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64) 통영별로 30회차

나라가 세월호 참담한 해난 사고로 온통 슬픔에 젖어 있습니다. 국가의 기능이 무엇인지? 끝없이 더 가지기를 바라는 어른들의 탐욕에 희생된 그 어린 꽃들을 어찌 보내야 할지 가슴이 먹먹해져 무거운 발걸음을 뗍니다.

◇여원재

백두대간 구계에 있는 이곳 전북 남원시 이백면 여원재(477m)는 연재 또는 연치라 하고 고개 북쪽에는 그 이름을 딴 마을도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운봉현 역원에는 고개 아래에 여원(女院)이 있다 했으니 연재 마을 즈음이 아닐까 여겨집니다만, 5000분의1 지형도에는 연재 마을 북쪽의 장교리에 '원터골'이라 적어 두었습니다. 고개를 내려서면 곧장 우리나라 대표 고원(高原)인 운봉읍입니다. 운봉은 고개인 여원재와 바닥을 이루는 들판의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서림 북쪽의 선두들이 고도가 460m 안팎이고, 운봉 남쪽의 동천리 신덕들은 고개보다 더 높은 480m 안팎일 정돕니다. 이래서 운봉은 모를 일찍 내어 인접한 남원이나 함양보다 20일이나 빨리 7월 중순이면 벼이삭이 팬다고 합니다.

◇운봉읍

운봉은 본래 신라의 무산현(毋山縣:모산현母山縣이라고도 함)으로 아영성(阿英城) 또는 아막성(阿莫城)이라 하였는데, 신라 경덕왕이 운봉현(雲峰縣)으로 고쳐 경상도 천령군(지금 함양)에 속하게 했다가 고려 때 남원부에 편입됐습니다. 운봉으로 드는 길가에 많은 유적들이 흩어져 있는데, 장교리에는 삼국시대 고분군이 있고, 들머리인 서천(西川)에는 독을 굽던 가마터도 있습니다.

지금 운봉읍 소재지인 서천리가 옛 운봉현의 치소인데, 바다와 멀리 떨어진 내지에 있기에 따로 읍성은 쌓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왜구에게 시달림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 이야기는 뒤에서 살피겠습니다. 관아와 객사 및 그 앞에 둔 협선루(挾仙樓)는 지금의 운봉초등학교에 있었다고 전합니다.

서쪽으로 당산거리라고 냇가에 잘 조성된 숲이 눈에 듭니다. 당산(堂山)과 돌장승 2기를 비롯하여 여러 빗돌이 있습니다. 이 마을숲은 운봉을 비보하기 위해 동림(東林)과 함께 조성한 서림(西林)입니다. 현두(懸頭)숲 또는 선두숲이라고도 하는데 운봉 사람들이 이곳을 고을의 머리로 인식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북쪽 서천 다리의 이름도 현두교입니다. 당산거리 입구 두 장승(중요민속자료 제20호)은 방어(防禦)·진서(鎭西)대장군인데, 목이 부러진 장승이 남자라고 합니다. 선정비 2기와 불망비 2기 등 갖가지 기념비도 있어 운봉 사람들이 이 숲을 대하는 마음을 잘 드러납니다.

◇광천(廣川)을 건너다

서림에서 통영별로는 지리산 둘레길과 겹치는데, 내의 남쪽 둑길을 따라 걷다가 북천리에서 신기교로 건넙니다. 북천리 짐대거리에도 길가 양쪽에 나란히 세운 장승이 둘 있습니다. 화재를 막기 위해 오리를 얹어 세운 짐대(솟대)는 한국전쟁 때 없어졌다고 합니다. 동쪽 남장승에는 동방축귀(東方逐鬼) 대장군, 서쪽 여장승에는 서방축귀대장군이라 새겨 방위를 진호하고 귀신을 쫓는 데 뜻이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운봉에는 앞서 당산거리와 이곳 북천리 그리고 가까운 권포리에도 장승이 있습니다. 서천과 북천의 것은 험상궂은 대표적인 악상(惡像)인데, 그 소임이 방어·진호·축귀하는 데 두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북천과 신기 사이의 내가 지금은 광천인데, 옛 이름은 동천입니다. 운봉 동서쪽 동천과 서천이 이곳에서 합쳐 너른 내를 이루기에 뒤에 그런 이름이 붙었겠지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9 운봉현 산천에 "동천(東川) : 현의 동쪽 1리에 있다. 인월역을 지나서는 함양군의 임천이 된다"고 나옵니다. 책에서 일러 주듯, 이 강이 흘러 임천 엄천강 경호강 남강 낙동강을 이루어 남해에 드니 이제부터 여정은 진주까지 이 냇가로 난 길을 따릅니다.

