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61) 통영별로 27회차

오늘은 지난 번 전북 남원시 덕과에서 길 잃은 이야기부터 하렵니다. 통영별로 옛길을 대부분 지금의 국도가 덮어쓰고 있으니 옛길을 찾아야 할 긴장감이 덜한 데서 비롯한 사달입니다. 옛길 구간 가운데 출발 지점인 덕과면소재지에서 사매 사거리까지의 길이 국도의 서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으니 그 구간만 긴장하면 되겠다고 가벼이 마음을 가진 원인도 있습니다. 더구나 길을 나설 때 엉뚱하게도 17번 국도의 동쪽으로 길을 잡아버린 것이지요. 자료를 정리하며 지도를 살피니 옛길은 남원시 덕과면과 임실군 둔남면의 경계를 따라 열렸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말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습니다. '알던 길도 물어서 가라'하고,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고 한 말을 다시금 새기게 된 하루였습니다.

◇덕과에서 길을 헤매다

잘못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길은 좋아서 의심하지 않고 걸었는데, 제법 지났는데도 지도에서 본 익숙한 지명이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조금씩 의구심이 일더니 결국 중화참에 보절면소재지에 들면서 크게 사달이 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이미 시간이 크게 지났으니 점심부터 해결할 수밖에요. 그렇게 찾아든 동네 중국집에서 길벗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식전에 시킨 탕수육이 정말이지 지금까지 먹어본 중에서 가장 맛있었습니다. 양도 어찌나 많던지 중간 크기를 시켰는데도 장골 넷이서 3분의1을 남겨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시킨 짬뽕도 2인분으로 넷이 충분히 먹을 만치 넉넉했고 맛 또한 일품이었습니다. 별 생각 없이 들른 동네 중국집에서 세상도처 유상수(世上到處 有上手)란 말을 실감할 줄이야. 그로써 오전에 헤맨 기억은 충분히 보상되었고, 그곳에서 같이 점심을 들던 어른께 부탁해 매내삼거리까지 차를 얻어 타고 나와 다시 남원으로 길을 잡아 나섰습니다.

   

◇뒷밤재를 넘다

덕과와 사매를 오가던 길이 남원시와 임실군의 지경을 따라 열렸다는 근거는 오신리에 있는 돌장승을 들 수 있습니다. 사실 그때는 못 봤는데, <문화유적분포지도 -남원시->에 매내교 서북쪽 250m 지점에 돌장승이 있다고 표기해 두었군요. 매내천에 매몰돼 있다가 2003년 제방공사 때 나왔다고 합니다.

원래는 발견된 지점에서 가까운 길가에 있던 것이 이리로 묻혔다가 드러나게 됐는데, 주민들 얘기로는 얼굴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발견 당시 거꾸로 박힌 그대로 아직 방치돼 있다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거기서 한길로 나서면 매내삼거리입니다. 작가 최명희의 혼불문학관 들머리로 더 유명한데, 예부터 교통의 요충임은 입구 빗돌 무리로도 알 수 있습니다. 통영별로 옛길은 여기서 남쪽으로 조금 더 간 곳에서 새롭게 넓힌 17번 국도와 겹쳐 뒷밤재를 넘습니다.

뒷밤재를 오르는 길벗들.

길 따라 오르다가 만난 오리정(五里亭)은 <춘향전>의 무대라 전해집니다. <춘향전>에서는 찾을 수 없으나 마을 사람들은 바로 예서 이몽룡과 춘향이 이별의 정한을 나눴다고 믿고 있는 게지요. 그래서 그 즈음에 춘향이 이도령을 떠나보낼 적에 버선발로 달려와 발을 굴렀다는 버선밭과 이를 기리는 빗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리정은 고을 바깥 오리에 둔 정자에서 비롯했으므로 이와 상관없이 옛길을 일러주는 깃대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 남원의 북쪽 지경고개인 뒷밤재에서 그 정도 떨어져 있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뒷밤재와 오리정 중간에는 박석치라는 재가 있는데, 아마 길이 유실되지 않도록 고갯마루에 깐 얇은 돌(박석薄石)에서 비롯한 이름으로 여겨집니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남원 들기 전에 고갯마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며 감개무량해 하던 바로 그곳입니다. 하지만 실제 남원과의 지경고개는 그 남쪽의 뒷밤재입니다. 뒷밤재로 오르는 옛길은 계곡을 따라 곧장 설정되었으나 지금은 찾을 수 없습니다. 이날 고개에 이를 즈음에는 조금 전 내리기 시작한 겨울비가 점차 굵어지던 차인지라 긴 고갯길을 어찌 넘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길벗 손홍일 님이 터널 입구 길가에서 경찰차를 발견하고 잽싸게 다가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오라고 손짓합니다. 터널을 건네달라고 부탁한 모양입니다. 해서 쉽게 고개를 지나 서남대학교 입구에서 내렸습니다.

