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월산(428m). 잊힌 산이다. 고려시대 스님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이름난 산이건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만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삼국유사 권3에는 탑상(塔像)이 나온다. 설화 31개를 담고 있는 탑상은 불사.불탑.불산의 유래를 통해 고승의 행적과 영험을 일러놓고 있다.
여기에는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에 얽힌 이야기 ‘금관성 사파석탑’과 밀양 삼랑진 만어사의 연기 설화인 ‘어산불영’ 기록에 덧붙여 ‘남백월이성(南白月二聖)’ 설화가 적혀 있다.
“옛날 당나라 황제가 궁전에 못을 팠는데 보름 때마다 못 가운데 사자모습을 한 산그림자가 나타났다. 황명으로 그림자의 주인을 찾아나선 신하는 해동 땅에 이르러 실체를 찾았는데 바로 신라 구사군 북쪽의 백월산이다.
신라 성덕왕 때 창원 출신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서쪽에 있는 부처님 이마에서 뻗쳐 나온 백호 빛이 금색 팔로 바뀌어 이마를 어루만지는 꿈을 꾼 뒤 백월산 사자암 아래에 따로 거처를 마련하고 득도를 위해 미륵불을 되뇌었다.
서기 709년 4월 8일 해질 무렵 아름다운 여인이 향기를 풍기며 달달박박을 찾아와 묵기를 청했으나 ‘청정한 절간에 여자를 가까이 둘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이번에는 노힐부득을 찾아가 청했다. 노힐부득은 여인을 들어와 쉬게 하고 염불을 계속했으며 새벽녘에 여인이 아이를 낳으려 하자 다시 물을 데워 보살펴 주었다.
순간 목욕물이 금빛으로 바뀌었고 여인의 청에 따라 노힐부득이 목욕을 하자 정신이 상쾌해지면서 미륵불로 변신했다. 아침에 찾아온 달달박박도 목욕물을 얻어 바르고 아미타불이 되어 마을 사람에게 설법을 베푼 다음 함께 구름을 타고 떠났다. 여인의 모양으로 나타난 관세음보살이 이들을 득도로 이끈 것이다.
경덕왕이 이들의 성불 소식을 듣고 신하를 보내어 757년부터 864년까지 절을 짓게 하고 이름을 백월산 남사라 했다. 김대성이 경주 불국사를 지은 때와 같다.” 하지만 연구자들만 알 뿐이지 창원 사람 태반은 이 이야기를 모른다. 찾는 발걸음도 뜸하다. 산자락 아래 사는 이들만 옛날 백월산 골짜기에 큰 절이 여럿 있었다는 말을 전한다.
산봉우리는 낮은 산답지 않게 크고 작은 바위들로 어우러져 그럴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신라인의 현신성도(現身成道)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소개된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산꼭대기 사자암과 그 아래 동벽에서 용맹정진했던 것이다.
남사(南寺)는 왕명으로 지어진 만큼 아주 큰 절이었겠다. 산아래 골짜기는 모조리 과수원으로 바뀌었지만 자취는 그대로 남아 있다. 길과 밭 곳곳에는 그릇과 기와조각이 박혀 있고 밭둑이나 대숲 한가운데도 석탑의 받침대와 부재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등산길이 시작되는 백운사 들머리 샘터 벽면에는 조그만 마애불상이 있다고 한다. 이번 걸음에는 놓치고 보지 못했는데, 세월이 많이 갉아먹었지만 조그맣고 귀여운 모양이 여인으로 현신한 관세음보살이 낳은 아기부처의 형상이 아닐까 짐작하게 만든다고 한다.
백운사에서는 백월산 골짜기를 타고 오른다. 반면 아래에 있는 성불사 뒷길로 해서는 능선을 타고 오르게 된다. 초입에는 소나무가 우거져 있어 전망을 쉽게 내주지 않는다. 바람이 조용한 가운데 걸음을 서두르다 보니 땀이 솟는다.
헬기장을 지나 산마루까지 오르는 길에서는 사방으로 전망이 드러난다. 멀리 창녕 소벌(우포늪)까지 보이기도 한다지만 흐린 날씨가 오늘은 눈앞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어떠랴, 앞으로는 봉림산의 씩씩한 뒷모습을 어루만질 수 있고 돌아서면 오글오글 온천 한 줄기에 목을 매고 사는 사람들의 집과 함께 마금산이 버티고 서 있다.
여기서 왼쪽 산줄기는 천주산으로 이어지고 오른쪽에는 주남저수지가 한 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와 있다. 그 사이 열린 벌판은 수박으로 이름난 대산벌인가 보다. 다만 쇠울타리 속 감시카메라가 눈에 거슬릴 뿐이다.




