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사람]극단 '현장' 배우 박진희 씨

"생애 첫 주연이에요."

연극 <팔베개의 노래>에서 주인공 채란 역을 맡은 박진희 씨. 스물다섯, 이제 배우 생활 4년차.

"불안하고 두려웠지만 그만큼 기쁘기도 했어요."

진희 씨는 단원들과 함께 무대 설치를 하고 있었다. 사다리를 잡아주거나 허드레 물건을 옮기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무대 위에 우물을 갖다놓고 그 옆에 매화나무를 세우자 캄캄한 소극장 무대 위로는 어느새 봄이 내리는 듯했다.

진희 씨는 최근 두어 달 동안 '진주 기생 채란'으로 살았다.

극단 현장이 지난 두어 달 동안 <팔베개의 노래>로 오롯이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 달 반 연습 끝에 3월 말 사천문화예술회관에서 2회 공연을 마쳤고, 다시 거창에서 열린 경남연극제에서 공연, 3일부터 이번 일요일인 6일까지는 진주 중앙동에 있는 현장아트홀 소극장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박진희 씨./극단 현장

<팔베개의 노래>는 실제 김소월의 시집에 실린 시로, 소월이 기생 채란이 읊는 것을 옮겨 적었다고 되어있다. 연극은 당시 김소월과 채란을 그려내고 있다.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이라기보다는 버림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만나 고단한 삶의 여정에서 서로에게 건네는 하룻밤의 위안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채란은 13살에 행상에 넘겨져 세상 온 천지를 떠돌다 24살에 평북 영변에 닿아요. 그때가 1923년 무렵인데, 소월은 관동대지진을 겪고 만신창이가 되어 영변에 와있을 때지요. 팔베개라는 게 상대를 위로하고 쉬게 하기 위해 내 팔을 내어주는 것이고, 또 서로의 심장 소리를 가장 가깝게 들을 수 있는 거리잖아요."

진희 씨는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에 대해 조금 이야기했다. 중학교까지는 고향인 제주에서 살았고, 고등학교는 뭍으로 나와 여수에서 다녔고, 다시 대학을 경상대학교로 진학하면서 진주에서 생활하게 됐고 지금까지 계속이다. 나이에 비해 많은 지역을 떠돌았다. 마치 <팔베개의 노래> 채란처럼 말이다.

/극단 현장 제공

"아버지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기타 치며 거리 공연도 했었어요. 12살 때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와 제가 똑같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지요. 저야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아버지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진희 씨는 사실 연기를 한다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는 교사가 될 거라고 생각했고, 혼자 집안 살림을 맡아 하는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픈 책임감 강한 10대 소녀였다. 연기를 한다는 건 막연한 꿈이었고 남에게 내비치지도 못했다.

"대학 1학년 때 '문학의 밤'에서 황순원 <소나기>를 공연했어요. 소녀 역을 했는데, 막연히 이걸 해야겠구나, 이거였구나 라는 그런 기분이었지요. 마침 같은 과 김진호 선배가 이미 극단 현장 생활을 하고 있더라고요. 선배는 학교에서 가끔 만나면 너는 무얼 하고 싶냐, 곧잘 물었어요. 근데도 차마 말하지 못했어요."

/극단 현장 제공

그리고 얼마 후 진희 씨는 극단 현장으로부터 '3·18 걸인기생만세운동'에 퍼포먼스 코러스로 참여하자는 제안을 받고 참여했다.

"만세, 만세…그리고 몇 마디 대사뿐이었는데 마음을 어찌 할 수 없었어요. 물 건너 보내놨더니 허파에 바람 든 짓만 한다고 할까봐…, 어머니가 생각나서 결정을 하지 못했어요. 근데 자꾸만 마음이 쏠리고…. 결국 10년만 내게 시간을 주라고 했어요."

오랜 망설임 끝에 진희 씨는 극단 현장에 들어왔다. 2010년 대학 2학년생이었다. 극단에 들어왔지만 처음부터 배역을 맡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소극장 청소도 하고 단원들의 식사 준비도 하고, 무대 스태프로 참여하고 기껏 배역이랬자 대사 몇 마디 단역이었다. 그런데도 즐거웠다. 무대 바닥을 청소하면서 선배들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래도 즐거웠다.

"2011년 <팔베개의 노래>를 극단에서 공연할 때 저는 단역으로 2인 역할을 했었어요. 근데 이번에 1월 말에 배역을 정하는데 주연을 맡아서 기분이 이상했어요. 남다른 느낌이었어요."

/극단 현장 제공

하지만 기분에 젖는 건 잠시였고 대본 읽기에서 동작까지 익혀야 하는 정신없는 일과가 계속되었다. 진희 씨는 연습이 끝나면 매일 집에 돌아가 울고, 연습하면서도 또 울어야 했다.

"주연으로 극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부담이 컸고, 맘대로 되지 않아 힘들었어요. 그러다가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구나. 진심을 다해 정성스럽게 살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동갑내기 친구들이 취업 준비에, 연애와 결혼에, 자기 계발이나 여행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때 진희 씨는 365일 중 350일을 극단에 나와 하루 중 12시간을 이곳에서 보낸다.

/극단 현장 제공

"연극하고… 또 연극하죠.(하하)"

연극인들이 가난하다는 것은 만인이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극단에서 주는 돈으로만 생활하기에 벅차지 않냐는 질문에 되레 손사래를 친다.

"가난하지만 풍족하다면 이상한가요? 근데 정말 풍족해요. 경제적으로 더 나은 생활을 원하는 게 먼저가 아니니 오히려 작은 것들에 행복감을 많이 느껴요."

진희 씨는 해가 떴을 때 시내를 여유롭게 돌아다니는 것, 어느 날 늦잠 자는 것, 운 좋게도 하루 온종일 빈둥거리며 놀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이런 자잘한 것이 자기를 설레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 말했다.

무대에 오르면 주연배우지만 진희 씨는 무대세팅을 할 때 타카질도 하고 바닥 까는 작업도 한다. 조명이 필요하면 '빛돌이'도 하고, 시내 홍보작업에도 나선다.

지난 1일 극단 현장 <팔베개의 노래>는 경남연극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축하인사를 건넬 겸 전화를 했다.

"아, 공연이 며칠 안 남아서 연습 마치고 지금 시내 돌아다니며 포스터 붙이고 있어요."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봄밤에 꽃잎들은 봄눈처럼 날리고 진희 씨는 지금 이 순간 무얼 해도 '랄랄라'했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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