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권력과 비문화권력의 경계는 어디일까. 진정한 지식인과 지식 장사꾼은 또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요즘 가장 '핫한' 인문학자인 강신주에 대한 '진정한 지식인'(?)들의 비판을 보며 든 생각이다.

누군가는 강신주를 문화권력으로 규정했다.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불편한 심기가 담긴 용어 선택이었다. 묻고 싶다. 문화권력이 그 자체로 나쁜 건가? 또 하나. 글쓴이는 권력적 지향과 무관한 삶을 살고 계신가? 당신이 글을 쓰고 이런저런 주장을 펼치는 것 역시 자기 영역에서 인정받고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즉 '권력'을 갖기 위한 실천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가?

강신주에 대한 비판은 대개 '구분 짓기'란 형식으로 진행된다. '공부'와 '상담'은 다르고 '대중의 철학자'가 있다면 '거리의 철학자'가 있다는 식이다. 이를테면 문화평론가 문강형준은 <한겨레> 칼럼에서 "아예 텍스트 강독조차 없고 바로 상담으로 들어간다"며 유행 중인 강신주식 인문학 대중 강연을 꼬집었다. 진정한 강연은 뭔가 다르다는 기대를 갖게 하는 언술인데 시빗거리 치고는 좀 옹색한 느낌이다. 문강형준 씨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강연 방식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비록 미진한 형태라도 철학과 대중이 소통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강 씨가 텍스트 강독을 중심으로 한 '진짜' 공부에 매진하면서도 <한겨레> 같은 '대중' 매체에 불과 원고지 9장짜리 칼럼을 쓰며 대중과 만나고, 미미하겠지만 생계에 보탬을 하고 있듯이 말이다.

SBS CNBC 인문학 강연 프로그램 <후 엠 아이?(Who am I?)>에 출연한 강신주.

그렇다. 기자는 강신주를 마뜩잖게 바라보는 논자들의 시선에서 일종의 위선을 본다. 강신주가 강연과 방송, 출판 등을 통해 이른바 '인문학 장사'에 열중하는 걸 불편해하는데 대체 어느 지식인이 이런 삶으로부터 자유롭단 말인가. 기회와 여건만 된다면 방송이든 지면이든 인터넷이든 어디든 나가 지식과 몸을 팔고 있는 게 현실 아닌가? 정치권이나 정부(기관), 기업·대학 같은 곳에 봉사하는 지식인은 또 어떤가. 강신주에 비해 참으로 품격 넘치는 인생을 살고 있을까?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매여 있는 한 누구도 쉬이 강신주식 '돈벌이' 방법을 거부하기 힘든 세상인데 마치 자신은 그와 상관없는 것처럼, 진정 고결하고 초연한 인문학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게 역겨울 뿐이다.

문화평론가 권경우는 <교수신문>에 쓴 글에서 철학자 고병권을 강신주와 대비하며 "철학한다는 것은 자신의 지식이나 깨달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주체들이 그 안에 들어 있는 '능력'을 발견함으로써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일"이라고 했는데 이 역시 과연 적절한 구분 짓기인지 의문이다. "철학자는 선택지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를 보여주고 그들이 무엇을 선택하는지 명료하게 보여준다"(경향신문)는 강신주의 말과 별 차이를 모르겠기 때문이다.

'강신주 현상'은 오히려 소위 지식인과 지식 장사꾼의 경계가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징표다. 자본주의와 국가권력에 맞서라는, 어쩌면 현실에서 가장 과격하고 급진적인 메시지조차 '장사'라는 형태로 팔아먹어야 살아남는 시대. 어떻게 가르고 나누려 해도 그 차이를 뚜렷이 알 수 없는, 강신주와 그의 비판자들은 '온몸으로' 이를 입증해주고 있는 사람들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오직 이런 구분만 가능한 건 아닐까. 강신주처럼 성공한 자와 (아직) 그렇지 못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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