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말고도 살고 있네요] (2) 자리공

물큰물큰 훈기가 들길을 감싸고 산기슭을 나직나직 쓰다듬습니다. 사방은 물이 오르느라 쌔근쌔근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듯한데, 무학산 기슭엔 엊그제 내린 눈발에 놀라 꽃잎 파리하게 얼어붙었던 광대나물 꽃대도 옹차게 일어섭니다. 냉이꽃도 벌써 봉오리 올렸고요. 양지쪽엔 뾰죽이 새순들이 오릅니다. 아무 데나 밟고 다니기 겁나서 엉거주춤, 우물쭈물 사방을 휘두르며 걷다가 앉기를 반복하며 봄 산을 거닙니다.

어린 날 이맘때면 할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들로 나가십니다. 포실포실한 산밭에서 봄물이 잔뜩오른 쪽파 한 소쿠리 캐서 담아 놓고 망태엔 봄에 식구들 건강 챙길 약초들을 캐 담습니다. 저는 양지쪽에 앉아 냉이를 캐고 쑥을 뜯다가 할머니가 캐어놓은 쇠무릎 뿌리를 다듬습니다. 저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싱그러운 냄새에 취해 한 뿌리 씹어보기도 하고, 오동통한 뿌리에 달려 올라오는 흙내음에 얼굴을 비벼보기도 합니다. 신동엽 시인의 시구 '향그러운 흙가슴'이란 이런 냄새와 향을 지니지 않았을까? 상상하며 봄볕을 즐겼습니다.

동네 어귀 담장가 골담초 가지도 몇 낱 자르고, 고개 넘어 밭둑 밑에서 겨울을 난 접골목 가지 몇 개, 엄나무·오갈피를 실한 가지는 두고 잔가지들을 잘라서 가지런히 정리합니다.

할머니 약초 망태가 얼추 그득해지면 마무리 작업으로 덤불이나 돌너덜 파기 좋은 곳을 살피고 다니며 자리공을 찾습니다. 아직 순이 오르려면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말라붙은 대궁을 보면서 찾습니다. 이 자리공 뿌리만은 어른들이 동원되지 않으면 캐낼 수가 없습니다. 뿌리가 깊이 박혀서 힘이 많이 드니까요. 상륙과의 이 자리공은 약명도 상륙이며 장녹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5~6월에 긴 이삭형 꽃대에 흰 꽃이 피고 나면 한여름에 진자색 열매를 맺습니다. 어린 날 소꿉놀이 할 때 손톱을 치장하던 화려한 화장품이기도 했지요. 한방과 민간에서는 수종·이뇨·하리·신장염 등에 약재로 쓰이는데 뿌리는 독성이 강하므로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식혜를 만들어 먹는 가장 큰 이유가 이 독성을 삭히기 위해서였습니다. 새봄에 올라온 어린 순과 잎은 나물로 해먹을 수 있으나 독성이 있으므로 데친 후에 잘 우려내고 먹어야 합니다.

자리공 열매. /박덕선

할머니는 새봄마다 이 약초들을 모아서 달고 진한 약식혜를 담그시는 것이 연례행사였습니다. 쇠무릎·골담초·접골목·오갈피·해동피 그리고 자리공 뿌리를 함께 넣고 무쇠 솥에 푹 달입니다. 그 물에 미리 불려둔 엿기름을 가라앉은 맥아분까지 다 따라 붓고 잘 삭혀서 식혜를 만드십니다. 봄마다 이 약식혜 해서 먹이는 것을 연중 귀한 행사로 여기시던 할머니의 특제 민간요법이었습니다. 그 약식혜를 온 식구가 며칠 동안 나눠 먹으면 한 해 동안 신경통·관절염·골다공증을 앓지 않고 원기도 왕성해진다고 챙기던 집안 보양식이었습니다. 저는 달달한 그 맛에 간식 삼아 끝도 없이 마셔댔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직 관절도 튼튼하고 골다공증도 무사합니다. 요즘은 전 국민이 약초꾼이 되는 바람에 산과 들이 몸살을 앓는다는데 이제는 이 좋은 약초들과 더불어 공존하기 위한 보호 방안도 함께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깊이 생각합니다.

/박덕선(경남환경교육문화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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