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65) 통영별로 31회차

오늘은 앞서 소개한 황산대첩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고려 우왕 6년(1380)에 벌어진 이성계의 토벌군과 왜장 아지발도 사이 전투입니다. 여정은 황산대첩비가 있던 비전마을에서 길을 잡아 경남과 전북의 지경고개인 팔량치를 향합니다.

◇황산(荒山)을 지나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황산대첩비가 있는 구릉은 잰 며느리만 본다는 초승달을 닮았습니다. 서쪽 어휘각(御諱閣)은 이성계가 황산대첩 이듬해(1381)에 함께 참전한 8원수와 4종사관 이름을 새겨 승전을 기린 곳입니다.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던 1945년 1월 17일 새벽 일제에 폭파됐고 최근에 다시 어휘각을 세웠습니다. 나오는 길에 마주한 고택은 판소리 동편제(東便制)의 창시자 송흥록 선생의 생가입니다.

구릉에는 가야(加耶) 계통 돌방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있고, 동북향으로 500미터 정도에는 황산토성(荒山土城)이 있습니다. 성이라기엔 민망할 만큼 보루 정도 크기지만, 안에서 청동기시대 민패토기, 돌도끼, 돌살촉을 비롯해 삼국시대 질그릇 조각이 나왔다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삼국시대부터 성으로 쓰인 것 같습니다. 화산리 군화동 들머리에서 오래지 않은 공적비를 지난 옛길은 산모롱이의 화수교에서 24번 국도와 다시 만납니다. 길가에서는 로드킬에 희생된 고라니와 삵의 사체를 목격해야 했습니다. 최근 시화호에 생태계 먹이사슬 조절을 위해 삵을 방사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만, 개체수 조절은 외려 미친 듯 도로를 질주하는 차의 몫인 듯합니다.

◇인월역(引月驛), 인월역 전투

화수교에서 24번 국도는 광천(廣川)을 따라 인월로 향하는데, 약 700미터 떨어진 광천에는 왜장 아지바투와 관련된 전설을 간직한 피바위(혈암血巖)라 불리는 너럭바위가 있습니다. 왜군의 선봉장 아지발도(阿只拔都)는 어린 용사라는 뜻입니다. 아지는 '송아지' '강아지'에서 보듯 어린 것을 뜻하고, 발도는 용사를 이르는 몽골어 바투입니다. <고려사> 변안열 열전에는 그의 나이를 "갓 십오륙 세"라 했고, 당시 기록은 "운봉 인월역(引月驛)에서 아지바투를 사살하고 황산대첩의 대승을 이루었다"고 돼 있습니다. 그러나 이 피바위의 피는 기실 바위에 함유된 철 성분이 배어 나온 자연현상으로 보입니다만, 당시 치열했던 전투에 그럴 듯하게 가탁했다고 여겨집니다.

고려 우왕 때 왜구 아지바투를 사살한 장소로 알려진 피바위.

피바위를 지나 인월면 들머리에서 광천 둑길을 따라 인월에 듭니다. 인월의 지명 유래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고려사> 참역에 남원도에 속한 12역 가운데 하나인 인월역(印月驛)입니니다. 다른 하나는 이성계가 달을 끌어와(引月) 왜구를 소탕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위 <고려사> 기록과 윤소종(1345~1393)이 이성계의 개선을 하례하며 지은 시와 <고려사> 공양왕 2년 4월 기사에서 인월(引月)이라 한 사례가 있습니다. 황산대첩 이후 인(印)이 인(引)으로 바뀌어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줄곧 그렇게 불린 것으로 보입니다. 역의 소속과 위치는 <고려사>에는 남원도에 속하며 운봉에 있다 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현의 동쪽 16리에 있다고 하며, <여지도서>에는 오수도에 속하며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고 나옵니다.

