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는 일상이었다]송전탑에 갇혀 아직도 구조되지 못한 할매들

세월호 참사는 그동안 우리를 지탱해주고 있던 사회적 시스템의 허약성과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막연한 비판의식은 품고 있었지만 '뭐, 그래도 어쩔 수 있나'라는 자조에 의지해 살 수밖에 없었던 무력함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참사 후 하나씩 밝혀지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사회 시스템은 우리를 경악하게 했고 부끄럽게도 했다. 우리 일상 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그러나 미처 알지 못했고, 애써 모른 척했던 '세월호적 시스템'을 하나씩 끄집어내 보기로 한다. 

SOS. 선박이나 항공기가 긴박한 중대 위기 시 구조를 요청하는 신호다. 각 무선국은 이 신호를 수신하면 모든 무선통신에 우선해 구조를 위한 조치를 해야 한다.

765㎸ 송전탑 공사로 정신적·육체적 피해를 받으며 목숨을 건 투쟁을 하고 있는 밀양 주민들은 지난 9년간 끊임없이 SOS를 쳤다. 그러나 '국가'는 아직까지 그들을 구조하지 않고 있다.

◇권위주의적 공권력 남용 = 한전과 밀양 시민들 간의 분쟁으로 8년여간 끌어온 밀양 송전탑 공사가 급진전된 건 지난해 10월이었다. 경찰 3000여 명이 투입된 거대한 '군사작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찰은 "엄정한 법 집행"만 외쳤을 뿐 "주민들의 안전을 지키겠다"는 애초의 약속에는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인권침해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경찰이 말한 '엄정한 법집행'은 자의적이었다. 산에 오르려는 등산객들을 '공사방해자'로 규정하고 불심검문을 하는가 하면 자신의 밭에 일하러 가는 주민들에게 주민등록증 제시를 요구했다. 주민들을 '적'으로 간주한 작전으로 비치기에 충분했다.

"한전과 주민들이 풀어야 할 문제다. 왜 경찰이 한전 편만 드느냐"는 주민들의 항의는 번번이 '엄정한 법집행'이라는 벽에 부딪혀야 했다. 국가인권위조차도 주민들의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전과 모든 국가 기관은 무조건 몰아붙이기만 했다. 주민들은 그렇게 계란으로 바위 치는 심정으로 길바닥에 몸을 던져야 했다.

세월호 참사 후 해경의 미숙한 구조 능력과 이를 감추기 급급했던 조직 폐쇄성이 비판받고 있다. 밀양에 투입된 경찰 역시 송전탑 반대를 외치며 자살한 주민의 사인을 '복합적 원인'으로 결론짓는 등 은폐·조작 의혹을 자초했다.

바닷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구조원들이 있지만 해경 수뇌부는 희생자·실종자 가족들로부터 심각한 불신을 받고 있다. '밀양 할매'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일선 경찰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의 수뇌부는 인간으로서 공감 능력이 없는 명령만 하달했다는 게 현지 주민들의 한탄이다.

세월호 사고 초기 당국은 구조 작업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수없이 갖다댔다. 그러나 밀양에서 경찰은 파견된 1000여 명의 병력을 호텔식 콘도에 기거하게 하는 무리수까지 사용하면서 불가능한 작전을 가능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믿을 수 없는 정부와 언론" = 세월호 참사 후 언론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고, 급기야 KBS 사장이 희생자 가족들에게 사과하는 일도 발생했다.

"진도의 실제 상황과 언론보도가 너무 다르다"고 외쳤던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처럼, 송전탑 반대 주민들 역시 "제발 있는 그대로만 보도해 달라"고 절규해왔다. 이 때문에 밀양에서도 일부 언론의 카메라가 현지 주민들에 의해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주민들은 "(2013년 9월) 국무총리가 온 이후부터 언론이 이상해졌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예전에는 정부와 한전의 주장을 검증하려는 노력이 조금이나마 있었는데, 국무총리 방문 이후 정부와 한전의 자료를 그대로 받아쓰기하는 보도가 부쩍 늘어났다는 것이다.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에게 물세례를 받은 바 있고 이후 사의를 밝힌 정홍원 국무총리가 지난해 9월 밀양에 방문한 적이 있다. 송전탑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상 공사 강행을 위한 의례적인 방문이었다는 게 당시 주민들의 시각이었다.

그때 주민들이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주민들을 들러리로 세우고 있다"며 간담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때 정 총리는 "안타깝고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당시 정 총리와 함께 움직였던 조해진 국회의원은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나라 큰 어른 모시지 못해 결례고 송구스럽다"며 주민이 아닌 정 총리에게 미안해했다.

희생자 가족들의 아픔과 그들의 요구를 이해하고 들어주려 하기보다는 '팽목항'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 등 각종 돌출행동을 한 고위직 공무원들이 사퇴하는 일이 있었다.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들 역시 정부를 대표해 '높으신 분'들이 밀양에 많이 왔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송전탑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는 데 분노하고 있다.

