 동문사거리라는 이름이 남아 자리를 가늠하게 해줍니다. 옛길을 덮어쓴 고운로를 따라 시외주차장 즈음에서 시내를 벗어나면, 멀리 북쪽으로 이마에 새하얀 백운모 화강암이 시원한 백암산(621.4m)이 한눈에 듭니다. 27년 전 가을 그 바위 아래 절터를 조사하느라 헤맨 기억이 새삼스레 떠오릅니다.

   

◇신관리의 고읍성(古邑城)

백암산이 바라보이는 신관리 관변마을은 옛 함양군 관아 자리입니다. 함양농협 집하장 뒤쪽으로 고읍성터가 잘 남아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군성의 동쪽 2리에 있다고 했고, <천령지>에는 "고읍성은 관변리(官邊里)에 있다. 4리 거리인데 지금은 없다"고 나오며, <만기요람> 군정편4 경상도 함양에 "고읍성은 토축이고 둘레는 735척이다. 왜구에게 점령된 적이 있으며 지금 읍성으로 옮겼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고읍성은 충적지와 이어지는 얕은 구릉을 의탁하여 흙으로 쌓은 평산성(平山城)입니다. 흙을 시루떡처럼 켜켜이 다져 쌓은 판축토 속에는 기와도 섞여 있습니다. 평면은 네모꼴인데, 남쪽이 낮아 그곳으로는 열려 있는 듯하고 북성벽과 동·서성벽은 꺾쇠 모양으로 잘 남아 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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