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같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자식들에게 폐가 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아프단 말도 못하고 혼자서 설사병으로 고생하다 도저히 못 견뎌 겨우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병원에 좀 데려가 달라고 하시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남편이 달려갔다. 차에 앉지도 못하고 누운 채로 근근이 병원에 다녀온 뒤 우리 집에 누우신 엄마를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났다.

엄마가 그렇게 작아 보인 것은 처음이다. 옛날 몸집 좋고 일 잘하던 그 엄마는 어디도 없었다. 늙고 작아져 곧 바스라질 것 같았다.

아프면 진작 전화를 할 일이지 왜 혼자 고생을 했냐고 마음에도 없이 역정을 냈다. 폐 끼치기 싫어서 그랬다는 엄마의 말이 아팠다.

자식들은 자라면서 그토록 많은 폐를 부모님께 끼치고 나서야 겨우 사람 노릇 하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부모님께 받는 것을 단 한번도 폐 끼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부모는 당연히 자식을 돌봐야 하고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듯 받기만 했다.

시간이 지나 부모는 돌봄을 받고 자식이 돌보는 자리에 서 있다. 바뀐 것은 자리뿐인 것 같은데, 사람의 입장과 생각은 천지 차이다. 엄마께 많이 받았으니 이제 좀 갚아야 한다고 말로는 그렇게 하지만, 엄마는 자식에게 뭐 하나 받는 것을 대단히 미안하고 고마운 일로 생각하고 나 또한 대단한 일인 양 생색내기 일쑤이다.

웬만큼 치료받으면 나으려나 했는데 엄마는 뜻밖에 다른 병이 발견되어 한동안 입원을 해야 했다. 시골 생활 하시다 병실에서 갑갑하게 보내는 하루하루도 힘겨웠겠지만 시골로 돌아가고 싶은 엄마의 본마음은 다른 데 있었다.

집에서 키우는 물고기 밥을 주지 못하는 일이 큰 부담이었나 보다. 내내 물고기 밥 타령을 하셨다. 옆집 아주머니께 부탁하면 된다고 말씀드려도 엄마의 걱정은 끝이 없었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어디 하루라도 집을 비우고 떠날 때마다 늘 밥 걱정을 하셨다. 여섯 남매 밥 때문에 어디 하루 집 비우고 떠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키우는 개, 돼지, 닭, 염소 이것들 밥 굶길까 봐 하룻밤 맘 편히 주무시지도 못했다. 심지어 화단의 꽃들 목마를까 봐 집을 떠나지 못한 엄마셨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 그것이 하찮은 것이든 대단한 것이든 가리지 않고 두루 챙기며 보살피는 엄마를 보며 나는 생각한다. 저 끈질긴 모성, 생명에의 원초적 사랑. 아, 저 힘이 우리를 키우고 오늘도 존재하게 하는 힘이었구나. 그 사랑이 바로 엄마이구나. 좀 더 쉬다 내려가시라는 내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퇴원하자마자 엄마는 곧바로 시골로 내려가셨다. 작아진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나이 오십을 앞둔 나도 아직 엄마의 밥, 그 사랑의 밥이 필요한 어린아이가 아닌가.

/윤은주(수필가·한국독서교육개발원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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