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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사 후보 인물탐구 (1) 새누리당 홍준표 지사

스스로 가난 극복하고 '출세'…자신감·추진력 강하지만 독선 이미지 얻어

조재영 기자 jojy@idomin.com 2014년 05월 07일 수요일

새누리당 경선에서 경남도지사 후보로 선출된 홍준표(60) 지사를 직접 대면해보면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고 시원시원하다. 언제 어느 자리에서든 거침이 없다. 일을 추진하는 방식도 그렇게 보인다. 그런 모습이 '오만하다'거나, '건방지다'는 오해를 낳기도 한다. 홍준표 지사의 그런 자신감, 당당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검사 = 그의 원래 이름은 홍판표였다. 그는 1976년 사법시험 1차 시험에 합격했지만 2차 시험에는 계속해서 떨어졌다. 사법시험을 포기하려고 연합철강에 입사해 근무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 6년이 지난 1982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가 됐다.

청주지검에서 검사로 근무하던 시절, 지금 이름인 홍준표로 개명했다. 그 뒤 그는 부산지검을 거쳐 1988년 서울지검 남부지청 특수부 검사로 발령받았다. 그는 남부지청에서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사건을 맡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형인 전기환 씨가 노량진 수산시장을 소유하고 있던 재일교포를 협박해 경영권을 강탈한 사건이었다. 그는 이 사건 수사를 통해 전기환 씨와 청와대 민정수석을 구속했다.

1993년에는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슬롯머신 사건을 터뜨렸다. 터뜨렸다는 단어를 쓴 것은 사건이 그에게 배당된 것이 아니라, 그가 오랫동안 관심을 두고 주도면밀하게 내사해오던 것을 수사해 큰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슬롯머신 사건은 슬롯머신 업계의 대부에게서 돈을 받거나 청탁받은 혐의로 정·관계 유력인사 10여 명이 구속된 사건이다. 그를 포함한 수사팀은 경찰청장과 병무청장, 대전고검장, 6공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 당시 국회의원까지 구속했다. 그는 이들 외의 사건에서도 검찰조직이나 검찰 지휘부에 부담이 될 만한 인물들을 사법처리했다. 이 때문에 그는 검찰 내부에서도 통제가 안 되는 인물로 낙인이 찍혔다. 사건이 배당되지 않았고, 수사권이 없는 자리로 발령이 이어졌다.

결국 검사가 수사를 하지 못한다면 더는 검사로서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천직으로 여겼던 검찰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1995년이었다.

◇두 잔 = 홍준표 지사는 1991년 3월부터 소위 여성 접대부가 있는 술집에는 출입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해놓았다.

그해는 광주지검에서 강력부 검사를 하던 시절이다. 그 당시 광주의 거의 모든 룸살롱은 조직폭력단이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검사가 룸살롱에서 술을 마시고 무절제한 행동을 하면 이들에게 약점을 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때부터 여성 접대부가 나오는 술집은 출입을 삼갔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소신 있게 수사를 하고자 스스로 족쇄를 채운 것이었다.

스폰서 검사, 그랜저 검사, 해결사 검사 등 최근 터지는 검사의 권력형 비리에 대해 그는 요즘 검사들이 샐러리맨화되면서 '열정'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검사라는 직업은 정의감이 있어야 하는데, 후배 검사들은 정의감이 엷어지고, 그냥 직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수사능력이나 집념도 예전 검사들 같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신을 관리하는 데 철저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음주 하면 폭탄주를 먼저 떠올리고, 폭탄주 하면 검사들을 연상한다. 폭탄주가 처음 시작된 것이 검사들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는 술을 잘 마시는 편이다. 양주 한 병을 마실 수 있는 주량이다. 하지만 언제나 술은 두 잔만 마신다. 양주도 두 잔, 소주도 두 잔, 맥주도 두 잔, 폭탄주도 두 잔이다. 술은 많이 마시면 누구든 실수를 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술을 잘 마시지만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어떤 술이든 두 잔까지만 마신다는 것이 그의 또 하나의 원칙이다.

   

◇가난 = 성인이 될 때까지 그의 삶은 가난과의 전쟁이었다. 홍 지사는 1954년 창녕 남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난한 집은 아니었지만 일곱 살이 되던 무렵 집안 살림이 크게 어려워졌다. 그때 손수레에 짐을 싣고 창녕 남지를 떠나 이틀을 걷고 걸어서 대구 신천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 1년 후 다시 신암동으로 이사를 했다. 대구에서 그의 아버지는 양은그릇을 파는 장사를 했지만 늘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어머니가 먼 거리에 있는 하양까지 가서 사과를 떼어와 골목에서 사과장수를 하기도 했는데, 학교를 마치면 어머니 마중을 가서 사과를 나누어 들고와야 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아홉 살이던 해 겨울에 그의 가족은 다시 창녕읍으로 이사를 했다. 창녕에서도 그의 부모는 양은그릇 장사를 했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의 가족은 농사로 먹고살기 위해 합천으로 갔다. 그런 연유로 그는 합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무려 다섯 번이나 전학을 다녀야 했다. 그가 6학년 때 그의 아버지는 합천의 낙동강 변 하천부지 밭에 땅콩을 심었다. 그를 중학교에 보내고자 수익성 높은 땅콩을 심었던 것이다. 하지만 45일간이나 이어진 오랜 장마에 낙동강 물이 불어 땅콩밭과 함께 집까지 휩쓸려 가버리고 말았다. 그는 강둑에서 장맛비를 맞으며 그 모습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혼자 대구 직물공장에 취직해 있던 작은누나의 월셋방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밤 10시가 되기 전에 무조건 전깃불을 끄라는 주인아주머니의 성화 때문에 이불 속에 숨어서 공부를 했다. 가난했던 그가 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교육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육군사관학교 특차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그는 농협조합장의 부정 사건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쓴 아버지를 보고 검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검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실천하고자 고려대 법대에 진학했고 가정교사로 학비를 벌어 학업을 마쳤다.

◇장·단점 = 검찰을 떠난 그는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정치인이 됐다.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며 18대까지 4선 국회의원을 지내고, 2012년 12월 경남도지사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도지사 취임 후에는 진주의료원을 폐업하는 등 전국에서 주목받는 행보를 이어갔다.

그의 삶을 요약해보면, 굴레와도 같은 가난이라는 역경을 이겨내고 오직 스스로 힘으로 주목받는 검사가 되고, 정계에 진출해 4선 국회의원, 집권여당의 당대표까지 지냈다. 그리고 단신으로 고향에 내려와 경남도지사가 되고 진주의료원 폐업 강행으로 전국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가난과 열악한 환경을 뛰어넘기 위한 피나는 노력과 철저한 자기관리가 그의 자신감을 뒷받침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과도한 듯 보이는 그 자신감이 그를 '독선', '불통'으로 옭아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주요 공약 = △50년 미래 성장동력 확충 △글로벌테마파크 조성 등 찾아오는 문화관광 경남 조성 △좋은 일자리 창출을 통한 생산적 복지 확대 △지역 균형 발전 △재정 건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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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부 데스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조언과 제보를 기다립니다. 제보 보내 주실 곳 jojy@idomin.com 전화: 250-0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