△가볼만한 곳

백월산 가는 길에는 조선시대 초기 무장이었던 북면 출신 최윤덕 장군의 무덤이 있다. 가기 전에 화천리에서 우회전해서 대산리 갈전 마을 뒷산 언덕배기에 있는 무덤을 찾아볼 수도 있고 나오는 길에 표지판을 따라 좌회전해서 들러볼 수도 있다.
둘레에 직사각형으로 돌로 쌓아 붙인 뒤 봉분을 올린, 엄청 큰 모양인데 앞쪽에 장군 무덤이 있고 뒤쪽에는 부인이 묻혀 있다. 요즘처럼 부부가 나란히 쌍분을 쓰지도 않은 것을 보면 당시 장군의 권위가 대단했거나 아니면 여성의 지위가 아주 처졌거나 둘 중의 하나겠다고 짐작을 해본다.
장군은 조선 초기 세종 때 국방을 튼튼히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덕무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했으며 남해안 일대에 왜구를 막는 성곽을 새로 쌓는 일도 도맡아 지도했다. 뿐만 아니라 북방 여진족의 준동을 물리쳤고 이른바 강동6진 개척을 이룩한 명장으로도 기록에 남아 있다.
하지만 후세 사람들은 그런 공적보다는 장군이 정승 자리에 있을 때 몇 번이나 물러날 것을 자청했다는 데서 더욱 감명을 받는 듯하다.
1376년 태어난 장군은 1433년 우의정 자리에 앉아 12년 뒤 70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10여 년을 일인지하 만인지상 자리에 머물렀었는데 이 때 능력이 모자라니 물러나겠다는 상소문을 여러 차례 올렸다고 한다.
자신은 학문을 익힌 문신이 아니라 싸우는 장수이니만큼 우의정.좌의정 따위는 맞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요즘은 명예와 권세가 있는 자리에 한 번 앉으면 어떻게든 물러나지 않으려 노욕을 부리다가 험한 꼴을 보고 마는 세태다 보니 더욱 남다르게 느껴진다.
당시 사정까지야 어찌 세세하게 알겠냐만은, 앉을 자리와 앉아서는 안될 자리를 스스로 가릴 줄 아는 이가 갈수록 드물어지고 있으니 그야말로 본보기가 될만하다.
무덤을 에워싸고 흐르는 소슬한 솔바람을 귓전으로 넘기며 두 손 잡은 채 이런 얘기를 들려주면 자라나는 아이들 세상살이에 득이 될까 실이 될까.
이리저리 굴리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세상과 사람이 한꺼번에 싫어진다.


△찾아가는 길

창원.마산에서 북면 마금산 온천 가는 길로 가다가 월촌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간다. 마산 구암 고가도로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아 새로 뚫린 길을 따라 이어지는 지방도로 1045호선을 따라 가면 되는 것이다.
백월산은 사람들 가까이 있으면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산이라 길을 잃지나 않을까 걱정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꺾어지는 길목 훨씬 못 미쳐서부터 양식점 ‘달달박박’을 알리는 입간판들이 서 있기 때문이다.
사람 어깨 높이의 주황색 입간판이 오른편으로 줄줄이 늘어서서 길머리를 알려주는데, 우회전한 다음 조금 가다가 왼쪽 과수원 옆에 색다르게 생긴 달달박박 건물이 나지막하게 자리잡고 있으면 바로잡아 든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가면 왼쪽에 암봉이 나타난다. 길가에는 월백교회와 성불사를 알리는 표지판이 높낮이만 달리해서 나란히 서 있다. 여기 월촌마을에서 안으로 접어들면 된다. 마을을 따라 흐르는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면 된다.
시내버스로도 갈 수는 있다. 대신 배차 간격이 1시간을 웃도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창원시나 마산시의 홈페이지나 교통관광과를 통해서 미리 확인해야 한다. 이 때는 대부분 월촌삼거리에서 내려 조금 더 걷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91번(배차간격 180분)과 91-1번(82분).91-2번(175분)은 창원 중앙동 정우상가 앞에서 탈 수 있다. 마산 합성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21-1번(52분)과 90번(90분).90-2번(180분) 시내버스를 탈 수 있고 양덕동 마산고속버스터미널 앞에서는 21-2번과 21-3번(109분)을 탈 수 있다. 물론 경남대 앞에서는 이들 모두를 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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