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흔해져서 모두가 너무 무감각해져 버린 일이 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또 내일도 들려오는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들. 어떤 범죄나 사고에 의해서든, 아니면 스스로 택한 죽음이든 상상하기조차 버거운 수많은 순간들이 우리 삶을 그렇게 관통한다.

가장 먼저 분주해지는 건 언론이다. 사건의 원인은 무엇인지, 왜 목숨을 끊어야만 했는지 별 주저도 두려움도 없이 '곧장' 해석에 돌입한다. 최근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의 자살에 대한 태도가 그랬다. 너도 나도 몰락 직전의 진보정치 현실에 주목했다. 의석 하나 없는 진보정당 운동가로서 서럽고 어려운 삶을 부각한 <경향신문> 기사 '무엇이 젊은 그를 좌절케 했나'가 대표적이었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서울 송파구 세 모녀 자살 사건'도 명약관화한 근원이 있었다. 박근혜 정권의 부실한 복지정책, 열악한 사회안전망이 '타살'의 주범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해결책은 그럼 간단하다. 운동가들의 최소한 생활은 가능하게 진보정치가 되살아나면 되고, 소외되는 사람들이 없도록 복지 시스템을 제대로 정비하면 된다. 하지만 과연 그런다고 안타까운 죽음이 사라질까? 이전보다 나아지리라 기대는 할 수 있겠지만 삶 그리고 죽음의 복잡성에 공감한다면 위험천만한 도식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 <엘리펀트> 첫 장면.

언론과 그에 동원되는 소위 논자들은 문제를 최대한 매끄럽게 단순화하는 걸 선호하기 마련이다. 그래야 책임을 뒤집어씌울 '표적'이 분명해지고 독자들의 관심과 공분 또한 뜨겁게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는 참담한 사건들이 나와 별 상관없는 일이라고 안도하며 한없이 편안해질 수 있다. 누군가 점찍어준 '표적'이나 '구조'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도구화 또는 대상화. 심지어 정당화·합리화. 해석이 완벽하고 명료하면 할수록 죽음은 필연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언론이나 지식인이 될 수도, 혹은 이 글을 쓰고 있는 기자나 당신이 될 수도 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2003년)란 영화가 있다. 지난 1999년 4월 미국 콜로라도주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을 다룬 영화다. 화창하기 그지없는 봄날의 푸른 하늘로 영화는 시작한다. 카메라는 그날 그 현장에 있었던 학생들의 일상을 각자의 관점에서 묵묵히 따라간다. 무척이나 평온했던 학교는 곧 총을 난사한 학생을 포함해 무려 23명의 핏빛 죽음으로 물들지만 영화는 어떠한 해석도 단죄도 행하지 않은 채 오로지 그들을 응시할 뿐이다. 당시 언론 등은 문제의 학생들이 평소 과격한 헤비메탈 음악과 잔인한 영상물을 즐겼다며 사태 원인을 예의 단순화했으나 <엘리펀트>가 택한 '해석의 윤리'는 이 모든 걸 철저히 거부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진실보다 먼저 만들어진 말들'을 경계하라고 말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는, 진실보다 먼저 만들어진 말들은 진실보다 시나리오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느덧 진실은 고작 몇 개의 단어로 압축된다. 신념의 좌절, 고단한 삶, 정서 불안, 우울증, 어두운 과거, 폭력 성향, 사이코패스. <엘리펀트>는 오히려 그날 비극의 주인공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시작됐던 평범한 하루와 청명한 하늘, 평소처럼 재잘거리고 뛰어놀던 우리들이라고 이야기한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더라도 어떻게든 함께 끌어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 안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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