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일하며 '세상을 바꿔야 한다' 고민…국정경험 '강점' 유약한 이미지 '약점'

새정치민주연합 경남도지사 후보로 선출된 김경수(47) 노무현재단 봉하사업본부장은 출마선언과 함께 '노무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연스럽게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린다. 그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어떤 인연이었을까? 그는 이번 선거를 통해 완전히 '독립'할 수 있을까?

◇봉하마을 = 그는 2008년 2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김해 봉하마을로 올 때 함께 봉하마을로 와서 봉하마을 사람이 됐고,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이 됐다.

그는 봉하마을에서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잘사는 농촌 모델을 만들고자 봉하마을 들판을 누볐다. 좋은 날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노 전 대통령을 그냥 두지 않았다. 2009년 5월 23일 새벽, 다른 비서관으로부터 비보를 전달받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병원으로 달려갔겠지만 그는 먼저 사저로 달려갔다. 그만의 불길한 예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의 컴퓨터를 켰다. 그의 예감대로 유서가 있었다.

"너무 많은 신세를 졌다 /중략/ 너무 슬퍼하지 마라 /중략/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그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가 도착하고 곧 의료진이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공식 확인했다. 그는 울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국민에게 알려야 하는 내용을 기자회견문으로 작성했다. 기자회견문은 문재인 실장에게 전달돼 방송 화면을 통해 국민에게 전달됐다. 장례를 치르고 100일 만에 초라하기 짝이 없는 묘역에 노 전 대통령을 안치한 그는 그때야 울었다. 하지만 넋 놓고 울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서거한 대통령을 만나고자 매일같이 찾아오는 수많은 방문객을 누군가가 맞이해야 했다. 그의 몫이었다.

◇경남사람 = 그를 잘 모르는 이들은 그를 노무현 전 대통령을 따라온 서울 사람으로 알고 있거나, 혹은 김해 사람으로 알고 있다. 서울 사람으로 오해를 받는 데는 실제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곱상한 외모도 한몫을 한다. 그의 고향은 고성군 개천면 용안리다. 고성초교 6학년 때 진주 천전초교로 전학했다. 이어서 진주남중, 동명고를 졸업했다. 대학 진학에 실패한 그는 서울에서 재수를 했다. 1986년 서울대 인류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재수를 하면서 낭만 가득한 대학 캠퍼스를 꿈꿨지만 현실은 달랐다. 교정에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나날이 이어졌다. 대학 2학년이던 해 수원에 있는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공장활동을 하다가 기계에 손가락을 다쳤다.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 그는 프레스에 손목이 잘린 사람을 비롯해 노동자의 참혹한 처지를 직접 경험하면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깊게 하게 된다. 이후 그는 학생운동,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3번씩이나 감옥에 갇힌다. 할머니는 손자를 그 모양으로 만든 서울대를 '웬수대'라며 원망했다.

◇운명 = 대학을 졸업하고 신생 잡지사의 기자가 되었다가 1994년 가을, 신계륜 국회의원의 정책비서가 됐다. 국회의원실에서 일하면서 잘못된 국정과 사회를 바로 잡는 일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2002년 선배의 제의로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노무현 캠프에 합류했다. 그는 '선거 전략'을 담당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에게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들려주었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말에 그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운명은 그렇게 시작됐다.

대선에서 승리하고 청와대 생활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청와대 국정상황실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나라 전체를 보는 눈을 키우기 시작했다. 매일 새벽 해뜨기 전에 출근해서 저녁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퇴근하고, 주말 없이 일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그리고 비서실의 비서실로 불리는 제1부속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대통령의 그림자가 되었다. 항상 대통령 뒤에 서 있던 그의 손에는 늘 메모수첩과 녹음기가 들려있었다.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청와대 내 해당부서에 전달하고, 각 부서의 보고서를 취합 정리해 대통령에게 올리는 일이 그의 몫이었다. 회의든, 행사든 대통령이 있는 곳에 그도 있었다. 대통령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고, 국정을 보는 눈도 함께 깊어졌다.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은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절제할 줄 알았다. 그가 하는 일은 국정 전반에 관한 이해가 깊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정도 위치라면 권력 과시나 남용이라는 함정에 쉽게 빠질 수 있는데, 그에게서 거들먹거림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구를 만나도 한결같이 친절했다. 상대방이 완벽하게 이해할 때까지 정성을 다해 설명했다. 다만, 자신의 주장이나 철학이 충돌하는 지점에서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 사람을 가까운 곳에 둘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노 전 대통령의 행운이었다."

◇도전 = 그가 청와대에서 연설기획비서관으로 일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의 고향 진주에서 출마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한 적이 있다.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그는 선거에 나서는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참모라고 생각했다.

2011년 4·27 재보궐선거에서 주변의 김해을 국회의원 선거 출마 요구가 거셌지만 고민 끝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함께 노 전 대통령을 모셨던 사람끼리 서로 출마하겠다고 싸우는 모양새를 보이기 싫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그의 불출마 선언이 무색하게 야권후보가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듬해 치러진 4·11 총선(2012년)에서 그는 다시 고민해야 했다. 노 전 대통령의 고향 김해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김해를 사람 사는 세상으로 만드는 데, '내가 아니면 안 된다'가 아니라 '내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 한다'는 생각에 출마를 결심했다. 이 선거에서 '노무현 대통령 마지막 비서관 기호 2번 민주통합당 김경수'는 48%를 득표했지만 새누리당 김태호 후보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했다.

그는 이어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의 수행팀장을 맡았다. 대선에서도 패했다. 그는 봉하마을로 돌아왔고, 다시 도전에 나섰다. 이번에는 경남도지사 선거다. 그의 또 한 번의 새로운 도전, 이번에는 성공할까?

◇장·단점 = 그는 1994년 국회의원실에서 정책비서관으로 시작해 2002년 대선을 거쳐 참여정부 5년 내내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근접 보좌하면서 국정을 익히는 등 풍부한 국정경험이 있다. 또 잘생기고 점잖아 보이는 외모만큼이나 성실하고 청렴한 이미지도 그에게는 큰 강점이다. 하지만, 그만큼 유약해 보인다는 단점도 있다. 무엇보다 봉하마을이 있는 김해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낮은 인지도, 그리고 야권후보라는 그 이유만으로 자질과 능력을 인정받기가 쉽지 않은 지역의 풍토는 그가 반드시 넘어야 할 큰 산이다.

◇주요 공약 = 경남에 맞는 안전관리시스템 구축, 일자리 창출과 고급 기술인력 양성 지원 등 사람에게 투자, 경남통합갈등관리센터 설치 등 소통하는 경남 만들기, 도시가스 사각지대 해소 등 도민 살림살이 챙기기, 서부 경남 혁신을 통한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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