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위기 절감하고 정책운동 나서…진보당 이미지 호전 안돼 골몰

강병기(54) 통합진보당 경남도지사 예비후보는 처음 정치를 시작할 때 농민의 정치적 도구가 되기로 결심했다. 농업이 근본적인 위기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정치를 바꾸지 않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농민의 '대표선수'로 정치판에 뛰어든 것이다. 지금은 자신이 도구가 되어 힘써야 할 대상이 서민과 노동자로까지 확대됐다.

이번 선거에서는 그의 결심이 결실을 볼 수 있을까?

◇농민대회 = 2002년 11월 13일. 늦가을이었고 흐린 날이었다. 한강의 찬 기운이 더해져서인지 서울 여의도는 꽤 쌀쌀했다.

무대가 세워진 여의도 둔치에 사방에서 바다로 흘러드는 강물처럼 밀려들었다. 5m 이상 높이의 단상 위에서 바라보는데도 모여든 인파의 끝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날 모인 사람은 젊은 농민부터 허리 굽은 할머니·할아버지 농민까지 무려 13만 명이었다. 우리나라 농민 행사로는 전무후무한 규모였고, 다른 분야 행사까지 포함해도 전국에서 이만큼 많은 인원이 하나의 목적으로 한 장소에 모인 것은 드물었다. 농민은 이 자리에서 정부에 농산물 수입개방에 대한 근본 대책을 요구했다. WTO, FTA라는 거대한 쓰나미 앞에 위기감을 느낀 농민의 외침이었다.

이 행사를 주도적으로 이끈 사람이 바로 그다. 그가 전국농민회 사무총장을 거쳐 정책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30만 농민대회' 개최 계획이 결정됐다. 당시 사정이 농민에게 절박하기는 했지만, 30만 농민을 모으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농민 집회는 전국 규모라 하더라도 가장 많이 모인 것이 3만 5000명 수준이었다. 그런데 30만 명은 그 10배에 가까운 규모다. 그런 방침에 대해, 책상머리에서 불가능한 투쟁 방침을 세워 강행하려 한다는 내부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그는 "지금까지 해온 상식적인 투쟁으로는 현재의 어려운 국면을 헤쳐나갈 수 없다"며 행사 개최를 이끌었다. 주차와 이동 문제가 심각했다. 전국의 농민이 버스로 여의도에 집결하게 되면 여의도는 물론이고 그 주변지역까지 온통 교통이 마비돼 행사를 치를 수 없게 될 처지였다. 당시 진주시농민회 한 곳에서만 167대의 전세버스가 동원되었을 정도로 전국의 전세버스가 모조리 이 농민대회에 투입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전국 광역도 단위로 참가 규모를 파악해, 도착지를 서울 전역으로 분산시켰다. 예를 들어 경남은 서울 남부지역까지만 버스를 타고 와서 여의도까지는 지하철로 이동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지침을 받은 전국 각 도 연맹은 참석할 농민이 대부분 노인인데 지하철을 타고 오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반발했다. 그에게 숱한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는 냉철하게 대처했다. 원칙을 고수했다. 그는 항의하는 도 연맹에 "모두 버스를 타고 여의도까지 들어오면 교통정리를 못 해서, 집회는 열어보지도 못하고 우리끼리 싸우다가 내려가게 된다"고 설득했다.

만일 그때 그가 비난에 굴복해 지침을 거둬들였다면 현재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있는 그 농민대회는 성사되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그 후 전농 정치위원장을 지냈고, 농민의 정치세력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제사 = 대학을 졸업하고 진주가톨릭농민회에서 활동가로 일하며 농사를 짓던 그는 경북 안동에서 농민운동을 하던 김미영 현 진주시의원을 만나 결혼을 했다. 두 사람은 작은 셋방을 얻고, 소작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운동을 계속했다. 매일같이 회의와 행사, 집회가 이어지다 보니 농사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빚이 점점 늘어나 살림살이가 힘들어졌다. 그는 결혼할 때 장모와 아내에게 "장인어른 제사는 꼭 안동 가서 모시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제삿날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주머니가 비어 있어 냉가슴을 앓았다. 당시 개값이 좋은 시절이었고 마침 집에서 키우던 개가 한 마리 있었다. 부부는 그 개를 팔기로 했다. 문제는 그 개가 평소에 묶어놓고 키우는 개가 아니어서 잡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부부는 귀한 라면 하나를 끓여서 부엌에 두었다. 그 냄새를 맡고 개가 들어오자 부엌문을 확 닫았다. 부부는 개를 팔아서 안동으로 갈 수 있었다.

◇어머니의 웃음 = 1960년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 한 농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했기에 집값이 싼 시골이었음에도 이사가 잦았다. 어린 시절 그와 여동생이 앉아서 이사를 한 횟수를 꼽아보니 스물여섯 번이나 됐다. 그 이후에도 이사는 계속됐다.

어린 시절 그의 목표는 어머니가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생활이 궁핍했고,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어머니에게 폭력을 가하는 날이 많아 어머니의 얼굴에는 항상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공부였다. 고등학교까지 장학금으로 학비를 충당했다. 그는 공짜로 다닐 수 있는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하고자 했지만, 성적이 아니라 '부정맥'이라는 신체조건과 연좌제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다. 그가 어머니의 웃는 모습을 보려면 안정적이고 취직이 잘 되는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그는 고등학교 문과를 졸업했지만 그 시절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육성하던 부산대 기계공학과에 특차로 들어갔다. 1979년 부마항쟁에 이어 1980년 광주항쟁이 터졌다. 입대했다가 심장의 부정맥 때문에 '실역 미필'로 되돌아왔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보장되어 있던 대기업 취업이 아니라 농민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농민의 정치세력화가 본격화되었을 때 농민은 그의 출마를 요구했다. 머뭇거리는 그에게 그의 어머니는 단 한마디도 반대한다는 말 없이 "사람이 네게 짐을 지어주었으면, 그 짐을 지어야지!"라며 그를 격려해주었다.

   

◇장·단점 = 김두관 도지사 시절에 정무부지사로 재임하면서 함께 경남 도정을 꾸렸던 경험이 있다. 농민운동가 출신으로 도내 전역에 뚜렷한 지지 기반을 갖고 있다. 또 운동권 출신이라면 '강성'이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그에게서는 오히려 '부드럽고 순박한' 이미지가 더 강하다. 이석기 사태로 나빠진 통합진보당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하루아침에 바뀌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가 그에게는 어느 때보다 어려운 선거가 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주요 공약 = 진주의료원을 농업질환·출산·산후조리 특화병원으로 재개원, 남부내륙철도 조기 착공, 청소년 노동인권보호, 도청·산하기관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 도입, 경남도 농정혁신위원회 운영을 통한 농업문제 해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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