   

◇오리정이를 지나다

운봉읍 북쪽 구릉이 성산(城山·537.4m)인데,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Ⅴ> 운봉현 비고 성지에 "고성(古城) : 북쪽으로 2리인 소산(小山) 위에 있으며, 복성산(福成山)에는 흙으로 쌓은 옛터가 있다"고 한 바로 그 고성입니다. 지금의 5000분의1 지형도에도 성산이라 적혔지만, <남원문화유적분포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산자락의 동쪽 기슭 작은 마을이 '오리정이'인데, 오리정(五里亭)에서 비롯했습니다. 오리정은 고려 이래 지방마다 관아에서 오리쯤에 둔 정자로 여기서 손님을 영송했습니다. <고려사> 예지에 "병마사가 오면 목사·도호부사·지주사는 오리정에서 삼가 영접하고…"라 한 사례가 있습니다. 옛길을 알리는 중요한 지명 자료입니다. 앞서 지나온 남원 북쪽의 오리정과 함양 안의 남쪽의 오리정도 그렇습니다.

성산에서 동북향으로 약 1㎞에 신기리 토성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성과 함께 소개된 복성산 토성입니다. <남원문화유적분포지도>에 토성은 50m 정도 남아 있다고 하며, 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와 삼국시대 질그릇 조각이 많아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가 오래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신기리 일원에 삼국시대 유물이 흩어져 있는 곳이 더러 있어서 이를 방증합니다. 마을에서 세운 '보호림 헌수 기념비'에는 임진왜란이 일시 휴전 중이던 선조 31년(1598)에 새로 터를 잡고 신기(新基)라 했다고 마을 유래를 전하니, 지금 마을이 형성된 것을 이른 것입니다. 또 영조 24년(1748) 마을 앞 남천(南川:지금 광천) 가에 보호림을 심어 비보하였으나 1976년 경지정리로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황산대첩(荒山大捷)

신기리를 지나 들판 사이로 활처럼 휘어진 길을 따라 2㎞ 정도 가면 황산대첩비가 있는 비전마을에 닿습니다. 비전(碑殿)은 비를 모신 빗집이며, 빗돌은 황산대첩을 기리려고 선조 10년(1577) 세웠습니다. 전라도관찰사 박계현이 태조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친 황산이 세월이 흐르고 지명이 바뀌어 잊혀가니 비석을 세워 기리자고 계청해 왕명으로 건립하였습니다. 이런 건립 경위와 이성계가 10배의 적을 대파해 만세에 평안함을 얻게 되었으니 그 업적을 기려 이 비를 세웠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니 이를 안 일본인들이 그들에게 치욕스런 사적을 기록한 이 빗돌을 고이 두지 않았지요. 빗돌은 일제강점기 파괴됐고, 1957년 귀부와 이수를 그대로 살려 다시 세웠습니다.

전투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자세하게 전합니다. 이성계와 변안열·이두란 등은 남원에서 배극렴과 합세, 황산에 당도해 동북쪽 정산봉(鼎山峰)에 올라 전황을 탐색한 뒤, 곧장 왜구를 쳤습니다. 황산(荒山·697m)은 비전마을이 의탁하는 동쪽 구릉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운봉현 산천에 "현의 동쪽 16리에 있다"고 나옵니다. 정산봉은 앞 책 산천에 "정산은 바로 황산의 동북쪽 산록이다"라 한 것처럼, 서무리 서무마을 북쪽의 정봉입니다. 당시 황산보다 훨씬 낮은 정봉에 오른 까닭은 그곳이라야 왜구가 주둔하던 인월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파괴된 황산대첩비. /최헌섭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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