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소답동 111번지에 주변의 연립주택과 아파트 사이, 좁은 도로와 도로 사이에 한국 근대 조각의 선구자 우성 김종영(1915~1982)의 생가가 있다. 이곳은 김종영이 태어나 1948년 서울대 교수가 돼 서울로 가기 전까지 지낸 곳이다.

김종영은 우리나라 현대 조각의 시발점이자 추상 조각의 선구자지만 그가 태어나고 자란 창원시민들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마을 사람들은 봄마다 온갖 꽃이 피어나는 김종영의 생가를 가리켜 '소답 꽃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역시 창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수필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소답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오래되고 큰 기와집의 부잣집들이 있었다. 큰 고목의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져 피고, 마을 집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도 아름다웠다."

푸른 들판과 작은 시내가 흐르고 수양버들과 갖가지 꽃나무들에 둘러싸인 대궐 같은 집. 창원의 모든 것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졌지만 다행히 김종영 생가는 도시 구조에서 비껴 나 부분부분 살아남아서, 집의 일부가 2005년 9월 16일 자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보존과 복원 방안을 강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김종영이 나고 자란 곳이라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큰 가치를 지니고 있고, 건축물 자체로도 '창원의 집'보다 원형 보존 상태가 좋고 별채 대문지붕 위에 누각이 올려진 사미루는 중국인 석수가 건축에 참여했다는 증언이 나왔지만 그것뿐이었다. 여전히 을씨년스럽고 간간이 창원의 뿌리찾기에 이름을 올릴 뿐이다.

서울에서 활발한 기념사업이 벌어지는 동안, 고향 창원의 생가는 1990년 초반과 후반 도로가 나면서 4등분이 났다. 집채 중 두 동은 완전히 헐려 자취를 찾을 수 없으며 담쟁이가 예쁜 담장도 울창한 대나무 숲도 옛 흔적만 남았다. 1000평 남짓한 공간에 ㄷ자 형태로 들어서 있던 기와집도 이제 기형적인 모습으로 일부만 남아 있다.

생가 입구에 지난 1995년 '미술의 해'를 맞아 문화관광부가 창원미술협회와 함께 세워 놓은 표지석이 겨우 놓여 있을 뿐이다.

부엌이나 살강, 안채 등이 이전 한옥의 짜임새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건축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관련 학계도 지적한 바 있다. 사미루도 보존과 복원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김종영의 예술을 지배했던 선비적 기품과 관조적인 성향이 그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에서 비롯되었다면 창원의 생가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 자원이 분명하다.

창원이 역사적 정체성을 되찾고 문화 자긍심을 가지려면 더 이상 '고향의 봄'의 꽃대궐을 방치해서는 안될 것이다.

/황무현(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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