◇남원에 들다

그날은 경찰차의 도움으로 남원에 들었지만, 통영별로 옛길은 2주 뒤에 보완 답사를 통해 확인하고 답파하였습니다. 이곳도 철저하게 도로의 경제학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고갯마루에서 골짜기를 따라 난 길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깎여나갔지만 골짜기가 넓어지는 곳은 곡벽을 따라 옛길이 잘 남아 있어 지금도 농로로 쓰이면서 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뒷밤재를 내려서 처음 만나는 마을이 밤티인데, 고개가 뒷밤재인 까닭은 이 마을에서 사매면 대율마을로 넘어가는 앞밤재와 구분하기 위해 그런 것입니다.

밤티마을에서 통영별로는 옛 17번 국도가 덮어쓰고 있어 그 길을 따라 향교말을 지나고 축천을 건너 남원부성에 듭니다.

옛길가 남원향교는 여느 향교와 사뭇 달라 길손의 눈길을 오랫동안 사로잡습니다. 남원향교는 태종 10년(1410)에 부의 서쪽 대곡산(大谷山) 기슭에 창건하였다가 1428년에 부의 동쪽 덕음봉 밑으로 옮기고, 1443년에 지금 자리로 옮겨지었다 합니다. 정유재란 때 소실돼 복원한 뒤로 여러 차례 소실과 복원을 거듭해오다 1876년에 화재로 명륜당과 서적이 유실된 뒤 중건하면서 지금 모습을 이루게 됐습니다.

남원향교의 특징은 무엇보다 규모가 클뿐더러 매우 쓰임새 있게 지어졌다는 겁니다. 누문의 중앙과 명륜당의 우익이 지붕을 갖춘 회랑으로 이어진다든지, 명륜당 뒷벽이 대성전으로 통하도록 '철(凸)'형 구조를 보인다든지가 특징입니다. 향교 입구 하마비도 큰 편인데 뒤에 경진 오월에 세웠다고 새긴 것으로 보아 중수 이후인 1880년 무렵 세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남원향교 누문과 명륜당.

향교를 지나 남원부성으로 길을 잡아 내려서면 평지로 전환되는 곳에 동서로 흐르는 내가 축천(丑川)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원도호부 산천에 "축(丑)은 축(畜)으로도 쓴다. 부의 동북방에 시냇물이 몰아치므로 마을을 설치할 때에 술자(術者)의 말을 좇아 쇠로 소를 만들어 지키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축천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그 소는 지금도 남아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의 서쪽 기슭에 축천정 정자가 있었다고도 했지만 지금은 쇠로 만든 소도 정자도 찾을 수 없습니다.

축천을 지나 '성뒤들' 즈음에 이르니 근년에 복원한 남원부성의 북성벽과 서성벽 모서리가 눈에 듭니다. 남원은 신라 신문왕 4년에 전국에 둔 5소경 가운데 한 곳이며, 경덕왕이 남원(南原)으로 개명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남원부성의 연원은 멀리 삼국통일전쟁 때로 올라갑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원도호부 고적에 "유인궤성(劉仁軌城) : 지금 부의 치소이니 둘레로 수 리가 되는데 옛터가 있다. 강희맹의 시에 '폐정(廢井)이 황량하게 저녁 연기에 잠겼고, 유공의 사업은 이야기로 전해오네. 대당이 먼 나라를 포용할 계략을 하지 않고, 부질없이 고성(孤城)을 쌓아 뒷날 웃음거리가 되었네' 하였다"고 나옵니다. 당시 도시계획에 대해 같은 책에 전하길, "정전유기(井田遺基) : 당나라 유인궤가 자사 겸 도독으로 정전법(井田法)을 써서 9개 구역으로 구획하였는데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역시나 5000분의1 지형도 <남원 036>을 살펴보면, 남원부성이 정확하게 남북으로 축을 설정하고 그 안에 당시 정전 구획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 현재 도시의 골격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글·사진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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