인월역 역말은 현재의 인월리라 하나 위치를 헤아리기는 만만찮습니다. <조선오만분일도> 전주8호 운봉에는 실상사로 향하는 60번 지방도와 24번 국도가 교차하는 농협과 파출소 사이에 표시하였습니다. 예서 동남쪽으로 100m가량 떨어진 곳에 말무덤이 있습니다만 연혁을 상고할 수 없습니다. 대개 규모가 큰 무덤을 그리 부르니 이 또한 그런 예로 볼 밖에요. 일행은 이곳에서 국밥집을 찾아 중화를 해결하고 다시 길을 잡아 나섭니다.

팔량치로 가는 옛길은 인월로라 이름 지은 24번 국도와 선형이 비슷합니다. 인월면소재지를 벗어날 즈음 길가에는 1946년에 세운 효자비가 서 있고, 동쪽에는 풍천천이 남쪽으로 흘러 광천에 듭니다. 풍천천을 거슬러 오르면 아영면이 나오는데, 아영면소재지 서쪽 구릉에는 602년에 신라와 백제가 명운을 걸고 전투를 치른 아막성(阿莫城)이 있습니다.

◇아막성 전투

운봉 일원은 가야 영토였다가 신라 땅이 됐는데, 602년 8월 백제 무왕은 4만의 군사를 보내 아막성을 칩니다. <삼국사기> 신라와 백제 본기에 잘 전해지며, <일본서기>를 살피면 백제와 왜가 연합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위치는 약간 이설이 있습니다만, 대체로 운봉읍 아영면 성리의 성재 남쪽 봉우리(697m)를 둘러싼 테뫼식 석성을 이릅니다.

<삼국사기> 귀산(貴山) 열전은 이렇습니다. "진평왕 건복 24년 임술(602) 8월에 백제가 크게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와 아막성(막을 모暮로도 쓴다)을 포위하였다. 왕은 장군 파진찬 건품, 무리굴, 이리벌과 급간 무은(武殷), 비리야 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귀산과 추항은 함께 소감 직으로 전선에 나갔다.

   

백제가 패하여 천산(泉山)의 못으로 물러나 병사를 숨겨두고 기다리는데, 신라가 진격하다 힘이 다하여 군사를 끌고 돌아왔다. 무은은 후군이 되어 대오의 맨 뒤에 있었는데, 복병이 갑자기 튀어나와 갈고리로 그를 잡아당겨 떨어뜨렸다. 귀산이 큰소리로 말했다. '내 일찍이 스승(원광법사)에게 듣기를 '적군을 만나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어찌 달아나겠는가?'

그는 적군 수십을 죽이고 말에 아버지를 태워 탈출시킨 다음, 추항과 함께 힘껏 싸웠다. 모든 군사들이 이를 보고 떨쳐 공격하니, 시체가 들판을 메우고 말 한 필, 수레 한 대도 돌아가지 못했다. 귀산 등은 온몸에 상처를 입고 오는 도중에 죽었다. 왕은 신하들과 아나(阿那 :지금 함안)의 들에서 맞았다. 시체 앞으로 나아가 통곡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으며, 귀산에게는 나마를, 추항에게는 대사를 추증하였다."

국민과 국가는 어떤 관계여야 할까요? 또 지도자는 정세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일본서기> 추고천황(推古天皇) 때 기록을 보면, 아막성 전투 한 해 전(601)에 왜도 백제와 협격하기 위해 섭정 성덕태자(聖德太子)의 동생 내일황자(來目皇子)를 장군으로 삼고 군사 2만5000을 주어 축자(筑紫)에 보냈으나 그해 6월 병들어 이듬해 2월 죽었습니다.

전북 남원에 있는 신라시대 산성 아막성.

백제 무왕은 왜의 장군이 죽은 지 6개월이 지났는데도 정세를 잘못 판단해 군사 4만을 잃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신라 진평왕은 개선하는 군사를 맞기 위해 수도(경주)와 운봉의 중간 지점인 아나까지 와서 전사자를 위해 통곡하며 예를 다해 장사지내는 등 전후 처리에 최선을 다합니다. 이 사건이 백제와 신라의 앞길을 갈라놓았다 할 수는 없지만,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은 틀림없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끝까지 책임질 때 국민도 국가에 의무를 다하게 된다는 것을 1400여 년 전 역사가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글·사진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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