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건의 살인과 한 건의 자살. 혹은 도합 13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 끔찍하지만 흔하디흔해진 이 나라의 일상을 떠올리게 하는 중국의 이야기. 얼마 전 개봉해 많은 관객과 평자들의 지지를 받았던 지아장커 감독의 <천주정>(天注定)은 선뜻 '좋은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작품이다. 중국 당국에 '상영금지' 조치를 당하면서까지 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근원을 파고든 용기엔 박수를 보내지만 영화적으로 뭔가 새로운 성취를 이루어낸 것 같진 않기 때문이다.

북부 산시에서 남부 둥관까지 중국 곳곳에서 일어난 각기 다른 성격의 실제 사건들이다. 복수와 응징이 있고 무차별적인 살상이 있으며, 방황과 좌절 끝에 자살도 있다. 영화는 이들이 별개의 사건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사건의 가해자, 피해자, 관련자들은 길을 가다 차를 타다 우연히 마주치거나 같은 공간에서 고용-피고용인 등의 관계로 만난다. 서로는 서로의 삶과 우주를 전혀 모르지만 감독의 의도는 명확하다. "나는 그들이 섬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들 사이에 다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지아장커)

영화 <천주정>의 마지막 장면. 거리에서 경극을 구경하는 시민들의 시선이 마치 스크린 바깥의 '나'(관객)를 응시하는 듯하다.

그 다리의 존재를 지우고 교감의 여지를 차단해, 끝내 사적 폭력까지 선택하게 만드는 거대한 '공적 폭력'은 물론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 '자본주의 중국'이다. <천주정>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성격은 좀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자장 안에 있는 네 개의 사건을 끌어온다. 그러다 영화 마지막에는 첫 사건이 일어난 산시로 돌아가 경극을 구경하는 시민들의 얼굴을 비추는데, 마침 그 순간 무대에선 억울함을 호소하는 한 여인을 향한 "너의 죄를 네가 알렷다!"는 판관의 추궁이 들려온다. 물론 그렇다. 폭력에 침묵하고 순응하는 시민들, 나아가 시민들이 응시하는 스크린 바깥의 '나'(관객)에 대한 추궁이고 질문이다. 폭력의 영향으로부터, 폭력의 책임으로부터 당신들은 자유로울 것 같은가, 라는. 극단으로 밀려간 사건 당사자들과 우리들 사이에 희미하게나마 연대의 다리를 놓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정치적 잣대로만 보면 <천주정>은 크게 반박할 게 없다. 문제는 이야기의 전개나 은유와 상징을 담은 장면 장면이 너무 도식적·작위적이거나 과해 보인다는 데 있다. 사건들은 별 의미 없이 나열과 반복을 거듭하고 피상적으로 이어 붙여진다. 때로 '아름답게' 묘사되는 폭력의 미학화는 진정 감독의 태도가 무엇인지 의아하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 또한 벌여놓은 이야기를 어떻게든 수습하고자, 그러면서도 뭔가 메시지를 잃지 않고자 뜬금없이 끼워 넣은 인상이 짙다. 목적의식의 과잉이 빚어내는 불편함이랄까? 사실 '정치적 올바름'(?)으로 겹겹이 무장한 영화는 우리에게 더없이 익숙하다. 지난 대선 즈음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던 <26년> <남영동 1985> <변호인> 같은 유의 영화들. 하지만 1980년대에 머물러 있는 듯한 퇴행적 접근법으로 결코 '정치적'으로 지지할 수 없었던 영화들.

<천주정>은 또 다른 '실패의 사례'로서 폭력의 문제, 체제의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고 또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고민을 던진다. 분명 많은 의미가 있는 영화이지만 '지지받을 수밖에 없게' 만든 영화가 흔히 저지르는 문제점도 고스란히 안고 있다. 무엇보다 자기도취의 함정. 의도와 메시지가 정당하면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 있고 보편적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 또는 맹신.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풍경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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