특히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들이 "싸움을 포기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드는 것은 "정부의 거짓말과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태도"였다. "송전선로가 문제가 있다고 했다가 문제 될 게 없다 하고, 지중화가 불가능하다고 했다가 검토해보겠다고 하고, 365㎸를 검토한다 해놓고 또 말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765㎸ 송전탑 건설의 최대 명분이었던 신고리 3호기 준공이 원전 비리 사태로 미뤄지면서 일시 공사중단을 하고 합의점을 찾아보자고 주민들이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후 정부의 구태로 지적되고 있는 '해피아'처럼, 핵발전소와 한전을 둘러싼 '관피아'들에게는 밀양 주민들의 생존권보다 765㎸ 송전탑 건설이 더 중요했다는 게 주민들의 분노 이유였다.

◇돈에 파괴된 인간과 공동체 = "보상 필요 없다. 우리 돈 더 얹어줄게. 밀양에서 떠나라."

765㎸ 송전탑 건설을 반대해온 주민들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하지만 한전에서 제시한 개별보상금과 마을 공동자금으로 인해 보상에 응하는 주민들도 늘었다. 70∼80대 여성 노인들은 경찰과 대치하며 땅바닥을 기고 있지만 수억 원에 이르는 마을 공동자금을 주무르는 대표들은 이 돈을 주민 동의 없이 부동산에 투자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채 100가구도 안되는 마을에서 주민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불신하며 돈의 흐름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송전탑 공사 마무리 여부를 떠나 이미 밀양 곳곳의 자연 촌락에서는 심각한 공동체 파괴가 일어나고 있다.

현재 밀양에서는 변호사와 감정평가사 등으로 구성된 법률지원단이 주민들의 재산권 피해를 조사하고 있다. 그런데 주민들은 "땅값이 떨어진 게 문제가 아니고 아예 거래가 안 되고 담보도 잡을 수 없는 게 문제"라고 하소연한다.

최근 송전탑 바로 아래 터에 1억 5000만 원을 들여 집을 새로 짓고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한 주민은 "금전적 손해도 마음 아프지. 하지만 정말 이곳을 떠나고 싶은 이유가 따로 있다. 주민들이 다들 원수지간이 됐다. 이런 데서 어떻게 더 살 수 있겠느냐"며 한숨을 지었다.

밀양은 "세월호와 밀양 송전탑은 그대로 닮았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국가가 버린 사람들"이라며 한숨 짓고 있다.

지난 3일 밀양 송전탑 건설예정지에 세워진 움막 농성장 4곳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 문화제가 개최된 가운데, 상동면 115번 농성장에 모인 주민들과 연대자들이 촛불을 들고 문화제에 참여하고 있다. /임채민 기자

<밀양 송전탑 사태 일지>

2001년 5월 한전, 송전선로 경유지 및 변전소 터 선정

2005년 8월 한전, 주민설명회

2005년 10월 환경영향평가

2007년 11월 정부, 신고리 원전∼북경남변전소 765㎸ 송전선로 건설사업 승인.

2008년 7월 = 밀양주민들, 송전선로 백지화 요구 궐기대회

2009년 12월 = 국민권익위 주관 밀양지역 송전탑 갈등조정위 구성

2011년 5∼7월 = 밀양주민-한전 대화위원회 운영, 18차례 대화

2012년 1월16일 밀양 주민(당시 74세) 분신 자살

2012년 3월7일 = 밀양 송전탑 구간 공사 중지

2012년 6월11일 = 공사 재개

2012년 7월 = 밀양 상동면에 헬기로 굴착기 및 자재 투입

2012년 9월24일 = 국회 현안 보고 이후 밀양 송전탑 구간 공사 중지

2013년 5월15일 = 한전, 송전탑 공사 재개 방침 공식화

2013년 5월20일 = 한전, 밀양시 4개면 6개 지역 공사 재개 시도. 주민과 대치

2013년 5월29일 = 한전-밀양 주민 공사 일시 중단 및 전문가협의체를 통한 대안 연구 합의

2013년 7월 = 산업부 장관 밀양 방문, 엄용수 밀양시장 보상협의체 구성 기자회견

2013년 9월11일 = 정홍원 국무총리 밀양 방문해 공사 강행 시사. 밀양 송전탑 갈등 해소 특별지원협의회, 가구당 400만원씩 개별보상·태양광밸리 사업 추진 등을 핵심으로 한 주민 보상안 확정.

2013년 10월∼현재 = 밀양 곳곳 경찰-주민 충돌, 구속·연행자 속출

2013년 12월6일 = 상동면 고정마을 주민 유한숙(71) 씨 음독 자살

2013년 12월13일 = 권모(53) 씨 자살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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