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63) 통영별로 29회차

오늘은 지난 여정에서 지나쳤던 전라북도 남원시 응령역에서 시작합니다. 운봉 경계에 있는 여원재를 넘는 구간인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역사적 현장을 많이 지나게 됩니다. 삼국시대는 소백산맥과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백제와 가야, 백제와 신라가 전쟁을 벌였고, 고려 말엽에는 동북아시아를 전란의 소용돌이로 내몰았던 왜구와 격전을 치른 곳입니다. 참혹한 임진·정유년의 왜란에도 전쟁을 치렀고, 120년 전 갑오농민전쟁 당시도 그러했고,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는 파르티잔이 백두대간을 타고 북상하는 과정에서 전투가 있었습니다.

◇응령역(應嶺驛)

<조선오만분일도> 전주12호 남원에는 지금의 새터 마을 동쪽 구릉에 응령역을 표시해 두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남원도(南原道)에 속한 은령역(銀嶺驛)이다가 조선시대에 오수도(獒樹道)에 속한 응령역이 되었습니다. 은이 응으로 바뀐 것인데, 지금도 이곳에선 효촌(孝村)을 달리 응령역이 있던 곳이라 응령 또는 응양이라 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원도호부 역원에는 "응령역은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고 했고, <여지도서> 남원도호부 역원에는 "응령역은 관아의 동쪽 20리에 있다. 역마 6마리, 역리 14명, 역노 20명, 역비 4명이다"고 했습니다. 이 책에 실린 <오수역지>에는 응령역의 호수가 34호라 했으니, 지금도 그렇고 당시도 역말로서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료를 뒤적이다보니 고려 우왕 5년(1379)에 왜적이 남원을 노략질할 때 전라도도순문사 지용기(池湧奇)가 은령역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한 이야기가 전합니다만, 사실과 크게 다릅니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이때는 그가 전라도 원수가 된 해이며, 죽음은 1391년에 아내의 재종인 왕익부(王益富)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맞았습니다.

◇과립리 석불입상

역이 있던 효기리를 지나 얕은 재를 넘으면, 징머리들과 소정지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과립리(科笠里)에 듭니다. <조선오만분일도>에는 과리(過里)라 적었는데, 백암천 남쪽에 단구처럼 발달한 얕은 구릉에 있습니다. 지세가 예사롭지 않아 살펴보니 밭의 곳곳에 고려시대 이래의 질그릇과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습니다. 지명이나 교통로상의 결절지대에 마을이 있어 오히려 이곳이 역원이 들어서기에 마침맞다고 보입니다.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이백면사무소 가까이에는 석불입상(전북도유형문화재 제128호)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높이가 4.45m에 이르는 거불(巨佛)로 어깨에 걸친 법의는 통일신라 후기의 조각 전통을 잇고 있으나, 돌기둥처럼 양감 없는 몸통, 따로 만들어 끼운 손, 대좌 윗면에 얕게 돋을새김한 발 등을 볼 때, 고려 전기의 거불 조성 추세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과립리 석불입상. /문화재청

과립리를 지날 때 일행은 중화를 한참이나 넘긴 터라 몹시 지쳐 있었습니다. 점심을 들면서 쉬어갈 만한 곳을 찾아 부산을 떨지만 길가 식당은 오래 전에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이 낭패를 어쩌나 조바심을 내고 있는데, 역시 어디서든 민생고 해결은 여성의 몫인가 봅니다. 아내가 찾아낸 식당도 마칠 참이었는데, 억지로 문을 밀고 들어가 사정을 이야기하자 어제 해놓은 보름 밥이 조금 있는데 그거라도 괜찮겠느냐 물으십니다. 어릴 적부터 오곡밥과 나물 반찬을 좋아해서 설날보다 정월대보름을 더 기다렸던 저로서는 그야말로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固所願)이었습니다. 전라도식으로 잘 차려진 보름 밥상을 받고 보니 이런 횡재가 없습니다. 좋은 음식에 그곳 막걸리까지 한 잔 했으니 이제 그 힘을 쏟아내려 여원재를 향해 길을 나섭니다.

과립리를 나선 길은 평촌을 지나 양가리로 향합니다. 평촌마을로 들어서니 길가 담벼락에 빗돌처럼 생긴 게 있어 살펴보니 갈형 빗돌의 몸통 전체에 시멘트를 발라 두었습니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어서, 돌아와 자료를 찾아봐도 그 빗돌에 관한 내용은 찾을 수 없습니다. 어쨌든 옛길을 일러주는 잣대이니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음은 확인이 됐습니다.

여원재 들머리의 양가리로 이르는 길은 냇가를 따라 잘 열려 있어 걷기에 무리는 없습니다만, 간간히 이 좁은 길을 커다란 덤프트럭이 오가고 있어 신경이 쓰입니다. 위쪽 양가제 준설에 동원된 차량입니다.

통영별로 옛길은 양가제(저수지)에서 골짜기를 거슬러 북동쪽 연치골로 열려 있습니다만, 공사로 폐쇄되어 부득이 북쪽 중성골로 길을 잡습니다. 산으로 접어드는 골짜기에는 다락논이 잘 개간되어 있고, 위쪽 묵정논에는 갈대와 같은 습지성 식물이 군락을 이루며 원래의 모습을 되살려가고 있습니다. 근년에 사람의 왕래가 없었으니 온몸으로 자연을 안고지며 길을 헤쳐 나갑니다. 오랜만에 산악 유격을 제대로 한 셈이니, 동행한 가족들은 물집이 불어터지는 등 고생이 컸습니다. 골짜기를 벗어나 24번 국도를 만나 여원재로 향합니다.

   

◇여원재

원래 여원재를 오가던 길은 곡벽을 따라 양가리로 이어지는데, 그 자취는 고갯마루의 남서서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곡벽의 바위 비탈에 고려 말엽에 새긴 것이라 전해지는 마애불상(전북도 유형문화재 제162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마애불은 양가제에서 여원재로 이르는 곡벽을 따라난 옛길가에 있는데, 미륵(彌勒)과 같은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불상에는 이성계와 관련한 이야기가 전합니다. 고려 우왕 6년(1380)에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운봉에 당도한 이성계는 꿈에 어떤 노파로부터 싸움을 이길 수 있는 날짜와 전략을 계시받아 대승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불상 동쪽에 바위를 모나게 도려내고 새긴 글에 그리 적혀 있습니다. 대한제국 시절이던 고종 38년(1901)에 운봉현감을 지낸 박귀진(朴貴鎭)의 글인데, 이 각서는 불상을 여상이라 하고 황산대첩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현몽한 노파의 도움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보호각 앞 두 돌기둥은 건물의 모서리에 댄 활주를 받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사당 운운한 보호각의 흔적일 것입니다. 그것은 주위의 기와 조각으로도 방증됩니다.

여원재 마애불상./최헌섭

여원재는 여원(女院)에서 비롯한 이름이며, 한자로는 여원현(女院峴) 또는 여원치(女院峙)로 적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운봉현 역원에 "여원(女院)은 여원현의 아래에 있다"고 한데서 비롯한 것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운봉현 산천에는 "여원현은 현의 서쪽 7리의 남원부 경계상에 있다"고 했습니다.

남원에서 여원재까지는 역참 하나가 설 정도인 30리입니다. <여지도서> 남원도호부 도로에 "동쪽으로 운봉현과 경계 여원치에서 오는 길이 30리"라 했음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남원에서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통(동)도역과 은(응)령역을 지났으니 다른 곳보다 역이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남원이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겠지요.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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